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다'라는 단어를 수화로 표현하는 정택진 씨 ⓒ2006 welfarenews
▲ '돕다'라는 단어를 수화로 표현하는 정택진 씨 ⓒ2006 welfarenews
“핫핑크로 말해요.”

올봄엔 핫핑크가 유행이란다. 분홍의 연약함을 넘어선 강렬함에는 붉게 타오르는 정열이 숨어있는 것만 같다. 수화통역사 정택진 씨(42ㆍ지체4급)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만의 색깔은 핫핑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의 아내는 농아인이라 했다. 그녀를 만난 다음부터 드라마틱한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봉사활동을 통해 지난 1985년 이주순(38ㆍ청각2급) 씨를 처음 만난 정 씨는 4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식장은 무척이나 쓸쓸했다. 양가 부모의 빈자리 때문이었다. 정 씨의 어머니는 농아인 아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고아였던 아내 곁에는 손을 잡아줄 아버지도, 눈물 흘릴 어머니도 없었다.

연애 기간 동안 어머니의 반대로 세 번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했다.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그는 독하게 마음먹었다. 아내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또한 이 결정에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해 정진하기로. 그날로 뛰어가 아내 앞에 무릎 꿇으며 청혼한 정 씨는 아내에 대한 헌신과 사랑을 손끝에 담아냈다.

KBS 사랑의 가족에 9년 넘게 고정출연 중인 정택진 씨. 정 씨의 TV출연은 아는 농아인들의 출연요청 팩스 덕분에 이뤄졌다고 한다. 얼굴이 알려진 정 씨는 KBS 아침마당에 아내와 함께 출연했고, 뜻밖에 아내의 가족도 찾을 수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동정심으로 시작한 만남이었지만 지금의 아내는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아내를 만나면서부터 제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영화처럼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평소 좋아하는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던 정택진 씨는 1996년 제1회 장애인가요제에 출전, 윤복희의 ‘여러분’을 수화와 노래로 열창하며 온 무대를 뛰어다녔다. 열정적 공연에 박수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장려상을 받은 그는 입상자들과 음반도 냈다. 인터뷰 중 갑자기 일어나 손짓과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에게서 뜨거운 아내사랑과 더불어 통통 튀는 끼가 전해진다.

정택진 씨의 가족 모습. 아내 이주순 씨와 아들 정미문 군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6 welfarenews
▲ 정택진 씨의 가족 모습. 아내 이주순 씨와 아들 정미문 군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06 welfarenews
정택진 씨는 얼마 전 ‘프리미엄 수화’를 펴냈다. 총 4000단어의 수화언어를 올컬러로 수록한데다 농아인만의 농식 대화, 그들만의 문화, 상식까지 고스란히 담은 이 책은 수화 인생 22년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에서 직접 보고 느낀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만든 이 책은 출간에만 9년이 소요됐다. 몇몇 출판사들의 거절을 경험하고 나서야 아버지가 농아인이었던 을지글로벌 사장을 만나게 됐고, 출간의 열매를 맺었다.

정 씨는 “집을 담보로 인쇄를 결심했던 출판사 사장과 가족, 친구의 헌신 덕분에 책을 내게 됐다”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책을 펴내 농아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장애인복지 전문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정택진 씨. 수화통역, 대학원 공부, 출강 등 바쁜 생활 속에서도 식지 않은 열정을 지닌 그에게서 어느덧 성큼 다가선 봄을 느꼈다.

까만 재킷 속에 감춰진 핫핑크색 와이셔츠처럼 그의 가슴에 담겨있는 정열과 따스함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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