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헌법재판소가 시각장애인만 안마사를 할 수 있다는 ‘안마사에 관한 규칙’에 대해 7인에 의한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사회적 파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특히 이를 비관한 시각장애인들의 희생이 커서, 죽음을 불사한 교각 투신 시위 이외에도 벌써 수 명의 시각장애인들이 자살의 길을 택했다.

이대로 두어선 안 된다.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은 보장하면서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 취지는 존중해주는 대체입법의 제정과 같은 돌파구 모색이 시급히 필요한 시점이다.
우선 대체입법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헌법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헌법재판소 위헌결정의 법리에는 적지 않은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존중되고 지켜져야 한다. 최고사법기관의 결정에 번복을 요구하거나 저항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깨는 일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존중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것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는 어떠한 비판도 가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임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건 판결에 개입할 목적으로 부당한 위력을 행사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하겠지만,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게 최고사법권을 위임한 주권자 국민이 이미 내려진 판결에 대해 이를 공론의 場(장)에서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요, 장려되어야 할 일이다.

헌법재판소는 시각장애인만 안마사업을 독점할 수 있게 한 규칙조항이 안마사가 되려는 비장애인인 청구인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법률유보의 원칙과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게 침해하고 있어 위헌이라 판시했다. ‘법률유보의 원칙’이란 기본권 제한은 국민대표가 제정한 법률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따라서 의료법이 아닌 ‘안마사에 관한 규칙’으로 시각장애인의 안마사업 독점을 규정하여 일반인이 안마사가 될 수 없게 한 것은 법률유보의 원칙 위반이라는 것이다.

또한 ‘과잉금지의 원칙’이란 기본권 제한은 부득이한 경우 필요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과잉한 제한으로 위헌이 된다는 원칙이다. 이 ‘안마사에 관한 규칙’이 시각장애인만 안마사가 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반인의 안마사업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직업선택의 자유에 대한 필요최소한의 제한이 아니어서 과잉금지의 원칙에도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리구성에는 문제가 많다. 안마사라 하면 시각장애인을 떠올릴 정도로, 일제시대인 지난 1914년 이후로 안마사는 시각장애인에게만 독점된 직업이라는 것이 우리 국민의 일반적 법의식이며, 그야말로 헌법재판소가 애용하는 우리 사회의 ‘관습법’인 것이다. 따라서 ‘안마사에 관한 규칙’의 모법인 의료법에서 이미 ‘안마사업은 시각장애인에게만 인정된다’는 규정이 관습법의 형태로 행간에 존재한다. 따라서 법률유보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것은 지난 2003년의 동종유사사건에서 헌법재판소의 합헌결정이 취했던 논지이기도 하다.

둘째, 과잉금지의 원칙에도 위배된다고 볼 수 없다. 김효종 재판관의 반대의견에도 잘 나와 있듯이 일반인도 여전히 물리치료사 등의 자격을 취득해 안마사업에 종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안마사업 진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는 것도 아니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5조의 직업선택의 자유에만 필요이상의 눈길을 주었지, 같은 헌법 제34조 제5항이 규정한 장애인 특별보호조항에는 애써 눈을 감아 버렸다. 나무는 봤는데 또 다른 나무와 전체 숲은 보지 못한 것이다. 헌법은 약자에게 특별한 보호의 손길을 내뻗는 ‘따뜻한 법’이다. 일반인과 약자를 동일선상에 올려 놓고 ‘다른 것을 같게’ 대우하려는 차가운 냉혈법이 아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약자의 인권 보호’라는 헌법재판소에 대한 헌법의 또 다른 요구도 지켜내지 못했다.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국회를 통해 위협받는 시각장애인의 생존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지혜로운 대체입법을 시급히 제정하면 된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대한민국 국회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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