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부모 송명금 씨

“안 된다면 길바닥에 눕던지 머리털을 깎든지 해야죠. 우리아이의 미래가 달린 일인데…….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으니까 투쟁하는 것이죠. 현장의 목소리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자꾸 돈 없다고만 하는데,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느냐에 따라 예산은 얼마든지 마련될 수 있는 것이잖아요.”

한 어머니가 국가를 상대로 자녀의 생존권을 요구하며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발달장애자녀를 둔 송명금(49) 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장애인부모 관련 교육에만 참석하던 사람이었다. 특수학교 부모회 회장 등 많은 활동에 참여했지만, 시의원 등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우리아이가 장애어린이다’라는 말 한 마디조차도 하지 않았던 그였다.

▲ 송명금 씨가 빠짐 없이 자동차 뒤에 진열해 놓은 아들 민규 학생의 미술작품.
▲ 송명금 씨가 빠짐 없이 자동차 뒤에 진열해 놓은 아들 민규 학생의 미술작품.
그런 그가 이번 해 들어 ‘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우리이야기를 좀 들어라’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낸다. 그동안 발달장애인 부모를 대신해 움직이는 활동가가 따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송 씨 자신이 활동가가 돼 있었다.

평범한 한 가정의 어머니이자 아내여야 할 송 씨는 자신의 자녀가 발달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이미 투사 아닌 투사의 길을 걷고 있었다고 말한다. 송 씨의 자녀는 모두 두 명, 그중 첫째인 정민규(14) 학생은 발달장애인이다.

“민규는 자폐성 장애가 있어요. 보통 자폐성 장애인이라고 하면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모습(서번트신드롬, 발달장애인이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 능력을 보이는 현상)을 떠올리는데, 그런 자폐성 장애인은 아주 적어요. 저도 한때는 민규가 그런 아이이길 꿈꿨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무언가 한 곳에 ‘꽂히면’ 거기에만 집착하는 아이들, 자해하는 아이들, 말이 안 통하는 아이들, 그게 자폐성 장애인의 일반적인 모습이에요.”

송 씨는 민규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요즘 사춘기여서 부쩍 힘이 든다고 손사래를 쳤다. 본인이 싫은 것은 끝까지 하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 송 씨는 웃음 반 속상함 반으로 “보송보송했던 얼굴에 이렇게 수염은 나갖고……. 어제도 치과 치료를 받기 위해 복지관을 찾았는데, 자리에 누워보지도 않고 거부했다. 머리털을 깎는 데도 처음에는 좋다고 앉았다가 도중에 마음에 안 들었던지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고 하소연했다.

송 씨는 민규 학생을 가졌을 때 첫 아들이라는 생각에 마냥 기뻤다고 회상했다. 난산으로 고비도 겪었지만, 2~3살 넘어오는 시기에 대·소변을 가리는 게 어려운 것 말고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민규 학생은 4살이 돼서도 말을 하지 않았고, 송 씨는 늘 다니던 소아과를 찾았지만 ‘정서장애도 중복장애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고 말할 뿐이었다.

민규 학생의 발달장애를 안 것은 일반 유치원을 보내면서부터다. 일반 유치원에 간 민규 학생이 까무러치고 병이 나는 등 적응하지 못하자, 송 씨는 그때부터 큰 병원을 찾아가 치료와 함께 병원학교를 다녔다. 그때 송 씨의 뱃속에는 민규 학생의 동생이 자라고 있었다.

“둘째가 민규와 4살 차이가 나는데, 둘째를 임신했을 무렵 민규에게 자폐성 장애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민규가 말을 안 하고 혼자 노니까 동생을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민규의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고) 병원에 가서 울면서 ‘낳아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고 물었어요. 한참 고민하던 끝에 ‘둘째까지 자폐성 장애가 있으리란 법은 없다’는 의사의 말과, ‘치료가 어느 정도 되면 좋아지겠지’라는 생각에 둘째를 낳기로 결심했어요.”

송 씨는 임신부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만삭이 될 때까지 민규 학생의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 다니기를 멈추지 않았다. 둘째를 낳은 지 13일 만에 둘째를 등에 업고, 한손에 민규 학생의 손을 잡고 병원을 다녔단다. 송 씨는 그 병원의 ‘전설’이 됐다며 웃었다.

“의사가 ‘몸조리 못해서 안 된다’길래, 갓난아기인 둘째를 영아반에 종일 맡겨두고 다녔어요. 그때는 민규의 재활치료가 급했기 때문이죠. 조금이라도 일찍 재활치료를 받으면 아이가 하루라도 빨리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때문에 저를 비롯한 많은 엄마들이 그랬어요. 크고 잘한다는 병원을 찾아 대구에서, 부산에서,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엄마들도 있었으니까요.”

발달장애 특성상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등 자기결정권 행사에 어려움을 겪는다. 더군다나 돌발행동을 함께하는 경우가 있어 ‘확실한 보호자’가 곁에서 보조해주지 않으면 일상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송 씨 가족의 모든 삶은 민규 학생에게 맞춰져 있다. 특히, 송 씨는 둘째에 대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형에게 맞춰진 삶을 살고 있다’고 표현했다. 둘째는 형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오후 6시까지 학원에 있어야 한다. 일요일에 활동보조인이 오는 시간을 빼고는 주말도 예외가 아니다.

“저도 가끔 민규를 보면서 ‘왜 저래’라는 소리가 나오는데, 둘째를 이해시키기 너무 힘들죠. 똑같이 뭘 하다가 싸우더라도 둘째만 혼내고 둘째에게만 참으라고 해요. 그렇게 하면 안 되는데……. 둘째에게는 ‘온전한 자기 상처’가 없어요. 장애가 있는 형으로 인해서 받은 상처투성인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가 있는 형제를 둔 아이가 특별히 말썽을 부리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정서상의 문제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가정의 분위기는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인지치료 및 언어치료 등 민규 학생의 재활치료에 들어간 돈은 한 달 120만 여 원. 게다가 크면서 발달장애 특성상 근육 발달 등이 잘되지 않아 어깨와 무릎은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나마 장애인복지관 시설 등을 이용하면서 나가는 돈이 조금 줄었지만, 사업하는 송 씨 남편의 수입은 최근 경기가 나빠짐에 따라 빠듯하다. 송 씨는 임신하기 전까지 사업을 했지만, 민규 학생의 양육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송 씨는 “정부는 나가는 돈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집이 있다는 이유로, 얼마의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지원하지 않는다. 돈이 아주 많은 집안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집안은 부부가 지원을 받기 위해 법적으로 이혼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부모도 살고, 장애자녀의 형제도 살아야하는데, 전부 사글세·한부모가 돼야 하는 게 장애인 가족의 서글픈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많은 발달장애인 부모들이 그렇듯 송 씨도 민규 학생의 입학을 1년 미뤘다. 1년간 언어치료 등을 받으면 조금 나아진 상태로 입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1년이 지나도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는 게 송 씨의 말이다.

특수학교 입학을 위해 이사를 감행하는 것은 물론 민규 학생의 재활치료를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았지만, 민규 학생은 송 씨의 기대만큼 좋아지지 않았다. 송 씨는 자신이 지치는 만큼 민규 학생의 치료 영역이 점점 짧아지고 있으며, 그동안 첫째에게 쏟은 정성을 이제는 둘째에게도 좀 나눠주고 싶다고 털어놨다.

▲ 송명금(49) 씨가 아들 민규 학생이 만든 미술작품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 송명금(49) 씨가 아들 민규 학생이 만든 미술작품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리 재활치료를 받아도 비장애인만큼 좋아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발달이 정말 미비하기 때문에, 엄마가 노력하는 것에 비해 아이는 언제나 제자리처럼 보입니다. 민규가 8~9년째 미술·음악치료를 받고 있는데 언어는 늘지 않지, 학교 수업과 겹칠 때면 ‘시간 때우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 씨는 민규 학생의 재활치료를 아직까지도 손에서 놓을 수 없단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아이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것. 송 씨는 장애어린이의 성인기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재활치료에 ‘목매는’ 것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다음에 아이들이 컸을 때 부모는 이미 늙고 없어요. 발달장애인이 장애인생활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제도와 지원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에, 우선 아이가 어떻게든 빨리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질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에요. 민규 같은 경우 어디 가서 ‘밥 주세요, 물 주세요’ 못해서 굶어 죽을까봐 언어치료를 계속할 수밖에 없어요.”

지난해 송 씨는 전국장애인부모연대에서 진행하는 교육에 참여했다가 발달장애인법과 관련한 내용을 듣고 ‘내가 꿈꾸는 세상이 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양의무제 폐지, 활동지원 시간 확대, 평생교육, 가족 지원 등……. 그 어떤 의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하지만 송 씨의 피부에 와 닿는 말들이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송 씨는 당시 목소리를 합치고 뭉쳐야 한다는 생각이 밀려왔다고 떠올렸다.

송 씨는 “혼자서는 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투쟁 현장에 나가니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부모들, 같은 생각을 가진 부모들이 함께 있다는 데 희망을 느꼈다. ‘누군가 나서주겠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나서서 이야기하고 힘을 뭉쳐야 한다.”고 당부했다.

송 씨는 오는 20일 발달장애인의 권리 보장을 위해 투쟁 현장에 설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에게는 첫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 되는 셈이다.

“발달장애어린이들이 훗날 성인이 돼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 때, 그때 대책을 세우기는 이미 늦습니다. 무작정 장애인생활시설로 보내는 것도 분명 한계가 있을 테니까요. 아무리 좋은 장애인생활시설이라고 해도 우리가 바라는 삶은 ‘사회에서 똑같이 인간답게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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