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기록한 책 ‘살아남은 아이’ 발간

 

▲ 지난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살아남은 아이>의 발간보고회가 개최됐다.  ⓒ최지희 기자
▲ 지난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살아남은 아이’의 발간보고회가 개최됐다. ⓒ최지희 기자
“나쁜 기억을 다 잊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순간마다 튀어 나옵니다. 그러면 그것은 잊혀졌다고, 치유가 됐다고 볼 수도 없겠죠. 그 과거를 확실히 치유하지 않고서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 책의 저자인 한종선 씨  ⓒ최지희 기자
▲ ‘살아남은 아이’의 지은이 한종선 씨가 자신과 가족의 끔찍했던 사연을 전하던 중 눈물을 흘렸다. ⓒ최지희 기자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생존자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살아남은 아이’가 출간됐다. 지난 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살아남은 아이’ 발간보고회에서 지은이 한종선 씨는 “아직도 그 때의 그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1984년, 당시 아홉 살이었던 한 씨는 누나와 함께 복지원에 끌려갔다. 그로부터 3년 간 구타 및 학대를 당한 그는 복지원이 폐쇄된 뒤에도 당시의 기억이 삶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전했다. 누나와 그의 아버지는 그 사건을 계기로 지금까지 정신병원을 떠돌고 있다.

“죽어야 나올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끌려가는 순간부터 폭력이 벌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맞는 횟수가 적어도 세 대였으며, 잘못 맞아서 엉치뼈가 깨지거나 척추가 나가 장애인이 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의무과는 있었지만 ‘빨간약’을 발라주는 게 치료의 전부였습니다. 한겨울에 세면장에서 알몸으로 손발이 묶인채 찬물을 계속 맞는 고문을 당했고, 누나를 비롯한 여자들은 침대에 손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한 씨는 “내가 아닌 다른 피해자들이 이렇게 모든 실상을 공개했다면 가정이 깨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내가 총대를 메고자 했다.”며 “아버지와 누나를 병원에서 데리고 나와 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살고자 하는 작은 희망만을 바라본 채 살고 있다.”고 밝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폭력과 인권유린으로 지난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간 복지원 자체 기록으로만 513인이 사망하고, 다수의 시체가 의대에 팔려나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사건이다.

가히 한국판 아우슈비츠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과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열기 속에 묻혀버렸고, 끝내 국가에 의해 면죄부를 받았다. 하지만 사건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이날 보고회에서 한 씨와 함께 책을 쓰고, 도서의 기획을 맡은 언론연대 전규찬 대표는 “책을 엮으며 ‘내가 진정 가해자였구나’라고 반성하게 됐다.”며 “나의 안전을 위해 일정 인구의 희생이 수반됐다. 학계는 고상하게 이론을 말하고 있지만 실상 역사에 대한 감각과 현실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고백했다.

전 국가기록원 이영남 학예연구관은 “국가는 한종선 씨를 기록하지 않는다. 국가를 믿기 보다 개인의 기록과 기억에 의지하는 역사가 필요하다. 이런 자리가 보다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힘을 보탰다.

함께 책을 쓴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상임이사는 “형제복지원 외 양지마을, 에바다농아원 사건 등 풀리지 않은 사건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사건들이 왜 다 묻히고 반복되는 것일까. 그동안 우리사회는 사회복지시설 거주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심지어 민간단체들이 어렵게 조사해서 법원까지 올라가도, 시설장이 대통령표창을 받은 적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상참작 판결로 끝낸다. 이러한 것들은 오랫동안 고착돼 왔고, 정부는 시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부추긴 결과, 시설은 법 위에 군림했다.”고 지적했다.

언론개혁시민연대 추혜선 사무총장은 “책에 보면 ‘형제복지원 사건’과 유사한 사건들이 함께 정리돼 있는데, 이 사건들은 모두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운영진들이 다시 복지시설에 손대면서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드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 형제복지원 생존자 김용욱 씨  ⓒ최지희 기자
▲ 형제복지원 생존자 김용욱 씨 ⓒ최지희 기자
형제복지원의 또 다른 생존자 김용욱 씨도 자리에 참석해 그 때 그 기억을 술회했다. 1982년 말, 15일 동안 형제복지원에 갇혀 있었던 김 씨는 그 곳에 있던 내내 폭력과 싸웠다. 그는 이미 ‘생지옥의 낮과 밤’이라는 책을 통해 그때의 사건을 고발한 바 있다.

김 씨는 “나는 출근할 때마다 형제복지원 근처를 지나다니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저녁 그곳으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차 안에서 끊임 없이 맞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강원도 속초에 간다고 생각할 만큼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고 몸서리쳤다.

김 씨는 형제복지원의 운영 구조를 고발했다. 그에 따르면 형제복지원 안에서 만들어진 조직은 군대보다 체계적이고 치밀했다. 거주인들을 위아래 관계로 나눠, 끌려온 사람이 또 다른 끌려온 사람에게 권력과 폭력을 행사하도록 했다.

또한 개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별로 일을 시켰기 때문에 잔일부터 기술을 요하는 작업까지 밖을 통하지 않고도 충분히 이뤄질 수 있었다.

그는 “아내가 나를 찾으러 왔을 때 형제복지원에서 고기를 보여주며 ‘이렇게 잘 먹이고 있다’고 했단다. 얼마나 거짓말을 했는지, 훗날 내가 형제복지원을 나와 가족들에게 실태를  알리자 부모님은 내게 오히려 ‘거짓말한다’며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했다.”고 전했다.

김 씨는 “정말 정신질환이 생길 것 같아 집을 나와 3년간 노숙생활을 했다. 시간이 흘러 가까스로 16일 동안의 일을 수기로 쓴 내용을 단행본으로 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며 우리사회의 무관심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한편, 이날 보고회에는 이덕우 변호사, 전 국가기록원 이영남 학예관, SBS 최상재 PD,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정하 활동가 등이 참석해 “더 이상 인권으로 고통받는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각계가 협력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이덕우 변호사는 1916년 일제가 한센인들을 소록도에 감금시킨 예를 들며,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일들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사회복지사업을 개인에게 맡겨놓은 정부의 탓이 크다.”고 일침을 가하며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정하 활동가  ⓒ최지희 기자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정하 활동가 ⓒ최지희 기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김정하 활동가는 “이 책이 28년 전 기록일지 모르나 책이 가진 폭력의 메커니즘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했다.

김 활동가는 “예전에는 직접적인 폭력 등 노골적인 인권침해를 저질렀다면, 지금은 눈으로 드러나지 않는 비노골적인 방법으로 인권을 침해한다.”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롯한 많은 사건들은 국가의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개인간의 폭력으로 치부하고 만다.”고 인식의 전환을 당부했다.

탈시설-자립생활에 대해 김 활동가는 ‘사회권 보장이 없으면 자유는 허망한 것’이라며, 사회가 함께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활동가는 “시설장이 탈시설-자립생활하고자 하는 거주인에게 ‘넌 자유야, 시설에서 나가도 돼’라며 문의 자물쇠를 푸는 것이 해결책의 전부가 아니다. 탈시설-자립생활을 꿈꿨다는 이유만으로 대·소변 처리조차 해주지 않고 ‘나갈 수 있으면 나가봐’라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정작 문제 있는 시설을 폐쇄해도, 거주인들이 갈 데가 없어 또 다시 스스로 폭력의 현장에 돌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며, 사회권 보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 활동가는 “당시 한 거주인은 나에게 ‘너희들이 한 일은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 던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나중에 힘 없이 돌아가는 나에게 ‘그렇다 할지라도 나중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덧붙여줬는데, 기억에 남는다. 비록 지금은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 던지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큰 출렁임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한종선 씨는 앞으로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위해 진상을 알리는 데 힘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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