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함경록

지난 9월 ‘숨’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2009년 11월 제작했고, 2010년 1월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를 시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 스페인영화제, 바르셀로나영화제 등을 돌았습니다.
 
브리쉘 유럽영화제에서 황금시대의상과 제4회 시네마디지털서울에서 버터플라이상도 수상했는데, 계속 단편영화 위주로 만들었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 영화에 대한 관심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장편영화를 만들고 나서 처음으로 제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 받고, 상도 받으니까 더 힘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숨’은 한 여성장애인의 삶을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 ‘장애인’이라고 하면 보통 시사 고발 프로그램과 같은 방식들로만 다뤄지고, 항상 피해자고, 약자로만 비춰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영화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 다른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보자, 그리고 그의 일상이 과연 우리랑 어떻게 다르고 같은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 카메라를 비춰보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었습니다.
 
영화 ‘도가니’는 영화 자체로 평을 하기보다, 영화가 할 수 있는 큰 역할을 해준 것 같아서 같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고마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숨’이 다른 영화 다르기 때문에 상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런 측면에서는 ‘도가니’가 분명 잘해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는 그동안 다른 매체에서 다뤘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조금 아쉬움이 남습니다.
 
영화를 안 찍을 때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 강의를 나갑니다. 그러다 간 곳이 장애인들이 생활하는 센터였는데, 그곳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탈시설해서 자립생활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수업 내용은 각자가 시나리오를 쓰고, 자신이 감독이 돼서 영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쓰다보니까 다들 자신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그렇게 처음으로 장애인생활시설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하게 됐습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오히려 흥미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방송에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라 ‘그렇구나’하고 넘어간 것입니다.
점점 가까워지고, 깊이 알면 알수록, ‘다르지 않구나, 전혀 다르지 않은 기본적인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숨’을 시작했습니다.
 
눈으로 드러나는 폭력성을 다루는 건 굉장히 쉬운 일입니다.
폭력을 어떻게 잘 만들어 가느냐는 감독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부분인데, 제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당사자인 수희를 중심에 놓고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라고 주변사람들이 계획을 짜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선의든 악의든, 당사자의 의견은 무시된 채 수희라는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봤습니다.
 
한글 제목은 ‘숨’이고, 영어제목은 ‘엘보우 룸(Elbow Room)’입니다. 영어 제목이 먼저 정해졌고, ‘팔꿈치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 또는 ‘자유’, ‘의지’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반면, 한글 제목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작자가 ‘숨’이라고 지어줬습니다. 개인적으로 한 글자 제목을 싫어해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첫 촬영 때 녹음하는 사람들이 마이크 설치 및 조정을 마치고 헤드폰을 건네줘서 그걸 쓰고 소리를 듣는데, 박지원(영화 속 수희역) 씨의 숨소리가 거칠게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으니까 이 장면에서의 숨소리, 저 장면에서의 숨소리, 숨소리를 통한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영화가 어떤 사건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한 개인의 소소한 부분을 누려보자는 측면에서 숨소리만으로도 감정이 표현된다는 게 좋았습니다. 그래서 한글 제목을 ‘숨’으로 정했습니다.
 
지원 씨는 영화 수업하던 센터의 활동가이자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영화를 처음 만드는 신인감독이기 때문에 주인공만큼은 전문 연기자랑 작업하려고 했습니다. 지원 씨를 만난 것은 영화 속 숨소리나 작은 반응들을 담는 게 중요한 만큼 연기 지도를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연기 지도를 부탁하려고 마주쳤는데 심상이 맞아서 발탁했습니다.
 
어떤 영화인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지원 씨의 모습을 보니 표정이 풍부하고 예뻤습니다. 저도 모르게 ‘차라리 당신이 배우를 하는 게 어떠냐’고 던졌는데, 처음에는 안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럼 연기 지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돌아왔는데, 한 10분 뒤에 지원 씨가 오더니 ‘나 할래’라고 말했습니다. 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현하는데 그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하고 겹쳐졌습니다.
 
영화 속 지체장애인역은 실제 제 주변에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도와줬고, 지적장애인역만 지적장애인이 아닌 전문연기자들이 연기했습니다.
 
촬영하면서 큰 제약은 없었습니다. 지원 씨가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부터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해줘야하지’라고 고민했는데, 저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고 계획 없이 영화를 찍었습니다. 왜 자꾸 뭘 해주려고 하는지 모르겠고,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고 잘 마무리됐습니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 또한 그런 부분입니다.
 
물론, 충격적인 사건인 만큼 제 첫 장편영화기 때문에 상업적인 요소를 부각시키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생활시설에서 음모를 감추기 위한 것들, 또 그것들을 들추기 위한 노력들 등 충분히 극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도 재밌는 대본이 나올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다가는, 또 다시 한 명의 개인을 보지 못하고 사건만 보는 상태에서 머무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비장애인이 주인공이 되고 장애인을 피해자로만 보면, 장애인의 욕구가 아닌 비장애인의 욕구가 되는 것입니다. 장애인을 돕는 것 또한 장애인의 욕구가 아니라, 비장애인의 욕구라는 뜻입니다.
장애인의 의지가 무엇이며, 그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게 분명히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쉬운 점은 하나의 화제가 됐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어느 정도 작품성에 대한 고집을 꺾고 절충하는 부분들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지금의 도가니와 같은 현상처럼 하나의 도구로 쓸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영화를 영화로만 봤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싶어요. 이런 영화도 만들고, 저런 영화도 만들고,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분간 장애인이 등장하고 카메라가 흔들리는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 해봤으니까, 언젠가 시간이 지나고 내가 좀 성장했다고 느꼈을 때 숨을 만들 때 아쉬웠던 부분들을 보충해서 더 발전적인 영화로 다시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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