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하다는 것은 보통과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보편적인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철학적인 문제이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 때로는 기분 좋은 일일 수 있는 반면 또 다른 경우에는 비참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다양성이 존중될 경우이고, 후자는 그렇지 못한 경우이다. 장애는 우리 사회에서 후자의 경우에 해당된다.

장애는 특별히 비극적일 것이 없다. 오히려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장애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평균으로부터의 바람직하지 못한 편차로 간주될 때, 장애는 특별 대접을 받기 시작한다. 그 특별 대접이란 바로 사회로부터의 분리이다.

장애라는 라벨이 붙여지면서 그 사람은 분리되기 시작한다. 교육에 있어서도 통합교육이 아닌 소위 ‘특수교육’이라는 분리교육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장애학생은 기숙학교에서 ‘교육’이 아닌 ‘교육재활’을 받는다. 혹 통합교육을 받는다 하더라도 ‘특수학급’이라는 분리된 학급에서이다.

고용에 있어서도 경쟁고용이 아닌 보호고용 하에서 저임금에 허덕인다. 사실 분리교육을 받다보니 경쟁고용에 들어갈 경쟁력도 없을 뿐 아니라 분리된 형태의 고용을 장애인도 더 마음 편해한다.
사는 곳 역시 ‘사회복지시설’이라 불리는 전혀 복지적이지 못한 생활시설이다. 원래 사회로부터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했던 수용시설이 이제는 장애인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혹 장애인이 지역사회 내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 하더라도, 최악의 경우 자물쇠가 잠긴 방에서 구금되어 있거나 좀 나은 경우라도 혹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이내 가족 구성원의 대열에서 제외된다.
이에 대한 정부의 정책 역시 이러한 분리 상황을 고착화하고 오히려 확대해가는 정책 일색이다.
그리하여 장애인에 대한 교육 정책은 늘 특수교육의 확대가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물론 특수교육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특수교육을 일반학교에서, 백번 양보하더라도 ‘최소 제한적인(least restrictive)’ 환경에서 하라는 것이다.

고용 정책 역시, 장애인에게 적합한 직종을 찾아 장애인들을 보호된 환경에서 일하도록 만들려고 하지 말고, 어떠한 직종과 직장에서 일하든 충분히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편의시설과 지원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주거 정책에서도 장애인생활시설을 매년 60~70개씩 확충할 생각만 하지 말고, 탈시설화하여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들을 때, 혹자는 필자가 정상화(norma lization)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정상화를 넘어선다. 장애인이 보통과 아주 다르다고 보통처럼 바꾸려 하지 말고, 다양성의 한 측면으로서 장애 자체를 존중하며 장애인에게 삶의 통제권을 돌려주라는 이야기이다.

최근 장애계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하여 ‘특수교육진흥법’이 아닌 ‘장애인교육지원법’을, 시설생활이 아닌 자립생활을 외치고 있다. 참으로 고무적이다.

이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에서 ‘직업재활’이라는 관점을 없애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이 일하는 것을 고용이 아닌 직업재활로 접근하는 한에 있어서는,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절대로 일할 수 없다.

특수한 것은 다른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장애에 대해 접근할 때 여전히 ‘특수는 분리를 의미한다(Special means segregated)’.
장애는 다른 것일 뿐 아니라 ‘아름답다(Disability is beautiful)’고 여겨지는 그 날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장애인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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