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환 목사

저는 6·25전쟁 중 수류탄 폭발 사고로 시력과 오른팔, 왼쪽 청력이 손상됐습니다. 제 고향은 강화도 교동도로 많은 사람들이 밀려서 내려가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사상’ 문제로 살해당했습니다.

제 할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또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사고로 네 살 때 고아가 돼 혼자 길거를 헤맸고, 일곱 살 때 길에서 주운 폭탄을 갖고 놀다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소리를 듣고 나온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 ‘시체나 수습해주자’ 그러면서 천으로 저를 덮기도 했습니다. 당시 교동도 섬 안에는 병원도 없었는데, 위기의 순간 미국 헬기가 출동해 살 수 있었습니다. 김포시에 있는 미군육군병원에서 7개월간 치료받았고, 강화읍에 있는 고아원 및 시설을 전전하다 대구맹아학원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초·중·고등 과정을 함께 공부했는데,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너무 즐거웠지만 방학이 오면 괴로웠습니다. 친구들은 고향에 가거나 부모님께 찾아가는데 저는 갈 곳이 없어 기숙사에 홀로 남아 방학을 보냈습니다. 외로움이 그렇게 큰 고통인 줄 몰랐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기숙사 찬 바닥에서 낡은 담요 한 장을 몸에 말고 누워있으려니 눈물이 저절로 쏟아졌습니다. 신세 한탄과 함께 사흘을 울었는데, 울다 지친 어느 날 꿈에 누군가가 나타나 ‘피아노를 배워라’라고 했습니다. 꿈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지만, 끝까지 ‘할 수 있다’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는데 ‘네가 네 자신을 알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변 사람들 역시 ‘병신 육갑한다’고 말해 시작도 전에 포기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피아노 치다가 실망해서 정신질환마저 생길 수 있으니 아예 포기하라’는 말에, 울면서 ‘꼭 당신들 보는 앞에서 내가 피아노를 만질 것이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날 뒤부터 새벽 1시, 2시, 시도 때도 없이 음악실에 가서 혼자 피아노 건반을 더듬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니 어느 날 ‘듣기 싫지 않은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렵게 피아노 연주를 터득해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학비는 내지 않더라고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했는데, 처음 일자리를 구할 때는 거절과 함께 상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한 맥주가게의 여성사장님께서 ‘실제로 쳐봐라’며 기회를 줬고, 제가 ‘가고파’를 연주하자 그날부터 ‘일하라’라고 했습니다. 4학년이 됐을 때 사장님께서 ‘피아노가 식상하니 전자오르간이나 새로운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주문해서,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전자오르간을 샀습니다.

때마침 대학교에서 일본 교토에 있는 정화여자대학교 교수님께서 대학교를 방문했다가 제 피아노 연주를 듣고 ‘모든 비용을 책임질 테니 유학을 와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는데, 전자오르간을 사면서 진 빚을 다 갚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모든 것이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하다가, ‘죽기 전에 호소나 하고 죽자’는 생각으로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한 40일이 지나 편지가 한 장 왔는데, 대통령의 딸이라는 내용과 함께 수표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편지가 제 발걸음을 되돌려놨고, 새로운 삶의 현장으로 돌려놨으며,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촉진제가 됐습니다.

제게는 ‘기적의 피아니스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이처럼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배고픈데 혹은 고통이 큰데 열심히 하라고 하면 야속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럴수록 ‘내가 스스로 이 사회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새롭게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려움 앞에 굴복하면 나는 패배자로 남기 때문에 절망의 끝이 아무리 깊더라도, 절망의 끝은 희망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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