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장애인’이라는 말은 내게는 ‘외계인’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에 섞인 편견의 탓도 있었겠지만, 실제로 장애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쌓여온 ‘무지의 편견’이 나타난 것은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할 때였다.
나름대로 이성적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해왔고, 장애에 대한 편견에 대해 목청 높여 반대해왔지만 실제로 장애인을 대하는 것과는 달랐다. 숟가락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는 1급 장애인을 수발하며 느낀 것은 피로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내 썩소(썩은 미소)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때 느꼈던 부끄러움만큼 장애인을 알기 위해 노력했다.

종이(이론)가 아닌 사람(실제)을 말이다. 그러면서 차차 내가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장애인은 ‘불쌍한, 착한,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기쁨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고 때론 화도 내는 그들은 사회적 정의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 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무지가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어리석음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렇게 티끌모아 태산이 된 편견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많은 장애인들이 오늘도 투쟁과 결의 대회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비장애인들이 조금 더 부지런해진다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장애인을 ‘알려고’ 하는 작은 태도의 변화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장애인 역시 거리 투쟁만이 아닌 비장애인과의 많은 만남을 통해 자신을 알려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그런 소통 과정은 장애인의 인식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편견 속에 고통 받지 않는 화합의 공동체로 가는 길은 ‘알려고’ 하는 자세와 상대방의 차이을 이해하는 ‘관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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