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지승 씨 부모 김덕환·이옥희 씨 인터뷰

“막상 내 자식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장애인도 사람 아닙니까…….”

김덕환(60) 씨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햇볕에 검게 그을린 투박한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김지승(당시 21세) 씨 사망사건’이 있은 지 4년, 언론매체와 사람들은 지승 씨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부모 김덕환 씨와 이옥희(54) 씨로부터 지승 씨가 사라진 지는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김 씨와 이 씨는 지승 씨가 실종된 날부터 죽어서 돌아오기까지 모든 순간이 마치 오늘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2001년 8월 29일 개학을 이틀 앞두고 지승 씨는 갑자기 사라졌다. 김 씨는 “(지승이가 다니던 기숙사 학교가) 당초 8월 30일이 개학이었는데, 보수공사가 있다고 해서 31일로 미뤄졌어요. 그래서 29일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했던 것을 30일로 미뤘는데, 집에 멀쩡히 있던 애가 없어진 거예요……. 하루 더 머물렀던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4살 때까지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컸던 지승 씨, 어느 날 경기한 이후로 지적장애를 보이기 시작했다. 장애자녀를 둔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부부는 오로지 지승 씨에게만 매달렸다. 양육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부담으로 근심 가실 날이 없었지만, 남들은 모를 만큼 아주 조금씩 좋아지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품었다.

운동신경이 좋아 논두렁길에서도 자전거를 잘 탔던 지승 씨, 남의 집 자식 부럽지 않게 말도 잘 듣고 착한 아들이었다고 부부는 곱씹었다.

▲ 김지승씨 사건 내용이 담긴 판결문을 읽는 김덕환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최지희 기자
▲ 김지승씨 사건 내용이 담긴 판결문을 읽는 김덕환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최지희 기자
“지승이가 없어지고 한 삼일동안은 동네사람들과 산속이니 저수지니 다 뒤지고 다녔어요. 혹시나 사고로 죽지는 않았을까 싶어서. 전단지를 2만 장 만들어서 신문이란 신문에는 다 끼워 넣고, 여기저기 다 붙였어요. 지승이가 발견된 정신병원 앞 전봇대에도 다 붙였어요. 길 지나갈 때마다 지승이와 비슷한 아이가 지나가면 계속 쳐다보고, 지승이가 어딘가에 서 있는 것 같고, 매일 대문을 열어놓고 살았어요. 버릇이 돼서 지금도 잘 안 잠가요.”

김 씨와 이 씨는 혹시나 집을 비운 잠시라도 지승 씨가 돌아올까 문도 잠그지 않고 기다리기를 6년, 그러나 품에 돌아온 것은 싸늘한 주검이 된 지승 씨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2007년 5월 23일, 애 아빠는 모를 심으러 갔고 저는 집에 있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더라고요. 나가보니까 경찰이라면서 ‘혹시 김지승이라고 아느냐’고, ‘제 아들인데 찾았느냐’ 그랬더니 (경찰)서에 가보면 안다고 그러더라고요. 갔는데 물 컵을 내밀면서 ‘말 듣기 전에 이거 한 잔 드세요’ 그래서 물을 마셨어요. 그랬더니 ‘사망했다’고…….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그 와중에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으니까 지문을 찾았다고. 아니 그럼 살아서는 못 찾습니까. 지문이 똑같을 텐데 살아서는 못 찾느냐고 그랬어요. 혼미해져서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는 거예요. 그때부터 땀이 주르르 흐르더니 온 몸을 다 적시더라고요.”

김 씨와 이 씨는 지승 씨가 6년간 있었던 곳이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정신병원이라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없었다.

ㅅ의료재단이 운영하는 정신병원은 지승 씨가 다닌 중학교와 가까운 거리였다. 지승 씨는 혼자서 학교와 집을 오고갈 정도로 동네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더군다나 오산시는 이 씨와 지승 씨의 고향으로 동네사람들 모두 아는 사이였다.

김 씨는 “이전에는 이러한 사회적 구조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오히려 뭐가 아쉬워서 지적장애인을 데려가 밥을 먹이고 그러겠느냐. 지승이가 죽고 나서 보니 너무 생각 같지 않은 생각을 하지 않았었나……. 정부보조금, 병원에서는 그걸 노린 것 아닙니까.”라고 분노했다.

이 씨 역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너무 충격을 받았죠. 일반사람들은 못 들어가게 돼 있더라고요. 그렇게 꽁꽁 숨겨놨는데 찾을 재간이 있어요. 지문(조회)도 엉망이었고, 다 자기들 멋대로였지……. 죽어서는 찾았는데, 왜 살아서는 못 찾았냐고요.”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 지승씨의 어린시절 사진. ⓒ최지희 기자
▲ 지승씨의 어린시절 사진. ⓒ최지희 기자

“경찰이 (지승이가 죽은) 현장을 보라고 하는데, 거기는 바로 ‘인간 사육장’이에요, 사육장. 5월인데도 추웠어요. 3~4평 남짓한 공간에 아무 것도 없고 세숫대야 하나만 있고. 닭이나 오리 키우는 데 가면 냄새가 엄청나잖아요. 냄새가 엄청나게 나, 진짜 썩은 냄새가 나서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을 정도야. 이렇게 옆을 봤더니 휴게실에 4명이 앉아있는데 주름도 아직 펴지지 않은 새 옷을 입고 있더라고요. 사람 오니까 금방 데려다 갈아입힌 거지. 나중에 기자들이 하도 오니까 싹 개·보수했어요. 얼마나 오래됐는지 녹슬어서 벌겋던 철문도 없어지고, 심지어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 나갔더니 좋다고……. 지승이가 죽은 데 침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이 씨는 “사람들을 한 곳에다 다 모아놨더라고요. 그러니 밥을 주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뺏어먹으니까 못 먹을 거 아니에요. (지승이가 물을 많이 마셔서 보호실에 격리했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물을 마셨겠죠. 아오,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그냥…….”이라며 가슴을 쓸었다.

“경찰이 조서를 꾸미는데 ‘예’, ‘아니오’ 문답식으로 하는 거예요. 경황이 어디가 있어. 그냥 대답했는데 그렇게 경찰 수사가 마무리 된 거예요. 경찰이 중간에 ‘혹시 그쪽(병원)에 고마움을 못 느끼느냐’ 그러는 거예요. 아니 애를 죽여 놓고 무슨 소리냐니까 ‘거기서 사는 동안 먹고 자고 했는데 고마움을 못 느끼느냐’고. 이 양반 지금 조사하는 거야 아니면 농담하려고 하는 거야 그러면서 악을 쓰니까 슬며시 들어가더라고요. 어찌 부모가 자식이 죽어서 있는데 경찰이 그렇게 말을 합니까.”

우연히 지승 씨의 주검을 본 한 기자로부터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로부터 ‘공익소송을 진행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연락을 받은 김 씨와 이 씨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어 처음에는 거절했다. 하지만 부부는 고민 끝에 소송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옆에 사람들이 ‘국가나 병원을 상대로 해봐야 고생만 하다 후회만 남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랬어요. 그런데 내 자식이 이렇게 되니, 남의 일이 아니겠구나. 그 정신병원에서 죽은 70여 명이 전부 다 무연고자라고 해요. 그게 다 무연고자이겠습니까. 세상에 알리면 누군가 내 자식 같이 부모가 찾는 애들이 있을 거다, 설령 살아있을 때 못 찾더라도 죽어서라도 찾지 않겠느냐…….”

국가와 병원을 상대로 한 소송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고생만 하다 후회만 남을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처럼 부부는 소송 과정에서까지 많은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김 씨는 “경찰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까지 잘못을 인정 안했습니다. 대법원 올라갈 때 병원에서 쓴 항소 내용을 보니까 ‘부모가 자식을 버려놓고 이제 와서 찾느냐’, 그렇게 악담을 했어요. 세상에 아무리 없다 할지라도 자식을 정신병원 앞에 내버립니까. 난 아직도 그쪽 얼굴이 잊히지 않아요.”라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 ⓒ최지희 기자
▲ ⓒ최지희 기자
‘얼굴을 되도록 노출시키지 않는 게 좋다’는 언론매체의 말에도 불구하고, 김 씨와 이 씨는 카메라 앞에 섰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라는 죄책감이 온몸을 짓누를 때마다, 어디선가 지승 씨와 같은 처지에 놓였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연신 용기를 냈다.

그 결과 2010년 5월 6일 국가·성남시·ㅅ의료재단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한 1심에서 승소하고, 지난 1월 20일 ‘김지승 씨가 5세 나이의 지적 수준의 지적장애인으로 소득을 올릴 수 없다고 본다’는 1심 판결 원고 패소부분 취소 판결을 받음으로써 완벽히 승소했다.

국가·지방자치단체·의료재단을 상대로 승소했고, 지적장애인의 노동력을 인정하는 국내 첫 판례를 이끌어 냈다는 데 의미가 크나, 김덕환 씨와 이옥희 씨에게는 그 판결문마저 아들에게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많은 고통을 받았던 부부는 소송이 끝난 뒤 왠지 모를 위협감과 압박감 때문에 멀지 않은 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집의 위치가 변한 것 말고는 예전 생활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지승 씨를 잃었다는 죄책감의 무게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길고도 긴 싸움이 끝나고 손해배상금을 받는 순간 ‘자식 팔아서 돈 받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김 씨와 이 씨는 일부 금액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기부하고, 남은 돈은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놔뒀다. 자식 잃은 부모가 죄인이라며 김 씨와 이 씨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돈 벌어먹겠다고 꽁꽁 숨겨놓는 병원이나 귀찮다고 그냥 처리해버리는 공무원이나 ‘너는 장애인이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관심 있게 봐주면 이런 불행한 일은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정부에서 좋은 제도장치라고 내보내도, 정작 현장에서 개개인의 이득을 위해 마음먹으면 장애인은 영원히 장애인으로 남으니까요……. 판결문도 모두 버리려다가, 생각 안 나게 싹 없애려다가, 혹시나 누가 찾을까봐 보관하고 있어요. 부모 잃어버린 아이들이, 자식 잃어버린 부모들이 하루 빨리 서로 품에 안았으면 좋겠어서…….”

지승 씨 사건이 담긴 판결문이 김 씨의 손에 들린 채 한참이나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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