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장님,

장애인 탈시설 문제는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오세훈 서울시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난 9일 서울시청별관에서 '장애인단체정책간담회'라는 명목으로 시장님과 만남을 가졌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입니다.

그날 간담회가 제겐 너무나 짧고 허탈한 자리였기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시장님께서는 작년 12월 24일 동천의 집에서 저를 만났을 때 서울시가 관리․감독하는 38개 장애인시설에 대하여 탈시설 욕구 조사를 한 뒤에 면담을 통해 탈시설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날 간담회 자리는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서울시의 일방적인 결정만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시장님께 탈시설 대책을 요구해 온 사람들이 배제된 자리였습니다. 지난 6월 4일부터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나와 마로니에공원에서 노숙하다가, 얼마전 국가인권위원회로 자리를 옮겨 농성하고 있는 탈시설 장애인 당사자들을 배제한 간담회였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시장님께 그들의 참여를 요청했지만, 시장님은 “서울시가 시설의 수용상태나 시설의 경험담을 듣는 것이 꼭 필요하다면 이미 넘어섰다고 생각한다.”며 그들이 참여하는 면담을 거부하였습니다.

당사자의 참여는 단순히 경험담을 듣기 위한 수준이 아니라 장애인이 자신의 문제에 주체가 된다는 의미에서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당사자들의 권리가 함부로 다른 이에게 위임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서울시의 일방적인 결정 아래 간담회에 참여했던 장애인단체의 대표라는 분들은 탈시설 장애인들의 권리를 대변할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당사자가 직접 참여하여 서울시장님과의 진솔한 면담자리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세훈 시장님,

시장님께서는 우리들의 투쟁에 대하여 “서울시가 탈시설에 대해서 귀를 닫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잘못이며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서울시가 탈시설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장애인의 탈시설 문제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입니다.

장애인들이 이동할 권리,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 투쟁했을 때 그 누구도 그 권리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부가 그 권리를 부정한다고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투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투쟁을 하게 된 것은 정부가 말만 하고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거의 떡고물 수준의 예산으로 치장만 하려했기 때문이지요.

탈시설 투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나와 탈시설 권리를 목 놓아 외치고 있는 것은 서울시가 탈시설 문제에 대하여 귀를 닫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님께서도 핵심으로 지적한 '서울시와 장애인 당사자의 속도 차이' 때문입니다.

오세훈 서울시장님.

시장님께서는 우리를 지적하면서 “투쟁단체가 생각하는 속도로 탈시설이 진행되기에는 우리 사회가 수용의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중증장애인들이 시설에서 나와 살아가려면 첫째로 주거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소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애인의 노동문제 앞에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벽이 존재하고, 이 벽이 허물어지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어야하고, 거기에 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장애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기본적으로 준비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장님께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사회적 인식개선, 장애인의 이동권, 주거확보, 일자리 확보 등 이런 것 중에 하나가 이빨이 빠져 있으면 탈시설은 사실 이상에 불과하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탈시설 준비 작업을 위해 단계적인 예산 투자와 의지가 필요하다고 했고 충분한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시장님의 그 지적에 동의합니다.

당연히 주거, 노동, 이동 그리고 인식개선은 탈시설-자립생활을 위해 준비되어야 할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 중에 하나가 이빨이 빠져 있으면 탈시설은 사실 이상에 불과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탈시설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적대적인 언어보다 오히려 더 탈시설의 본질과 현실 문제를 흐립니다.

오세훈 서울시장님.

1990년에 장애인들이 너무나 취업하고 싶어서 뼈 빠지게 투쟁해서 '300인 이상 기업에 장애인 의무고용 2%'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장애인고용촉진법을 만들었습니다. 19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도 의무고용을 지키지 않는 기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외치며 사회적 공헌을 중요시하는 대기업일수록 장애인을 고용하기보다 분담금을 납부하지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장애인의무고용을 지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시장님, 경쟁을 살벌하게 강요하는 지금의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장애인들은 경제사정이 나쁘면 가장 먼저 해고되고, 좋아진다고 해도 가장 늦게 취업될 수밖에 없는 계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논의에서 뺀다하더라도 장애인의 노동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야 탈시설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이동권 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1년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이 리프트를 이용하다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해 중증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도 서울시는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장애인들의 요구 하나하나를 속도와 예산의 문제를 핑계로 사실상 거부하였습니다.

우리가 '서울지하철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고 요구했을 때 서울시는 예산과 속도의 문제를 들며 완강하게 거부하고 휠체어리프트를 설치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점거하면서까지 투쟁하자,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께서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이 아직도 지켜지지 않았지만, 서울시 많은 지하철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지요.

저상버스 도입 문제나 장애인콜택시 운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로사정을 핑계로 저상버스 도입을 거부하던 서울시는 장애인들이 버스를 점거하고 단식 농성을 벌이자 저상버스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산이 없다던 서울시는 2012년까지 전체 버스 가운데 50%를 저상버스로 바꾸겠다는 내용의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조례를 만들어 놓은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산 문제로 운영 댓수의 확대를 기피했던 서울시장애인콜택시 역시 현재 280대가 24시간 운영되고 있습니다. 물론 장애인들의 실제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만 이런 전례들은 장애인들의 권리 보장이 결코 예산이 없어서, 제반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시장님, 장애인의 이동권 문제와 베리어프리 정도가 얼마나 되어야 탈시설이 가능하겠습니까?

시장님이 제기한 시민들의 인식전환 문제에 대하여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민들의 인식전환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었지요. 비장애인들과 함께 하기 위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교육했지요. 장애인계가 수년 동안 노력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기도 했습니다. 이 법은 장애인을 ‘장애를 이유로 정당한 사유 없이 제한ㆍ배제ㆍ분리ㆍ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장애인이 전 생애에 걸쳐 모든 생활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법률로 정한 것입니다. 저는 그 법률이 효과적으로 잘 지켜질 수 있다면 시민들의 인식에 대전환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법이 만들어진 것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전환 문제가 말로 해서 해결되지 않는 단계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법제도로 인식전환을 유도하고, 부당한 차별을 강제적으로 금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시장님, 언제까지 얼마나 시민들의 인식이 전환되어야 탈시설이 가능하겠습니까.

오세훈 서울시장님.

시장님께서 지적하신 ‘노동, 이동 그리고 시민인식전환‘의 문제는 정말 중요하지만, 그것이 탈시설의 완벽한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울시에 있는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살고 있는 3천2백여 명의 장애인 가운데 50%가 당장 나오고 싶다고 했고, 주거와 활동보조가 지원되면 나오겠다는 장애인이 70%가 됩니다. 그리고 이미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중증장애인들이 있습니다. 또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에는 시설에서 살다 나온 8명의 장애인들이 탈시설-자립생활 권리 보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장님, '노동, 이동, 시민인식전환'이 장애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요소이지만, 부디 탈시설의 속도를 늦추는 핑계거리로 활용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탈시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거 문제입니다. 주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시설을 나와서도 가장 고통 받는 문제가 주거 문제입니다. 주거문제 해결은 쉽지 않은 문제임을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문제는 시설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만의 문제도 아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울시에 '장애인자립주택'을 도입하고 시범 사업 형태부터라도 실시하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님.

'장애인자립주택'의 시범적 도입에 대하여 시장님께서는 보건복지가족부와 함께 가야한다면서 “서울시가 혼자 열 걸음 스무 걸음 앞서가면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중앙정부, 다른 지자체와의 사이에 발생한다. 그래서 정책을 펴기가 힘든 것이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장님, 서울시 SH공사가 무주택 서울시민을 위해 장기전세주택을 제공하는 ‘시프트 사업’이 서울시의 독자적인 사업입니다. 시장님이 어느 언론과 인터뷰한 기사에서 시프트 사업은 시장님이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사업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생활시설에 수용되어 짐승처럼 세월을 보내며 살아야 하는 중증장애인을 위해 '장애인자립주택' 제공 사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건복지가족부와 별도로 서울시가, 시장님의 의지로 가능한 문제 아닙니까.

더욱이 서울시가 복지부나 타 시도보다 앞서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 부분도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서울시가 하는 일이 사회적 약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면 타 시도 보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앞서 나갈 수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복지부와 타 시도에 모범이 될 수도 있겠지요. 가난한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복지에 유독 중앙정부와 타시도의 눈치를 살피시는 것입니까?

오세훈 서울시장님

시장님께서 마지막으로 '속도의 차이'를 중요하게 말씀하시면서, 탈시설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서 결정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탈시설 속도의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서울시와 토론하고 싶습니다. 그 토론이 가능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마로니에공원에서 국가인권위원회로 떠돌면서 농성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서울시가 우리를 진지한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논의기구를 통해 대화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서울시가 3천2백여명이 넘는 중증장애인들이 어떻게 탈시설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서울시 장애인 탈시설 5개년 계획'이라도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에 서울시가 중앙정부 핑계를 대며 계속적으로 서울시가 '장애인자립주택'의 시범사업 조차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인다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습니까.

오세훈 서울시장님.

편지가 너무 길었습니다. 간담회 자리에서 마주하면서 이렇게 진지하고 진솔하게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많은 사람과 많은 이야기 주제로 인해 참으로 아쉬운 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오세훈 서울시장님.

요즘 서울시가 서울시내 거리를 디자인하는 데 열중하고 있습니다. 아름답게 만들어질 서울거리를 기대하면서 파헤쳐진 거리가 불편해도 견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장님, 부디 중증장애인들도 아름다운 도심 거리를 보면서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삶도 디자인해주십시오. 생활시설이 아니라 서울시 지역사회에서, 함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세훈 시장님,

다시 한번 시장님의 작년 크리스마스이브 약속대로 신뢰할 수 있는 면담 자리가 성사되기를 요청드립니다. 그 자리에서 시장님과 탈시설장애인 당사자들과의 속도 차이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긴 편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09. 7. 14.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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