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장애 1급 양영순씨, 동료 장애인에 무한나눔

▲ 지체장애 1급인 양영순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제주시 중앙지하상가 내 옷수선집에서 재봉틀 앞에 앉아 옷을 수선하고 있다.
▲ 지체장애 1급인 양영순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제주시 중앙지하상가 내 옷수선집에서 재봉틀 앞에 앉아 옷을 수선하고 있다.
“저보다 더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동료 장애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을 주기 위해선 일손을 놓을 수 없어요.”

5월 19일 오전 제주시 중앙지하상가 내 ‘카니스메이져’. ‘드르르륵, 드르르륵’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6.6㎡(2평) 남짓한 공간에서 양영순씨(58.여)가 부지런히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지체장애 1급인 양씨가 운영하는 옷수선집이다.

이 비좁은 곳에서 그는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 꼬박 11시간을 보낸다. 생후 9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아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 탓에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일을 한다.

옷수선집을 지난 1992년 차렸으니 벌써 20년 넘게 이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자란 그는 어릴 적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 문턱도 밟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가 그에겐 사치였다.

남들은 학창생활을 즐길 나이인 17세 때 그는 일찌감치 의상실에 취직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장을 만나‘일하고 싶다’고 떼를 쓴 끝에 겨우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 했다. 2년간 시다(보조)로 일하며 틈틈이 미싱 기술을 익혔다.

1977년 당시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결혼해 13년간 세탁소를 경제적 이유로 문을 닫아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하상가에 옷수선집을 냈다. 이 때부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게 됐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런데 그가 동료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1984년 장애인 등록을 하러 갔다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보다 훨씬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비록 자신도 어렵게 살지만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 해 뜻이 맞는 지체장애인 40여명과 함께 ‘제주도지체장애인협회’를 만들었다. 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목장갑 공장을 차리는가 하면 자신이 운영하는 옷수선집에 동료 장애인들을 견습공으로 채용해 기술을 익히게 한 뒤 점포를 독립해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2003년에 문을 연 제주장애여성상담소 개소에도 앞장섰다. 삶은 힘겨웠지만 더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옷을 사주고 쌀도 대줬다.

그는 1991년 동료 장애인들과 함께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휠체어와 목발을 사용할 수 없으니 엉금엉금 기어서 이틀만에 정상에 올랐다. 무릎이 다 까지고 손바닥은 부르텄다. 자식들에게 자랑스런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2002년 인도네시아 여행을 갔을 때 생긴 일화도 있다. 여행 첫 날, 한 식당 앞에서 다 부서진 휠체어에 앉아 있는 장애인을 목격하곤 자신이 타고 있던 휠체어를 선뜻 내준 것이다. 새로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딱 3번 타 본 휠체어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휠체어를 선물 받은 장애인은 연신 고마움을 표시하며 한동안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대신 양씨는 여행 내내 남편이 업고 다니거나 목발을 짚어야 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가난과 장애, 무학(無學)이라는 열악한 조건을 딛고 일어선 양씨는 2009년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았다. 제주도지체장애인협회 제주시지회 화북동 분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10년 넘게 정기 후원하는 등 따뜻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양씨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말고 내가 갖지 못한 것보다 가진 것에 감사하면서 조금이라도 이웃과 나누며 살다보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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