요즘 결혼이주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반대로 영어를 배울 수 있어 1석2조의 효과를 보고 있어 너무 즐겁다는 이난영(69)씨.하지만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는 “필리핀 출신 결혼이주여성는 영어를 할 수 있다며 한글을 설명하기 쉽다”고 전했다. 그러나 “우리말로 '배'는 한 단어임에도 물위에 떠있는 배, 사람의 배, 먹는 배의 다양한 뜻이 들어있다”며 “모국어가 영어인 필리핀여성은 영어 단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지만 캄보디아 등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결혼이주여성에게는 손짓·발짓을 통해 가르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필리핀여성의 경우 한글을 가르치고 영어를 배울 수 있어 1석2조의 효과를 보고 있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그는 “하지만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결혼이주여성들을
한나라당 최홍우(56) 서울시의원은 지난해 7월 7대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최 위원장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고령화로, 노년층의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장애인의 사회참여 욕구 또한 급속히 증대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고 운을 뗐다.최 위원장은 이런 점에서 장애인을 포함한 노인, 임산부, 어린이 등 교통약자의 이동권과 보행권 확보가 21세기 선진교통의 핵심적인 화두라고 이야기 했다.“하지만 서울의 교통 현황은 장애인을 포함한 교통약자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 및 보행시설이 부족하고, 교통사고 또한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상황입니다.”그는 서울시가 약속했던 지하철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 등이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은 점 등
생후 8개월, 두 다리를 모두 잃게 된다면? 언제 어디서 다가올지 모르는 장애의 위험 속에 살고 있는 시대에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안고서 살아가는 이가 있다. 28년째 휠체어와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비장애인보다 열심히 살고 있는 강희수(28·지체장애2급)씨.경북 의성의 의성농산영농조합법인에서 웹마스터 겸 웹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강씨는 지난 2005년부터 이곳에서 일하면서 회사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강씨는 회사에서 마늘 관련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는데, 오픈마켓을 처음 도입하고 마늘을 재료로 한 비누를 개발해 상품화 하면서 회사의 매출을 10억원 가량으로 올렸다. 이 덕으로 회사에 필요한 일손이 늘어 홍보, 제품디자인, 생산 등 분야에서 7명의 직원들이 신규로 채용되기도
“압화라고 아세요? 예쁜 꽃을 약물처리를 이용해 건조시킨 후 엽서, 편지지, 액세서리, 액자용그림 등 다양한 생활용품에서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어요.”압화를 이용해 경로당, 어린이집, 방과 후 교실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김용봉(77)씨.그는 영등포노인종합복지관(이하 복지관)의 이용자들이 모여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오렌지 봉사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지 올해로 8년째다.“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길을 가다가도 주변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셨어요. 아마 어려서부터 많이 봐서 봉사활동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지금도 전철역에서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많이 돕고 있다는 그는 밝은 얼굴로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지금도 복지관에
충북 옥천군 청산면 공용버스터미널 앞에서 40년째 박약국을 운영하고 있는 약사 박명식(지체장애 3급,67)씨. 박씨는 14살 때 급성 화농성 관절염으로 지체장애 3급의 판정을 받았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그는 왼팔과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부모님까지 일찍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앞이 캄캄했죠.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억울하기도 하고 그때는 모든 게 다 화가 나고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박씨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긍정적으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 혹은 후배들을 가르쳐 생활할 수 있었다. “다행히 공부를 잘해서 친구들이나 후배들을 가르칠 실력이 됐어요. 공부를 가르치면서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많이 도움이 됐고 힘든 시기
봉사활동으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며 환하게 웃음 짓던 최월화(66)씨.“어머니께서 주변 사람들을 많이 도우셨어요. 아마 어려서부터 많이 봐서 봉사활동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것 같아요.”그는 지난 2007년과 2008년 사이 2,090시간의 봉사활동을 한 것을 인정받아 구청에서 주는 봉사활동 관련 금장을 받았다. 이 상은 1년에 1,000시간 이상 봉사활동을 해야만 받을 수 있는 상이다.마포노인종합복지관(이하 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한지 올해로 5년째라는 최씨는 처음 봉사활동을 했던 6·25 전쟁 직후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6·25전쟁 후 학교가 없어진 학생들을 위해 서울대, 해군장교, 약사 등 지식층이 모여 간이 학교를 차려 1년여간 수업을 했다”고 전했다. “그 당시
다양한 분야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느라 바쁘다며 환하게 웃으시던 정연익(73)씨.그가 요즘 하고 있는 수업은 선물포장, 신문 활용 교육, 바둑, 서예, 한지공예, 컴퓨터, 어린이한자교육 등 다양하다.그가 처음 남을 가르치기 시작한 봉사는 정보화 도우미.그는 “복지관에서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 3개월 동안 노트필기 한 것을 책으로 만들었다”며 “컴퓨터에 대해 잘 몰랐던 내가 노트필기 한 것이 오히려 눈높이 교육이 돼 보조강사 도우미로 활동할 때 더 효과를 봤다”고 전했다.최근 해피방가우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복지관에서 포장기술이나 한지공예 등을 배워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 “얼마 전 전시가 끝났다”며 “어린이들이 고맙다는 편지를 쓴
“‘탕’ ‘탕’ 총소리가 좋아 시작했어요”김임연 선수가 30여년전 운동을 시작할때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의 노력조차 없던 시절. 장애인을 위한 운동시설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4살이 되던 해, 바이러스로 인한 소아마비가 찾아왔고 일어서는 것도, 앉아있는 것도, 그에게는 힘들기만 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앉아있는 것이 힘들어 할머니의 등에 업혀 겨우 입학식에 참여했고, 조금씩 운동을 시작하면서 목발을 짚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혼자 학교를 다닐 수 있었을 무렵, 한 복지관을 통해 수영·양궁·사격 등 각종 운동을 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다. 주변의 추천으로 사격선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사격선수가 된다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애인은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장애인도 찾아보면 봉사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항상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식인 이웃사랑 정신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한기원씨(남, 67)그는 요즘 장애어린이들을 위해 학교까지 통학버스를 운행, 30여명의 장애인과 노인정에 빵 함께 나누기, 노약자들을 위한 이동봉사 등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지난 1987년 중풍으로 오른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온 이후 몸이 불편해 많이 힘들어 했던 그는 ‘휠체어를 탄 사람은 봉사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휠체어에 앉아 간단한 안내를 하는 것도 봉사활동이다’는 말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그 이후 장애인 자활사업과 봉사활동에 더
역삼동에 위치한 청음회관 4층 조용한 강당에는 청각장애노인들로 구성된 청음실버댄스팀의 댄스스포츠 열기로 뜨겁다. 그 중에 눈에 띄는 청일점 서광성(66)씨.댄스스포츠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이지만 음악에 맞춰 파트너와 리듬이 일치해야하는 스포츠기 때문에 음악 없이 즐긴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그는 “비록 음악은 들리지 않지만 댄스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의 행동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보고 박자를 연습해 극복하고 있다”고 말했다.수화통역을 맡은 청음회관 류승남 복지지원팀장은 “음악의 자극 없이 흥겹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비장애인과 다르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또한 “음악을 크게 틀면 진동은 느낄 수 있지만 아래층에서 청음훈련을 하고 있는 다른 수강생
‘시각장애인이 법관이 된다’ 모두들 의아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편견을 깨고 당당히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한 시각장애인이 있다.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시야가 좁아지는 후천적 시각장애를 겪고 있는 최영(27·시각장애3급·남)씨가 그 주인공이다. 고등학교 3학년, 자신의 눈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지만 최씨는 좌절하지 않고 2000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입학당시만 해도 남들과 같이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시력은 계속 떨어져 2005년에는 거의 앞이 보이지 못하게 됐다. 최씨는 장애의 벽을 넘어 법관이 되기까지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비장애인도 읽고 이해하기 힘든 법전을 매일 듣고 다니는 것이 그의 공부 방법이다. 타이핑을 통해 파일로 법전을 만들어준 복지재단의 도움
컴퓨터, 에어로빅, 장구, 탁구, 드럼, 댄스팀 등등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 류재우 어르신(남·71)그는 처음에 ‘복지관은 노인들만 모여 있는 곳’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복지관 홍보에 앞장서고 있다.정년퇴직 이후, 주변 사람들의 소개로 복지관을 알게 된 그는 복지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컴퓨터나 배워보자’며 복지관을 찾았지만, 지금은 복지관에서 가장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행복나눔 시니얼오케스트라’단원 ‘젠틀맨드럼’팀에서 활동 중인 그는 “지금은 복지관 자체 내 공연을 주로 하고 있다. 앞으로 초청이 있다면 어디든 공연을 하기 위해 갈 예정”이라며 “이제 1년 정도 배우고 있지만 심리적으로 즐거워 오히려 건강한 몸이 된
전직 교사의 경력을 살려 저소득 어린이을 위한 봉사를 이어가고 있는 조성래(64)씨.조씨는 수학선생님이었다. 교사직을 정년퇴임 한 뒤 현재는 SOS어린이마을과 인근 초등학교 및 중학교에서 방과 후 교육을 돕고 있다. 특히 SOS어린이마을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에게 집을 지어주고 세대를 구성해 가족을 이뤄주는 전국적인 보육시설로, 조씨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복지관 봉사자들이 함께 방과 후 교실을 통해 영어, 일어, 바둑, 장기 등 다양한 활동을 가르치고 있다. 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을 했던 것을 시작으로, 사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 모여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하자는 취지에서 지금 하고 있는 봉사를 시작했다. 이런 봉사를 하는 데는 조
말수가 느려 ‘거북이할머니’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유호근씨(여·68)유씨가 활동 중인 강동노인종합복지관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자원봉사활동, 지역사회 어린이들에게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환경지킴이 등을 통해 다방면에서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유씨가 타 노인에게 모범이 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유씨는 젊은 시절 새침한 새댁, 말 수 없는 아줌마였다. 하지만 그가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밝고 건강한 노인으로 변화하게 됐으며, 2007년 시작된 ‘환경지킴이’ 활동은 친근한 옆집 할머니로, 환경과 자연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선생님으로 살게 해줬다.강동구의 자연환경을 아끼고 지켜가는 환경지킴이 GSC(Green Silver Cop)봉사단은 주변 습지나 숲을 찾아가 체험하고 탐사, 환경정리를
“옛말에 60이 넘으면 덤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난 덤으로 16살을 살고 있다.”약수노인복지관에서 선행문화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김낙순(76·남)씨는 “나? 16살”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그는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선행문화 지킴이 리더, 실버넷 뉴스기자, 도덕국가 건설연합 수석 부총재, 격월간지 도덕국가 편집인, 공인중개사, 시인 한 번에 나열하기 조차 힘든 이름들은 김씨가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줬다. 김씨는 어릴 적부터 ‘별난아이’였다. 일제하에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일본교장에게 “일본은 망한다”고 소리치기도 했으며, 고등학생 때는 지역에 작은 야간학교를 세웠다. 이때 시작한 봉사활동을 계기로 사회소외계층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고 현재도 그때의
HAPPY MAKER(행복을 만드는 사람)는 노인상담가를 말한다. 만 60세 이상의 상담교육과정을 수료한 역량 있는 전문노인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는 마정자씨는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소외된 어르신들을 찾아 나선다. 현재 마씨는 건강과 심리, 가족, 경제 등 다양한 상담을 실시함으로써 노인과 노인가족의 삶의 질 향상을 돕고 있다.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심리상담가 1급, 웃음 레크레이션 1급을 소지하고 있는 마씨는 2008년 2월 백석대학교에서 상담과 신학 복수전공을 해서 졸업했고 사랑의 교회 자원봉사교육 등을 수료했다.마씨는 어르신들과 결연을 맺는 것으로 처음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전화통화로 시작해 어르신의 말벗 친구가 됐고 이후에는 직접 어르신의 집을 찾아 봉사활동을 다녔다. 마씨는 “처음 방문했을 때
2004년 장애인 교육권 확보를 위해 서울특별시교육청 농성에 돌입하면서, 함께가는 서울장애인부모회가 창립됐다. 최석윤 회장(46)에게는 머리칼을 기른 12살의 아들이 있다. 최 회장의 아들은 발작증세로 머리를 여러 번 꿰맨 경험이 있어, 충격을 덜기 위해 머리칼을 길렀다. 최 회장의 아들은 지적장애어린이로 생후 3개월 때 세균성 뇌수막염 판정을 받았다. 당시 의사는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9가지 장애를 겪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 부부는 여느 부모가 그렇듯이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됐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러한 마음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다.최석윤 회장(46)에게 장애인교육법 제정 후 장애계단체의 분위기를 묻자, ‘아직도 70년대 사회 운동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애인
수화로 영상을 담는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www.deafmedia.net)’는 비장애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른, 청각장애인의 삶에 대한 모습과 문화 등을 보여준다.데프미디어에는 박재현(27·청각장애 2급) 감독이 있다. 그의 영화에는 소리가 없다. 박 감독은 처음에 수화가 들어간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소리 없는 영화’를 제작·상영했다. 그러던 중 그의 영화는 청각장애인에게는 소리가 없다는 의미를 이해시키고, 수화를 전혀 모르는 비장애인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 그 후 박 감독은 청각장애인의 현실과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데프미디어는 지난해 5월경 창립 1주년과 더불어 9번째 농영화 ‘길거리 천사’를 상영했고, 계속해서 꾸준히 농영화를
박춘자(79)할머니는 요즘 계속 걸려오는 전화로 정신이 없다. 남한산성 꼭대기에서 등산객들에게 김밥과 도토리묵, 닭죽과 삼계탕, 소주를 팔며 평생 모은 돈을 기부한 이후부터 할머니를 취재하고자 찾는 곳은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할머니는 그저 아이들을 돕고 싶어서 한 일이라고 말했다.할머니의 인생살이는 다소 굴곡진 삶이였다. 서울 왕십리에 살던 10살 때부터 김밥을 팔며 장사를 시작한 박씨는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남편을 만났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헤어진 뒤 평생 궂은일을 마다않고 장사를 하며 재산을 모았다. 평생 장사를 하면서 억척같이 돈을 번 할머니에게 주위사람들은 구두쇠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기도 했었다.남한산성 꼭대기에서 20년간 매일 등산객들에게 김밥과
노년의 제 2인생을 날다.전통놀이 지도자 강규용씨를 말하다.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전통놀이 지도자 ,이는 강규용 씨를 수식하는 말이다. 60이 넘은 나이의 새로운 시작은 쉽지 않았지만 그는 현재 교육과학부의 전통놀이 지도자 프로그램을 정식으로 허가받아 자격증 반을 운영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보건복지부 노인 일자리 사업의 일환으로 노인을 위한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그는 전통 놀이는 ‘만들기’, ‘식물놀이’, ‘전래놀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자연을 그대로 활용하여 놀이를 하게 되면 식물놀이가 되고, 친환경 소재와 접붙여 놀이기구를 만들게 되면 만들기가 되며, 도시 좁은 공간 어디에서도 할 수 있는 사방놀이는 전래 놀이에 해당된다. 각각의 놀이에는 2가지 고민이 담겨있다. 하나는 ‘놀이라는 개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