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침묵’, 그 속살을 들여다보다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성적(性的) 욕구’. 하지만 다른 욕구들에 비해 ‘성’은 활발히 논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더군다나 ‘생존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장애인에게 있어서 ‘성적 권리’를 요구한다는 것은 ‘사치’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이야말로 인간 본능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본지에서는 ‘장애인의 성’이라는 주제를 표면으로 꺼내 장애인 당사자, 비장애인, 성 활동가, 전문가 등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1부 “장애인도 섹스가 가능한가요?”

▲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의 한 장면. 한 번도 성관계를 가져본 적 없는 남성중증장애인이 섹스테라피스트와 침대 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얼마 전, 오로지 얼굴 근육만 쓸 수 있는 남성 중증장애인이 ‘성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섹스테라피스트와 만남을 갖는 과정을 그린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이 개봉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비장애인 관람객들에게 ‘영화 속 주인공같은 중증장애인이 과연 성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은 ‘신체적 장애가 있으니 성기능에도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과연, 그럴까?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은 달라져 있었다. 장애인의 성에 대한 인식도를 조사하기 위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50인 중 ‘장애인에게 성적능력이 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68%에 다다랐으며, ‘장애정도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32%였다. 결과적으로 ‘성적 능력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장애유형별 성적 기능과 관련된 질문에 있어서는 여전히 잘못된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장애인의 성 다룬 ‘영화’가 주는 파급력…비장애인에 인식 조장

▲ 영화 ‘오아시스’의 한 장면. 성적 주체도, 객체도 되지 못하는 여성장애인의 현실을 잘 드러낸 반면, 여성장애인의 정서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처럼 ‘영화’라는 매체가 주는 파급력이 상당한 가운데, 처음으로 장애인의 성에 대해 진지한 논쟁점을 던진 영화 ‘오아시스’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사회로부터 소외된 중증 뇌병변장애인 공주와 전과자 종두가 사랑을 나누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오아시스’.
공주와 종두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한 경찰은 종두에게 묻는다. ‘너는 저런 애를 보고 성욕이 생기디?’라고 말이다. 이 장면을 두고 황진미 영화평론가는 ‘장애여성을 비정상적인 성욕의 대상, 즉 성폭행의 피해자로만 사고하는 사회적 인식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평했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현실 속에서 여성장애인의 성이 어떤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를 잘 그려낸 반면, 영화는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또다른 편견을 스스로 저지르고 말았다.
영화의 초반 공주는 분명 성폭행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적 소외를 해소하기 위해 자신히 완강히 저항했던 대상을 불러들인다. 아무리 외롭다고 할지라도 가족 중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줬던 아버지를 죽인 뺑소니범이자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남자와의 교제가 가능하단 말인가? 바로 이 부분이 황 평론가를 비롯한 장애계단체들이 크게 반발을 제기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같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아시스’는 장애인의 성을 둘러싼 논의를 표면 위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어서는 큰 의미를 갖는다.
▲ 황진미 영화평론가.
지난해 10월 장애해방학교에서 진행된 황 평론가의 ‘영화를 통해 본 장애인의 성’ 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아시스’ 이후 장애인을 그린 영화들 속에서는 성이라는 껄끄러운 주제를 뒤로 숨긴 채 장애인의 성적 소외를 당연시 하거나 아예 무성적인 존재인양 그려냈다.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영화 ‘말아톤’에서 주인공 초원은 성욕이 전혀 없는 청소년으로 그려진다. 초원이가 얼룩말 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자 불쾌하게 휙 돌아보며 화를 내는 여자, 이때 ‘우리아이에겐 장애가 있어요’라는 엄마의 말이 초원이의 입을 통해 변주된다. 여자의 엉덩이를 만진 행위는 단순히 얼룩말 무늬를 좋아하는 특성 때문이 아닌, 비장애인이 응당 생각하는 성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황 평론가는 “지적장애인의 성욕을 ‘오해’로 단정지으며, 그의 ‘장애로 인한 실수’는 ‘관용’돼야 할 것으로 그리고 있다.”고 질책했다. 뿐만아니라 이같은 문제는 영화 ‘허브’, ‘맨발의 기봉이’ 등에서도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또한 ‘사랑해, 말순씨’, ‘이리’ 등의 영화에서는 지역사회 안에서 남성장애인을 성범죄자로, 여성장애인을 성범죄 피해자로 그려내기도 했다. 이로인해 장애인들은 ‘조심해야 할 존재’, ‘성적 결정권이 없는 존재’ 등으로 비춰지게 됐으며, 성적 권리를 요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해도 장애인은 ‘시설에서 사는 사람’ 또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 등 폐쇄적인 인식이 강했으며, 여전히 그러한 인식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장애인과 자주 만남을 갖지 못한 비장애인들은 영화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만 그들을 느끼고 판단한다. 영화 속에 그려지는 장애인의 모습을 사실인냥 그대로 믿어버리고, 극적인 서사 뒤에 가려진 그들의 삶의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다. 이같은 섣부른 판단은 장애인의 성적 활동에 있어서까지 ‘못한다’고 단정지어 버리는 상황에까지 이르게했다.

▲ 영화 ‘말아톤’의 한 장면. 주인공 발달장애인 초원은 ‘무성의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장애인은 못한다?… “그릇된 사회적 통념”

▲ 구자윤 성 활동가.
‘장애인은 정말 못하는가’라는 물음에 뇌병변장애 1급 구자윤 성 활동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구 활동가는 “장애인이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다보니 응당 성을 누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이라고 꼬집으며, 이것은 ‘그릇된 사회적 통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장애유형별로 성관계는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구 활동가에 따르면 뇌병변장애인의 경우 성 기능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다만 경련이나 경직으로 인해 체위를 취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또한 지체장애인 중 가장 성적 소외를 겪고 있는 척수장애인의 경우 발기와 사정의 문제가 있지만, 척수장애인 모두가 더이상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뿐만아니라 지적장애인의 경우도 지적 능력 등이 낮다고 해서 성적 능력까지 불완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같은 내용들이 비장애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장애인 성에 대한 인식 조사’에서 가장 크게 오해를 샀던 부분이다.

‘장애인의 성 향유권’ 선언적인 법조항에 불과… 실현 방안 마련돼야

▲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29조 성에서의 차별금지.
성적 욕구는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다만 장애유형에 따라 성관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재활치료, 보조기구, 약품 등을 통해 이뤄지기도 하며, 직접적인 성교가 어려울 경우에는 제2의 성감대를 통한 성적 활동도 가능하다. 하지만 철저히 비장애인 시각으로 그려진 성문화 속에서 장애인들이 원활하게 성을 향유하기는 쉽지 않다.
이같은 현실을 반영하듯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에도 ‘성에서의 차별금지’에 대한 조항이 마련돼 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모든 생활영역에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받은 사람의 권익을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장애인의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권 실현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9조 1항에는 ‘모든 장애인의 성에 관한 권리는 존중돼야 하며, 장애인은 이를 주체적으로 표현하고 향유할 수 있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진다’고 명시돼 있다. 또한 2항과 3항에는 ‘장애를 이유로 성생활을 향유할 공간 및 기타 도구의 사용을 제한하지 말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의 성 향유권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책을 강구하고, 편견·관습 등 모든 차별적 관행을 없애기 위한 홍보·교육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조항은 여전히 선언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고 있으며, 법이 제정돼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앞서 시행했던 설문조사 결과, 이 법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한 사람은 2%에 불과했으며, ‘대충 안다’고 답한 사람은 34%, ‘처음 듣는 얘기다’라고 답한 사람은 64%에 다다랐다. 뿐만아니라 현장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장애인 당사자조차도 이 법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권리로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는 장애인의 성. 그렇다면 장애인이 성적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들이 마련돼야 할까.
웰페어뉴스에서는 총 4부에 걸쳐 장애유형, 성별, 결혼 여부에 따라 장애인의 성문제를 들여다 볼 예정이다.
▲ 비장애인의 ‘장애인 성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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