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음성유도기 때문에 갈팡질팡

시각장애인들의 이동편의를 위해 지하철과 전철역사에 설치·운영되고 있는 음성유도기의 10개 가운데 7개가 고장이거나 작동불량으로 시각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시민교통안전협회(이하 협회)가 지난 10월 2일부터 8일까지 6일 동안 서울지하철과 수도권 전철 12개 역사의 음성유도기 254개를 조사한 결과, 70%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각장애인용 음성유도기는 시각장애인이 점자블록을 따라 이동하면서 매표소나 화장실, 개찰구, 출입구, 계단, 엘리베이터, 승강장 등을 쉽게 찾거나 방향에 대해 인지할 수 있도록 음성 안내방송을 하는 것으로, 휴대용 리모컨에 의해 작동된다. 음성유도기는 순차를 제어하고 동작거리 제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어 기능들이 올바르게 작용하지 않아 오히려 시각장애인들이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다.

순차 제어 방송은 대합실이나 로비와 같이 한정된 공간에 두 대 이상의 음성유도기가 10m 이내로 가까이 설치된 경우에 한해 사용된다. 유도기의 위치와 방향, 방송내용에 대한 분별력을 높이고 여러 대의 유도기가 동시에 안내하는 중복방송과 이에 따른 방송내용의 부정확성을 방지하기 위해 음성 안내가 순서에 따라 방송되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또한 음성유도기는 휴대용 리모컨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동작거리를 제어하지 않는다면 한정된 공간 곳곳에 설치된 여러 개의 유도기가 중복방송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발생된 과다한 소음은 시각장애인에게 방향 인식과 분별력 있는 음성안내를 제공하지 못하는 역효과를 발생시키게 되고 비장애인이나 주변 상가에도 피해를 주게 된다.

조사 결과, 동작거리가 무선 리모컨 수신거리기준보다 지나치게 길어서 중복방송이 되거나 지나치게 짧아서 방송이 안 되는 등 수신거리제어 불량률이 77%로 가장 높았고, 순차제어 방송이 제대로 안 돼 방송이 중복되는 불량률도 71%로 나타났다.

동작상태가 가장 불량한 역사는 동묘, 동대문역으로 76%의 불량률을 보였고, 송내, 부평, 석계역이 75%의 불량률을 보였다.

반면 동작상태가 가장 양호한 역사는 구로, 온수역으로 68%의 정상 작동률을 보였고 방학, 도봉, 도봉산역이 23%로 그 뒤를 이었다.

협회 김기복 대표는 “철도역사와 수도권 전철 그리고 일부 지하철 역사에 설치·운영 중인 음성유도기 대부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고, 사후관리마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며 “정작 음성유도기가 필요한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도움을 주지 못한 채 그림의 떡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이한 점은 각 역사에 설치된 음성유도기의 제조사가 각기 다르고 제조사 별로 정상 작동률과 불량률의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음성유도기는 지난 2004년에 국가표준이 제정됐고,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에서 기술표준과 기능 및 규격에 대한 인증을 해주고 있다. 이에 따라 제조사들은 자회사의 음성유도기를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로부터 인증을 받고 전파연구소에 형식등록을 하면 된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모두 사전인증제도이기 때문에 사후 검증이 안 되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음성유도기가 부실하게 운영·관리되고 있는 원인은 첫째, 인증제도의 사후관리에 책임이 없는 제도적 허점이다. 둘째는 발주와 시공, 준공 과정에서 제품의 안정적인 검증이나 실효성 검증 없이 탁상행정을 일삼는 정부의 태도다. 마지막으로 제조업체 간의 과다경쟁으로 인해 제품의 질보다는 가격을 낮춰 “일단 팔고보자”는 도덕적인 문제 때문이다.

결국 힘들게 횡단보도 이용, 그러나......

지하철이나 전철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하도 문제가 이렇다 보니 지하도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인들은 어쩔 수 없이 횡단보도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횡단보도 에서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협회는 지난 9월 서울시내 중앙버스전용차로 7개 구간 가운데 미아로, 도봉로, 천호대로, 강남대로, 시흥대로 등 4개 간선도로의 횡단보도에 설치·운영 중인 보행신호 341개를 대상으로 음향신호기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결과 시각장애인용 음향신호기의 28%가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작동되는 음향신호기마저도 82%가 음향상태가 불량하거나 리모컨의 무선동작 거리제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시각장애인들이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의 위험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41개 횡단보도에 설치된 307개의 음향신호기 중 작동을 하고 있는 음향신호기는 220개로 71%에 불과했고, 작동을 하고 있는 220개 가운데서도 82%가 경찰청 음향신호기 규격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음향신호기의 횡단안내용 음향인 귀뚜라미 소리는 시각장애인들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 건너는 시점과 방향을 인식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음향신호기의 절반 이상이 고장이거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귀뚜라미 소리를 따라가야 하는 시각장애인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되고 횡단보도에서의 교통사고 위험이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버스중앙전용차로는 버스정류장이 도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고 내리면서 반드시 횡단보도를 건너야하므로 시각장애인들이 버스이용을 포기하거나 목숨 걸고 횡단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오진영(40·시각장애1급)씨는 “파란불이 켜지는 때보다 귀뚜라미 소리가 늦게 울리는 경우가 많다”며 “횡단보도를 미처 건너지도 못했는데 차들이 경적을 울려 대는 바람에 깜짝 놀라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고 위험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음향신호기는 전파연구소에 형식등록을 하고 경찰청 음향신호기 규격에 따라 특성검사를 받은 제품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기능검사는 설치 후 지방자치단체와 발주기관에 요청이 있을 때만 하고 있다. 그러나 동작불량 음향신호기의 대부분은 형식이나 특성의 문제보다는 기능적인 문제와 사후관리 소홀이 주된 원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전에 음향신호기의 성능을 검증할 수 있는 인증제도 없고, 사후관리에 대한 프로그램도 없다. 음향신호기에 대한 품질향상과 사후관리 강화를 위한 대안으로 음향신호기에 대한 국가표준제정과 함께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TTA)의 인증제 도입이 절실하다.

협회 김 대표는 “정부는 국가표준을 제정해, 성능미달 제품이 유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국가표준 제품을 설치하지 않았을 때와 사후관리를 소홀히 하는 기관장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제도개선을 서둘러 시각장애인의 이동편의를 증진시키고 국고낭비를 막아야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왜 설치해야 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

내년부터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다. 이로써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는 장애인편의시설을 대폭 확충할 계획이고 이에 따라 시각장애인용 음성유도기와 음성신호기 등의 편의시설도 대폭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부실한 제품이 마구잡이로 설치되고 사후관리가 안 된다면 시각장애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국민의 혈세로 편의시설 제조업체에게 밥상만 차려주는 꼴이 될 우려가 있다.

사람들은 형식과 규정에 맞추는 것만 중요시 하는 경향이 있다. 장애인 편의시설을 ‘왜 설치해야 하는가’에 대해 간과하기 때문에 ‘설치만을 위한 설치’가 계속되고 있다.

장애인 편의시설의 설치율이 저조한 것은 비장애인의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인식 부족과 편의시설 설치에 대한 사후 관리의 무책임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인식을 전환해 장애인 편의시설의 양적·질적 공급을 확대하도록 해야 한다. 또 공정청문회제도와 같은 것을 도입해 장애인 편의시설 뿐 아니라 장애인 복지 제반 사항에 대한 해석을 모색하도록 해야 한다.

편의시설은 모두가 좀 더 편리하게 이동하고 시설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시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취지를 잘 이해하고 편의시설을 설치한다면 우리의 환경은 무장애 공간으로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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