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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상연(남·38·뇌병변장애 1급·시설생활 28년)

-10살 때 버려져 시립아동병원에서 자랐다. 거기 있는 어린이들은 미혼모의 자녀거나 고아였다. 거기서는 조금만 먹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너무 많으니까 간호사들이 먹여주는 것도 힘들고, 대소변 처리해주는 것도 힘드니까 조금만 먹게 했다.
어떤 어린이들은 배고파서 나무를 먹었고, 비닐도 먹었고, 천조각도 먹고, 벽도 뜯어서 먹었다. 공식적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날은 1년에 한 번, 어린이날뿐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농성하는 거 너무 힘들다. 엉덩이도 아프고, 다리도 저리고 아프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시설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다 같이 살고, 다 같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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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남·60·지체장애 1급·시설생활 20년)

-혼자 사는데 참 추웠다. 돈도 없고, 집은 창고를 개조한 것이라서 낡았다. 또 욕창이 너무 심해서 엄청 고생했다. 두 달간 엎드려서 대소변을 해결했다. 결국 혼자 사는 걸 포기하고 사회복지시설에 전화했다.
가보니까 완전히 ‘군대식’이었다. 오전 6시에 예배, 오후 9시에 소등했다. 일주일에 1번씩 손발톱을 검사하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다.

-사고 나서 부인과 이혼하고 시설에 들어온 뒤 못 만났다. 지난 5월, 헤어진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그동안 모질게 연락을 끊었다. ‘나 죽었다. 너희 아버지는 없다’고. 아이들이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장애인인 내가 나타나서 아버지라고 하면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크겠나 싶었다. 그래서 연락도 안 하고 찾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죽기 전에 다시 보게 돼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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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옥(여·63·지체장애 2급·시설생활 21년)

-서울역에서 껌도 팔고, 이것저것 장사를 좀 했다. 그때는 목발을 짚고 다녔다. 그런데 88올림픽 한다고 사람들이 와서 대방동 부녀보호소로 데려갔다. 대방동에서 두 달 정도 살다가 석암베데스다요양원으로 보내졌다.
그때 나를 포함해 여자 8명이었는데 아파서 죽고, 설사를 많이 해서 죽고, 건강이 약해서 죽고, 지금은 2명만 남았다.

-시설에서 살기 싫다. 나오고 싶다. 너무 지겹다 삶이, 지옥 같다. 시설에 안 갈 거다. 나도 머리가 있고 인간인데, 사람들은 다 다니는데, 나가고 싶은 데도 못 가고 처박혀 살았다.
내가 먹고 싶은 것 먹고, 누구한테 지시 안 받고,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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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윤(남·37·지체장애 1급·시설생활 27년)

-10살에 시설에 들어갔다. 몇몇 재활원에 있다가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들어가게 됐다.

-시설이 지긋지긋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싫다. 시설에 소문이 금방 퍼진다. 자그마한 일도 소문이 쫙 퍼진다. 만약 바지에 내가 실수를 했을 때 시설에 소문이 다 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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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용(남·51·지체장애 1급·시설생활 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술로 살았다. 남동생이 택배를 하는데 여기저기 운전하고 다니면서 요양원을 알아봤던 것 같다. 어느 날 와서 나를 태우더니 시설에 떨어뜨려 놨다.

-시설비리가 너무 많다. 나눠져야 할 돈을 다른 데로 다 빼돌리고, 2005년도에는 장애수당을 못 받았다. 원장에게 가서 생활비는 생계비로 사무실에 들어간다고 치고, 장애수당은 왜 안주냐고 따졌더니 그제야 줬다.
따지고 판별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수당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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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림(남·47·뇌병변장애 1급·시설생활 22년)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시면 ‘저거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소리를 지르셨고, 어머니에게 욕을 하며 때리기도 하셨다. 어머니한테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했다.
그때 생각에는 시설에 가면 여러 사람도 만나고 밖에 마음대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국일주를 하며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 어머니는 4년 전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심장이 안 좋으시다는 건 알았는데, 돌아가신 것은 몰랐다. 아직까지 유골을 뿌린 곳에도 못 가봤다.
아버지는 일흔이 넘으셔서 시·청력이 안 좋다고 한다. 누나와 남동생은 결혼해서 산다는데 만나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됐다. 지금은 아무도 연락처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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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남(남·51·지체장애 1급·시설생활 20년)

-1989년 서울 용산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석암재단에서 운영하는 병실에 옮겨졌다. 두 달 후에 업무과장이 와서 병원에 있으면 돈이 더 든다며,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 가면 한 달에 한 번씩 치료도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인천에 계신 형수도 교통사고를 당했고, 대전에 살던 작은형도 교통사고를 당해서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내가 일해서 모은 전 재산 600만원을 다 주고 시설로 갔다.

-시설에 넣어서 인간을 사육하는 거다.
우리사회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살 수 있는 공동체마을을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국에 장애인이 없는 마을이 어디 있나. 사촌형도, 친구도 장애인이다. 장애인도 그 지역사회에서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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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남·56·척수장애 1급·시설생활 26년)

-중학교 3학년, 친구와 장난을 치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다. 5년간 병원에서 식물인간처럼 누워서 지냈다. 퇴원해서 집에서만 지내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30살에 석암베데스다요양원으로 들어가게 됐다. 나를 돌봐주던 형이 결혼을 했는데, 형수와 형이 나 때문에 자주 싸웠다. 형이 시설을 알아봤고, 나 역시 스스로 시설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시설에서 주는 반찬에서 냄새가 났다. 곰팡이도 피어 있었다. 먹고나면 배가 아프고 설사도 많이 했다. 술을 좀 마셨는데, 원장은 술을 마신다고 때렸다.
40살에 시설에서 도망쳐 형의 집으로 갔다가 다시 잡혀갔다. 그때도 많이 맞았다. 손목을 그어 죽으려고도 했었다.
시설에 입소하면서 원장은 내 이름을 ‘장수연’으로 개명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장수연은 내가 시설에 들어가기 전에 죽은 사람이다. 원장은 ‘홍성호’로도, ‘장수연’으로도 정부보조금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안 형이 원장에게 신고하겠다고 하자, 원장은 빌며 형을 만류했다.
그제야 내 나이 47살, 이름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장수연은 그로부터도 10년이 더 지나 석암비대위가 활동하고 난 후에서야 비로소 사망신고가 이뤄졌다.

탈시설과 자립생활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과 장애계단체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탈시설 및 자립생활 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2009 welfarenews
▲ 탈시설과 자립생활 보장을 요구하는 장애인과 장애계단체는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탈시설 및 자립생활 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2009 welfarenews

▶시설은 ‘어떤 곳’이었는가

방상연: 시설에는 인권이 없다. 밥만 먹고, 잠만 자고, 그게 다다. 외출은 나간다고 적어야 되고, 식사시간은 정해져 있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밥을 갖고 가버린다. 외부와 연락할 기회도 없다. 친구들을 만난다고 해도 멀리 못 간다. 시설 근처 주변만 가야 한다.

김진수: 시설에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사는 것 같다. 지내다보니까 밥 먹고, 텔레비전 보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생활하는 동안 20년이 그냥 흘렀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사는 게 너무 싫고, 권리와 자유를 찾고 그러기 위해서 나왔다.

주기옥: 시설에서 생활하다보니 주민등록증이 말소됐다. 주민등록증이 없어 장애수당이 나오지 않는다고 원장에게 구박 받았다. 아버지가 나를 찾았지만, 연락할 기회가 없었다. 갇혀 사는데 뭘 알아야 연락을 하지. 1년에 2번씩 단체로 봄·가을소풍 가는 게 다였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말도 못했다. 외출하겠다고 하면 전동휠체어를 뺏는다고 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전동휠체어도 시설에서 같이 생활하던 장애인의 것을 물려받은 거다.
2년 전에 아버지가 나를 찾은 뒤 다시 주민등록증을 받았고 장애수당이 나왔지만, 시설측에서 장애수당을 한동안 주지 않았다. 식사할 때 반찬도 장아찌만 나오고, 김치도 쉬어터진 것만 줬고, 제때 먹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황정용: 석암비대위나 투쟁하는 식구들 중에 내가 제일 막내다. 들어가서 생활한 기간이 제일 짧고, 들어가는 처음부터 비리 사건이 터져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한테 그렇게 심한 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장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됐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무 문제없이 다 받아왔는데... 시설측은 어떻게 탈락이 됐는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김동림: 손님들이 오거나 하면서 후원 및 지원하는 물품들이 들어오면, 제때 주지 않았다. 지적장애인은 장애수당을 요구하지 않으니까 안 주고 시설장애인 보호한다고 가져가고 그랬다.

김용남: 한 달이 멀다하고 1명씩 죽어나갔다. 아프다고 바로 병원에 데려가는 게 아니라, 며칠 ‘묵혔다가’ 데리고 간다. 병원에 가던 도중 죽어서 온 사람도 있었다.
외부와 소통을 차단한다. 고향소식이 궁금해서 편지를 부쳤는데 답장이 없다. 사무실에서 뜯어봤던 것 같다. 한 번은 밖을 내다보는데 퇴근시간이 다 돼서 오토바이가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편지통을 내주니까 그걸 가지고 유유히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었다. 연락을 하려고 해도 전화를 빼돌리니 전화도 못 했다.
밥은 먹는데 반찬이 없었다. 한여름에 양배추 썰어서 먹고, 그런 것들을 먹고 살았다.
외출할 때도 기록 다 해놓고 들어와서 왔다고 서명해야 한다. 예전에는 늦게 들어오면 밥을 안 주고 그랬는데, 나중에 나간 사람도 밥은 먹어야 된다고 남겨놓으라고 하니까 그제야 밥만 남겨놓았다.

홍성호: 외출 못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나는 활동보조인이 있어야 외출을 하는데 혼자 나가라고 했다. 장애수당도 직접 받아본 적 없고, 어떻게 쓰이는지도 몰랐다. 언어장애로 말을 못한다고 놀려댔다. 식사도 제때 안 하면 안 주고, 반찬이 잘 안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밥에서 냄새가 났다.

▶관리·감독 기관에서 시설을 방문했을 때

황정용: 가끔씩 나오는 것을 봤는데, 따로 면담하거나 그런 적은 없다. 사무실에 대한 조사만 하지, 시설에 장애인이 116명이 되는데 일일이 조사하거나 면담하진 않았다.

김동림: 1대1로 면담해본 적 없다. 면담을 하면 다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기관에서 조사 나오면 안 좋은 점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시설에서 나가면 뭘 먹고 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결국 흐지부지하게 조사가 끝난다.

홍성호: 시설측이 미리 ‘말하지 말라’, ‘무조건 좋다고 해라’라고 입단속을 한다.

▶노숙하니까 어떤가

모두: 좋다. 시설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다. 자유가 있고, 사람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시끄럽고, 밤에 사람도 없고, 춥고 불편한 점도 있다. 하지만 간섭받지 않고, 방에서만 생활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소통할 수 있고, 고생해도 마음이 편하다.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모두: 집이 가장 필요하다. 집이 없으니 활동보조서비스도, 기초생활수급비도 신청할 수 없다.
김진수: 시설에서 나오기 전에 임대아파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이뤄져, 보다 자립생활을 원하는 많은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나와 살았으면 좋겠다.

주기옥: 나는 현재 당뇨병과 위장병을 앓고 있다. 장애수당으로 약을 사먹고 하다 보니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김동림: 정책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 시설정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서울시는 우리보고 아무 대책도 없이 왜 나왔냐고 한다. 시설에서 자립생활을 준비할 때 보장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책 및 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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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사회복지연구소 박숙경 연구원

대규모시설이 보다 싸고, 보다 효율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자신이 시설에 들어가 집단생활을 해야 한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장애인의 경우,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제도나 지원이 뒷받침 돼야 한다.

자립이라고 하는 것이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애인의 경우에 자립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1차적으로 지역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걸을 말한다.
또한 필요한 서비스를 사회적 지원 및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행한다는 뜻이다.

시설생활은 집단생활에 따른 제약과 통제가 심하다. 따라서 시설장애인 스스로 자기 삶을 결정하기 어렵고, 자율적인 삶을 살기 어렵고, 사생활이 보장되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사람들과 자연스러운 관계가 줄어든다.

사회복지로서의 자립생활은 ‘Independent Living(인디펜던트 리빙)’으로,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장애인의 삶을 치료의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전문가들이 개입하고, 전문가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탈시설 문제와 관련해 자립생활은 제약 최소화, 지역사회, 스스로의 결정권, 사회적 지원이 제공되는 것 등을 말한다.

탈시설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시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에 나오려고 하는 의식만 가지고는 힘들다는 점이다. 스스로 살아가기 힘든 환경도 있고, 가족들의 지원이 어려워 시설에 들어가게 된 것인데, 역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더 어렵다.

시설장애인에게 상담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일 뿐만 아니라,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거주공간이 없다보니 기초생활수급 및 여러 가지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대규모시설보다 조금 보편적인 주거형식을 취한 것이 그룹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룹홈은 80년대 말부터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체 시설의 7%가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21세기에 시설을 신축하고 있는데, 제안하고 금지하는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

거주 지원은 개인의 욕구, 연령, 장애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유형의 거주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발표한 장애인거주시설혁신방안의 큰 축을 살펴보면 신축시설 인원을 30명 이하로 제한하고, 기존의 대규모시설을 분할시키고, 그룹홈을 좀 더 늘리겠다고 한다. 이는 소극적인 접근이다. 더 독립적이고 더 보편적인 주거형태를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다.
시설당 평균 인원이 75명 내외다. 이것을 30명 이하로 줄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나.
쉽게 말하자면, 같은 법인 산하에 있는 1개의 시설을 2개로 쪼갠다는 이야기다. 굳이 불필요한 중간단계를 밟으려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는 지금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정보가 제공돼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영구임대와 같은 경우, 장애인을 우선적으로 둔다 해도 부양가족이 있거나 일정시간동안 같이 살던 경력이 있어야 한다. 시설장애인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기 어렵고, 보편적인 주거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격요건에 맞지 않는다.
일단은 이 문제를 급하게 풀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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