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만에 지역사회로 나와 제2의 인생 시작한 윤수미 씨

지난달 초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모금 청원 게시판에 ‘탈시설 장애인 수술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요청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사연인즉 장애인생활시설에서 20여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후 2년 전 자립생활을 시작한 한 여성장애인이 오래 전 시설 안에서의 폭행으로 고관절이 탈구됐으나 방치돼 현재 심각한 상태로, 하루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의 사연이 궁금해 인터뷰를 시도했으나 아고라에 사연을 올린 바래미 야학 관계자를 통해 돌아온 첫 대답은 “못하겠다.”였다.
 

인터뷰를 거부한 이유가 뭘까, 궁금해 주인공의 남자친구에게 재차 인터뷰를 요청하자 “대부분의 언론들이 (시설생활을) 미화하거나, 자신을 불쌍하게 만들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봐 우려스럽다.”는 답변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탈시설과 자립생활에 대한 장애인당사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설득한 뒤에야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한 윤수미(오른쪽) 씨와 그의 남자친구 권순욱 씨.
▲ 장애인생활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한 윤수미(오른쪽) 씨와 그의 남자친구 권순욱 씨.
 
사연의 주인공 윤수미(23, 뇌병변 1급) 씨.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윤씨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한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자랐다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윤씨가 조금 어려운 단어나 숫자가 나오면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인터뷰를 거부했던 정확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남자친구인 권순욱(31, 바래미야학 사무처장) 씨는 윤 씨가 시설에서 생활한 20여년이라는 시간 동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보통의 삶을 살아온 이들이라면 납득하기 힘들겠지만, 과거 장애인생활시설을 아는 이라면 ‘정지의 시간’이라는 것을 안다.

“학교도 운영하고 작업장도 운영할 정도로 규모가 큰 법인시설이었어요. 시설 안에 있는 학교에서 ‘중학교 졸업’이라고 써줬는데, 알고 보니 그 학교는 미인가로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죠. 순전히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학교’였어요. 그래서 현재 한글 등 기초적인 것부터 다시 배우고 있죠.”
 
이어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을 어떤 단어를 써서 전달해야 되는지 잘 몰라요. 일반적으로 쉬운 단어도 잘 몰라 본인도 말할 때 많이 답답해하죠. 또 못 알아들었는데 상대방은 대화가 되는 줄 아는 경우가 많아요.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볼 때도 있고요.”라고 덧붙였다.

시설에서의 생활을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고 하자, 윤 씨는 ‘안 좋다. 선생님(시설 직원)들이 만날 때리고 (나는) 맞았다’고 말했다.
 
“(거짓말 하지 않았는데) 거짓말한다고 혼내고, 운동하는 시간에 운동 안 한다고 혼내고, 자원봉사자가 올 때만 잘해주고 가면 또 혼내고, 외출은 선생님들과 같이 나가는 날만 할 수 있고 그랬어요.”

윤 씨는 고관절이 탈구되기 전에는 손잡이나 벽 등을 잡고 걸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였을까. 거의 매일 맞다보니 언제 고관절에 이상이 생겼는지조차 몰랐던 윤 씨는 시설을 나와서야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정확한 진단 결과를 알게 됐다.

윤 씨는 “시설에 있을 때 아프다고 여러 번 말했는데, 선생님들이 ‘거짓말하지 마라’고 그러고 (병원에 안 보내줬다).”라고 당시의 참담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권 씨는 “병원에서 알아보니까 뇌병변장애의 경우 고관절이 탈구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맞아서 골반 뼈가 깨져있는 데다 탈구까지 됐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동휠체어를 타게 됐어요.”라고 설명했다.
 
시설 안에서의 폭력이 가져다 준 것은 고관절 이상뿐만이 아니었다. 윤 씨는 얼마 전 오른쪽 눈 실명 판정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불안정해 적절한 검사와 수술이 필요했지만 병원은커녕 외출마저 시설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였고, 결국 시력은 점점 나빠져 실명하게 됐다.
 
“시설에 있을 때는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혼자 할 수 없었어요. 혼자서 전동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는데, 선생님들이 전동휠체어에 탈 때 잘 안 도와줘요. 혼자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막았어요.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못 나가게 하고 방안에서만 놀게 했죠. 그게 가장 답답해서 나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음식도 거의 만날 똑같은 것만 먹고. 자원봉사자가 와도 목욕이나 청소만 해줄 뿐, 자립생활이나 바깥생활과 무관한 이야기만 하고 그냥 가죠. 선생님들이 ‘나가면 다친다’며 못 나가게 했는데, 무작정 나오고 싶었어요.”

권 씨는 윤 씨가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권 씨에 따르면 사회복지시설생활인인권확보를위한연대회의(이하 시설인권연대)에서 윤 씨가 있던 시설을 찾았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탈시설과 자립생활을 요청한 뒤 윤 씨도 나오겠다고 했다.
시설인권연대는 바래미 야학으로 연락을 취했고, 그때부터 시설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권 씨는 “다른 사람들도 여러 가지 이유로 못 나가게 했는데, 저희가 마땅한 근거를 갖고 데리고 나오니까 아무 말도 못했죠. 하지만 윤수미 씨는 끝까지 안 된다고 했어요. 그때 윤수미 씨 나이가 만 19살이었는데, 민법상 법적대리인이 승인해야만 재산소유와 독립이 가능했던 거죠. 법적대리인인 시설 측에서 승인해줄리 만무했기에 외출증을 끊고 데리고 나왔어요.”
 
20여 년 전, 일본 장애인차별과싸우는전국공동연합회의 사이토 겐죠 사무국장이 초기 탈시설 운동 과정서 한밤중에 시설에서 내보내주지 않는 장애인을 손수레에 몰래 실어 데리고 나왔다는 일이 불과 얼마 전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 제공/ 바래미 야학
▲ 제공/ 바래미 야학
 
하지만 그의 탈시설은 쉽지 않았다.
 
권 씨는 “탈시설한 후 야학 대표님 집을 거쳐 체험홈에 들어가서 살았어요. 하지만 만 20살이 되기 전까지는 시설에 사는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1년간 장애수당은 물론이고 중증장애인활동보조조차 받을 수 없었죠. 때문에 체험홈에서 같이 지내던 다른 장애인의 활동보조인에게 도움을 받고 그랬어요.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만 20세가 되던 2009년에 정식 퇴소하게 됐어요.”라고 험난했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윤 씨는 지난해 11월 체험홈을 나와 본격적인 자립생활에 들어갔다. 인천광역시 남구 주안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바래미 야학을 다니며 공부하고 있다.
 
장애수당을 비롯해 주어지는 한 달 생활비는 58만 원. 여기서 월세 30만 원을 제외하고 나면 윤 씨가 쓸 수 있는 여유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윤 씨는 월세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다른 중증장애인 부부와 방 두 칸과 화장실 한 칸이 있는 집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생활비보다 더 부족한 것은 여느 중증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활동보조서비스다. 윤 씨의 활동보조는 인천시의 추가 시간을 포함해 월 200시간이다. 저녁 때 활동보조가 없어 야학 수업이 있는 날에는 야학을 통해 식사 등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고.
 
권 씨는 “화요일, 수요일, 금요일 학교를 나와요.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제가 수업 끝나면 데려다 주고 잠자리를 봐줘요. 화·목요일에는 야학에 있는 다른 사람이 가고, 월요일에는 제가 가끔 가기는 하지만 거의 아무도 안 가요.”라고 말했다.
 
윤 씨는 생활하면서 가장 불편한 점으로 이동을 꼽았다. 윤 씨의 집 근처에는 저상버스가 다니지 않는 데다 지하철역까지는 거리가 꽤 멀기 때문에, 윤 씨는 주로 장애인콜택시를 많이 탄다.
하지만 장애인콜택시는 평균 2시간은 기다려야 탈 수 있으며, 매번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기에는 비용 부담도 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 씨는 “힘들지만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고 편하다.”고 단언했다.
이어 윤 씨는 “그림 그리고 전시회도 열고 싶어요.”라고 꿈을 전했다.
 
“시설에서 유일하게 즐겨했던 것이 그림 그리는 것이었어요.”라고 운을 띄운 윤 씨는 “매주 수요일 오후에 미술하고 나가서 전시회도 하고, 팔고…….”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에 대해 권 씨는 “시설에서 팔아서 그 돈은 다 착복했고.”라며 윤 씨의 말을 이어 받았고, 두 사람은 ‘이제는 지나간,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라는 듯 크게 웃었다.
 
윤 씨와 권 씨는 서로 사귄지 2년이 됐다고 했다. 그동안 누구보다 윤 씨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을 권 씨. 그는 ‘윤 씨가 시설에서 보낸 세월은 20여년이었지만, 23년이라는 세월을 모두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나이는 23살인데 23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돼요. 시설에서는 몸만 컸을 뿐 배운 것도, 한 것도 없는 것이죠. 아까도 말했듯이 이제 한글과 숫자를 배우고 있어요. 본인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서 힘들어하죠.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힘든데, 본인은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 또 체험홈을 거치긴 했지만 자립생활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제가 자립생활 훈련을 시키고 있어요. 누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게 자립생활이잖아요.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해야 될 것들, 남들은 23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서 익혀왔던 것들을 단기간에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죠.”

이어 권 씨는 “사회가 장애인을 만들 뿐이지 장애인 당사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지 몸이 다를 뿐인데, 그 이유로 비장애인들은 누리고 살 수 있었던 것들을 시설에 빼앗긴 것이잖아요.”라고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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