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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벽은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이에 본지에서는 11월 4일, 점자의 날을 맞아 비장애인들에게 시각장애인들을 이해 할 수 있는 문화코드 ‘점자’의 역사를 소개함으로써 장애인식 개선의 계기를 만들고자한다.

△ 점자의 유래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자는 예전부터 여러 사람에 의해 발명됐지만 시각장애인이 읽고 쓰기에 가장 쉬운 점자를 발명한 사람은 세 살 때 아버지의 공방에서 칼을 가지고 놀다가 실명한 시각장애인 브라이유(Louis Braille)다.

실명 후 브라이유는 아홉 살 때 야위(Valentin Hauy)가 설립한 파리맹학교에 입학해 선문자를 배운다.

브라이유가 점자를 발명하는 계기가 된 것은 당시 프랑스의 군 장교였던 바르비에(Barbier)가 발명한 야간 문자(Ecriture Nocturne)를 접하고 나서다.

바르비에는 밤에 군사용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읽을 수 있는 점으로 구성된 문자를 생각했다. 그의 야간 문자는 위에서 아래로 6점, 좌우 두 줄로 모두 12점으로 구성됐고 점자 필기도구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점자판, 점필과 비슷했다고 한다.

바르비에는 시각장애인이 야간 문자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1821년 파리맹학교에서 야간 문자를 시험하게 된다.

당시 12세였던 바르비에는 야간 문자를 접한 후 위에서 아래로 6점으로 이뤄진 야간 문자를 한 번에 지각하기에는 너무 길다는 것을 발견하고 점칸을 위에서 아래로 3점, 좌우 두 줄로 줄인다. 후에 바르비에는 1824년에 점자를 발명하고 5년 후인 1829년에 자신의 문자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또한 1837년에는 이를 다시 수정해 발표한다.

이러한 브라이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계속해서 선문자와 12점자를 사용한다. 그러나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배우기도 쉽고 읽고 쓰기도 편리하다는 장점 때문에 맹학생들이 필기를 하거나 책을 점역함으로써 계속 사용됐고 결국은 브라이유가 죽은 2년 후인 1854년에 파리맹학교에서 공식 시각장애인용 문자로 인정받게 된다.

현재 점자는 우리나라 말을 비롯해 다른 모든 언어에서도 거의 사용되고 있다. 이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이 그 시대 상류층 사람들의 배척을 받았지만 민중들이 쉽게 읽고 쓸 수 있었기에 꾸준히 사용됐고 결과적으로 한글로 인정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 ⓒ2006 welfarenews
▲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 ⓒ2006 welfarenews
한글점자의 창시자는 바로 이사람

△ 한글점자의 아버지 박두성

한글점자 창안자이며 시각장애교육에 생애를 바친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은 구한말인 고종25년에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 516번지에서 박기만씨의 6남 3녀중 맏아들로 출생한다.

어릴 적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8세가 되던 1895년 7월에 무관 출신 성제(誠齊) 이동휘(李東輝)가 강화도에 세운 보창학교에 입학해 4년간 보통학교의 신학문을 배우고 성제의 주선으로 한성사범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에서 수학하게 된다.

졸업 후 어의동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전신) 교사로 발탁돼 8년간 근무한다. 그 후 1913년 제생원(濟生院) 맹아부(盲啞部) 설립과 함께 교사로 발령됨으로써 시각장애인들과 인연을 맺고 1926년에 한글점자를 창안한다.

박두성의 시각장애인 교육관은 애맹정신의 실천, 끊임없는 권학정신, 생활자립을 위한 교육 강화, 잠재능력개발이었으며 이에 평생 동안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쳤다.

박두성의 위대함은 한글점자 창안뿐만 아니라 한글점자의 보급을 통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계의 문맹퇴치에 기여한 것이다. 성경을 비롯해 76종의 맹인용 교육자료 도서를 점역·출간했으며 점자도서 보급 사업, 통신교육사업 실시, 주간 회람지 ‘촉불’ 발행 등을 통해 전국의 시각장애인들이 한글점자를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또한 조선어 점자연구회, 육화사 등의 연구조직을 결성해 한글점자를 더욱 연구함으로써 그 실용성을 높였다.

박두성의 신념은 시각장애 교육이 단지 장애인교육이나 자선사업이 되서는 안 되며 직업교육과 더불어 시각장애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고 민족정신을 싹틔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박두성의 신념은 일제치하의 조선어 말살정책으로 모든 학교의 조선어 교육이 폐지된 상황에서도 제생원에서는 우리말과 글의 공교육이 계속되도록 했다. “실명이라는 1차적인 신체적 장애에 시각장애인이 마음대로 읽고 쓸 한글점자가 없으면 시각장애인의 심안을 밝히지 못하며 이로 인해 제 2차, 3차로 장애가 중복·심화돼 정서불안, 열등감, 비사회적 행동의 부차적 장애를 가져오게 되므로 점차 이질적인 방향으로 고착화되기 쉽습니다. 이러한 장애를 예방하거나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시각장애인에게 문자를 주어 그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박두성의 이런 애절한 진정은 총독부를 설득했다.

박두성이 시각장애 교육에 투신함으로써 우리나라 시각장애 교육은 그 당대에 거의 현대적 모습을 완성했다. 또한 박두성의 가르침은 직·간접적으로 시각장애인 지도자를 비롯해 수많은 인재들을 우리나라 사회에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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