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사건’ 진실 규명 위한 법적·문화적 접근 논의 마련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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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2일 방송대 역사관에서 ‘형제복지관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가 진행됐다. ⓒ안서연 기자
상상할 수조차 없는 폭력과 인권유린으로 지난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간 513인이 사망하고, 다수의 시체가 의대에 팔려나가 시신조차 찾지 못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끔찍한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지 26년째가 되던 지난 22일, 진실 규명과 더불어 사회적·법적 의미를 조망하고, 앞으로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피해 당사자와 인권운동가, 법학 전문가들이 방송통신대 역사관에 모였다.

피해 당사자 “‘사회정화’라는 목적 하에 무자비하게 끌려가… ‘복종’만이 살길”

이날 토론회에는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의 참혹함을 전달했던 피해자 한종선 씨와 함께 1984년~1987년까지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박태길 씨가 참석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 없이 마구잡이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기억을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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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4년~1987년 동안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박길태 씨. ⓒ안서연 기자
가출을 감행했던 박 씨는 14세 당시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새우잠을 자던 중, 파란색 군용차에서 내린 남자들에 의해 끌려갔다. 차 안에는 술에 취한 사람, 노숙자 등 박 씨처럼 영문을 모른채 잡혀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파출소를 거쳐 다시 어디론가 끌려갔다. 14세 청소년에게는 없는 게 당연했던 신분증, 이처럼 억울하게 끌려온 이들이 ‘내려달라’고 소리치자 그때부터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됐다.

박 씨의 증언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사람들 3,500여 명은 주민등록증이 없거나, 거리에서 껌을 팔거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어쩌다 운 좋게 가족들이 찾아오면 나갈 수 있었지만, 가족이 거부하거나 아예 소식조차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약없이 강제노역과 폭력, 성폭행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탈출에 성공해 밖으로 나갔는데, 아 글쎄 3~4일만에 다시 잡혀 들온 겁니다. 어떻게 잡혔냐고 물어보니 배가 너무 고파서 슈퍼에서 먹을 것을 훔쳐 먹다가 붙들려 파출소에 갔는데, 파출소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보냈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 파출소에 갔으면 유치장에 가야지 왜 형제복지원에 옵니까? 그것도 경찰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사회정화’라는 국가의 목적 하에 정당하게 운영되던 일명 ‘부랑인 시설’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용자들은 원장의 말을 따라 동료 수용자들에게 폭행을 가했고, 그러면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되어 ‘덜’ 맞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복종만이 살 길이었다’고 박 씨는 회상했다.

이처럼 형제복지원에서 근무하던 사무실 직원이나 간수들까지도 모두 처음에는 수용자들이었으며,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끝내는 동료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수사 검사 “형제복지원은 하나의 왕국, ‘윗분들’이 감싸기에 가능했다”

당시 울산지청 소속 검사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변호사는 1986년 12월 복지원의 실체를 알고 수사에 들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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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건 검사를 맡았던 김용원 변호사. ⓒ안서연 기자
“사냥을 하러 갔는데 한 사냥꾼이 ‘여기서 멀지 않은 산 속에 이상한 작업장이 있는데, 인부들이 산을 깎는 작업을 하고, 경비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지키고 있다. 경비원들이 인부들을 개패듯이 패는 것을 몇 번 보았다’고 말하더라. 듣자마자 이것은 완벽한 ‘범법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하는 인부들이 군인이나 죄수라면 지키는 사람들은 몽둥이가 아니라 총을 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수사에 입수한 김 변호사는 형제복지원을 ‘하나의 왕국’이라고 표현했다.

김 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 곳에서 박인근 원장은 ‘왕’이었으며, 수용자들은 군번 비슷한 수용번호를 부여받아 내무반 생활을 했다.

수용자들은 주로 밭에서 주워 온 시래기국이나 도살장에서 버린 피를 이용해 끓인 해장국을 먹으며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각자 봉제공장, 목공소, 철공소 등의 작업장에 배치돼 쉴 새 없이 일을 했다.

“3,000여 명이 넘는 사람을 통제하는 수단은 ‘폭력’과 ‘공포’밖에 없었다. 폭력의 수준이 어느 수준이냐? 쉽게 하는 말로 ‘때려죽인다’라고 보면 된다. 또한 여자어린이, 젊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가했다.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때려 죽이는 판인데, 성폭력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정도의 가혹행위였던 거다.”

이밖에도 수많은 폭력과 인권유린을 일삼았다는 형제복지원. 뿐만아니라 박 원장은 2년 간 국고보조금 39억 원 가운데 11억여 원을 횡령했고, 3,000여 명의 수용자들을 ‘무보수’로 작업장에 투입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엄연한 ‘인권침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엄청난 거물’이었던 박 원장은 국가에 의해 보호받았다.

“복지원이라는 이름의 이 처절한 인간유린은 원장이 개인적으로 저지를 비리가 아니었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대통령의 정부 아래서만 저지러질 수 있는 비리였다. 복지원의 참상은 사회복지정책을 내실있게 추진할 아무런 계획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복지선진국인 양 행세하려고 한 전시행정이 빚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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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사회복지연대 박민성 사무처장. ⓒ안서연 기자
이것이 바로 김 변호사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박 원장의 개인비리’로만 보지 않는 이유다. 사건이 발각된 뒤에도 박 원장은 정치적 외압과 조직적인 사건의 축소, 은폐 등으로 인해 적절한 형벌을 받지 않고, 2년 6개월 밖에 형을 받지 않았다는 게 김 변호사의 증언이다.

가해자는 ‘떳떳’했고 피해자는 계속 ‘고통’스러웠다… “불처벌 투쟁 원칙 따라 권리 되찾아야”

부산사회복지연대 박민성 사무처장은 “과거의 형제복지원은 지금 현재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건재하고, 박 원장은 여전히 부산의 복지계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히며 “이 형제복지지원재단 또한 의심스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거대한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만 내리고 잠정적으로 조사를 중단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에 반해 당시 수용자들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명예회복도 받지 못한 채,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한 씨의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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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재승 교수. ⓒ안서연 기자
이에 대해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재승 교수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인권의 총제적 침해가 분명하고, 국가책임법은 인권범죄를 비롯해 국제법상의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주장하는 데 시효를 알지 못한다.”며 “2005년 유엔인권위원회가 채택한 ‘불처벌 투쟁 원칙’의 피해자 권리장전 제11조는 재판받을 권리, 배상받을 권리, 알 권리를 피해자의 권리로 명시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 형지복지원 수용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를 위해서는 ▲형제복지원 뿐만아니라 1975년 이후 다양한 시설들의 인권침해관행에 대한 전반적인 자료수집이 필요하고 ▲진실에 대한 권리의 상대를 누구로 삼아 법률적 투쟁을 시작할지 고려해야 하며 ▲공개된 정보에 입각해 피해자들이 울산보도연맹사건 대법원 판결 논리에 준해 사건을 풀어가는 방법(손해배상)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더불어 ▲조사결과에 기초해 적절한 보상법제정을 청원하는 방식도 고려해보고 ▲공론화과정을 통해 현재의 수용시설의 혁신을 위한 계기로 삼고, 이른바 대중의 병적이고 적대적인 ‘청결유토피아’를 청산하는 문화운동도 추구할 것을 제안했다.

“형제복지원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매체 노출 등 각인에 힘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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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연대 전규찬 대표. ⓒ안서연 기자
‘살아남은 아이’ 출판 기획을 맡은 언론연대 전규찬 대표는 “한종선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한 역사의 ‘괴물’은 이제 그 증인의 몫을 다했다.”며 “앞으로는 우리가 나서서 겨우 재논의되기 시작한 형제복지원 사건을 어떻게 수면 위로 끌어 올릴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 교수는 △한 씨와 함께 복지원 문제에 관한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고 △감금·감시·훈육·처벌의 폭력·권력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야하며 △국가 권력·(경범죄)처벌의 문제와 한종선·복지원·시설·감금의 문제, 그리고 우리 일상·생활·안전·공포의 문제를 상호 결부시켜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어 “한 씨를 일개인이 아닌 ‘우리’의 일원으로 계속해서 소개하고, 형제복지원을 과거지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사태로 복원시키고, 시설·감금을 남의 문제가 아닌 바로 나에게 지금 일어날 수 있는 위기로 보여주기 위해 연극·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노출시켜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주제에 관심있고 전문적 실력을 제공할 법학자와 역사학자·사회학자·정치학자·인권운동가·언론학자·저널리스트 그리고 수감자 당사자들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피해 당사자, 나쁜 기억에 갇혀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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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대 법학과 김재완 교수. ⓒ안서연 기자

이날 사회를 맡은 방송통신대 법학과 김재완 교수는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강한 가해자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 아니다.”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사법이 아닌 입법적으로 접근할 것을 권유했다.

이어 “형제복지원 사건은 단순히 한 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시설정책에 대한 문제이니만큼 제2의 시설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는 힘들겠지만 피해 당사자가 나쁜 기억에 너무 갇혀 있지 말고, 나서서 발언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토론회를 지켜본 한종선 씨는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 규명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지부진하게 가는 것도 원치 않지만, 급하게 가다 자빠져버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지치지않고 끝까지 해보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민주통합당 진선미 의원과 김용익 의원, 진보정의당 서기호 의원이 공동 주최했으며, 민주주의법학연구회·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인권단체연석회의·언론개혁시민연대·탈시설정책위원회가 공동 주관했다.

앞으로 이들은 대책위원회 등을 꾸려 형제복지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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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복지원 사건을 기록한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 한종선 씨. ⓒ안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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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회를 마친 후, 형제복지원의 피해자라고 밝힌 한 남성이 본인이 겪었던 고통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 그는 “노숙자를 사회기생충이라 여겨 부랑인 시설에 수용시키면서, 그런 기생충들의 노동력으로 돈벌이를 했던 박 원장과 이외에 권력자들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질책했다. ⓒ안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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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 및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토론회’에 100여 명의 인권운동가, 법학전문가, 대학생 등이 참여했다. ⓒ안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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