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최동익 비례대표 의원

많은 사람들이 제가 시각장애가 있는 줄로만 아는데, 실질적으로 지체장애와 시각장애 둘 다 있습니다. 지체장애인으로 살아온 지는 50년,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온 지는 40년이 됐습니다.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을 지체장애인이어서 못하는 경우가 많고, 반대로 지체장애인이지만 시각장애인이라서 할 수 없는 일이 많아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러한 난관들이 도전의 조건이 됐다고 위안 삼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녹내장으로 인한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큰 물체는 보이지만 글씨는 전혀 보이지 않고, 건물의 문턱 등도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는 데 조심스럽습니다.
갑자기 안 보이게 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전에 눈 알레르기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쓴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물 및 방사선 치료 등으로 여러 가지 질환을 앓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시각장애로 인한 몇 가지 변화들로 공부 등에 있어서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반에서 공부를 잘하던 학생이었는데 공부를 전혀 못하게 됐고, 안압이 올라가서 머리가 아프니까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기도 했습니다.

동네에서는 친구들과 놀이를 하더라도 딱지치기나 구슬치기에서 잃어야 했고, 지체장애가 있을 때 할 수 있었던 것들마저 상실감을 느끼게 되니까 ‘세상에서 내 존재는 무엇인가’하는 좌절 또는 고민을 갖게 됐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는 사회복지를 공부했는데, 당시 친구들이 공부할 수 있게끔 많이 도와줬습니다. 교재·부교재·필기한 공책 내용을 녹음해서 저에게 갖다 줬습니다. 그때 친구들 중 지금 사회복지현장에서 일하는 친구들을 만날 때면 복지를 논하기도 하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학 생활할 때도 여전히 마음이 안 좋은 일은 있었습니다. 가장 마음이 안 좋았던 것은 친구들이 주변에서 취업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장애인을 뽑는 곳이 없어 남들 취업 준비할 때 고등학생다운 대학 생활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지체장애가 있어 시각장애인 안마사로 일할 수 없으니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고, 어떻게 보면 그래서 대학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같은 이유로 대학원을 갈 수밖에 없었고,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나니 또 다시 할 일이 없어 미국으로 유학을 가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미국에서도 운전을 할 수 없어 이틀가량 장을 보지 못해 밥을 굶는 등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원을 마치고 동시통역 및 번역을 해서 번 돈으로 신학을 공부했는데, 그때가 제가 처음으로 직접 돈을 벌은 경험이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세금을 내는 데, 그때의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유학생활 중 한 가지 재밌었던 기억은 볼링장 갔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함께 신학을 공부하는 친구들이 ‘시험이 끝났으니 볼링장에 가자’고 했는데, 저는 ‘볼링을 못 친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있을 때는 시각장애와 지체장애가 있으니 ‘볼링을 못 칠 것’이라는 이유 등으로 볼링장에 들어가기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그럴 일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실제로 가서 볼링을 해보니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뿐더러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한 노인이 ‘워커’라는 것을 이용해 볼링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1990년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데, 그것을 보면서 ‘이게 장애인복지의 한 발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서 이러한 문화와 환경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현재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관장을 맡고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세계 최초로 여성시각장애인이 바리스타가 돼 커피가게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밖에 보조공학기기 관련 기술을 통해 시각장애인이 자유롭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 등을 해 왔습니다.

제가 회장직을 역임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는 시각장애인 권리 옹호 및 관련 정책을 다듬어나가는 일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회원의 2/3 이상이 노인, 그중 절반 이상이 기초생활수급자입니다. 사업을 펼치는 데 많은 예산이 필요하지만 서울을 제외한 지회를 보면 열악한 상황이어서, 중앙협회에서 지회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에서는 장애계의 화제를 만들어나가는 일들을 주로 했었는데, 최근 화제는 대통령 직속의 국가장애인위원회 상설화·설치입니다.

제19대 국회의원으로서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입법활동을 펼쳐나갈 계획입니다. 권리와 관련해 기회의 평등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동등한 조건에서 출발하는 동시에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투표소에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을 만들었다고 해서 ‘기회를 줬으니까 투표를 하고 안 하고는 장애인의 선택’이라고 말할 게 아니라, ‘왜 투표를 해야 하는 지’ 등에 대한 교육 또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투표소에 가는’ 동등한 조건과 ‘투표할 수 있는’ 기회가 어우러져 권리를 이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장애인이 유권자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정치 참여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국민 중 장애인의 인구비율이 5%라고 이야기하지만 등록하지 않은 경우까지 합하면 10%, 그 가족까지 더하면 20%입니다. 그만큼 정치적 힘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를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밀접한 정책적 구조를 통해 장애계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도 빠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장애인의 직업훈련을 담당하는 곳은 교육과학기술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중소기업청 모두 4곳입니다. 하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할 정부 기구가 없어 각각 ‘알아서’ 일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통령 직속의 국가장애인위원회 상설화·설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질적인 복지의 완성은 문화복지라고 봅니다. 실력이 쌓아진다면 문화관광위원회를 가서 문화복지의 틀을 만들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끝으로, 장애인이 스스로를 장애인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모두가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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