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을 나와 홀로 선 열여섯 장애인들의 이야기 ‘나 자립했다’

웰페어뉴스·장애인신문에서는 장애인거주시설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생활 지원을 위한 주거복지사업의 주역인 탈시설 자립생활 당사자 16인의 이야기가 담긴 ‘나 자립했다’를 연재합니다.

▲ ⓒ고은경
▲ ⓒ고은경
너무 지루했던 곳, 시설의 기억

“집 사서 일반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일반 사람처럼 사는 거요? 그냥 출근하고 집에서 밥먹고 좀 놀다가 자고. 그런 거. 일반인처럼 살고 싶다는 거죠.”

김준영 씨의 꿈은 일반인처럼 사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인데 준영 씨에겐 삶의 목표이자 꿈이다. 준영 씨는 20세에 시설에 들어갔다. 시설에 들어가기 전까진 성남시에 있는 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준영 씨와 함께 살기 어려워졌다. 준영 씨와 어머니를 챙기던 이모는 결국 준영 씨를 시설에 보내게 된다. 시설에 들어가기 전까지 장애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시설에 들어가게 되면서 장애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장애인이란 낙인을 벗어나고 싶어요. 장애가 있다고 바라보는 게 좀 그래요. 안 좋아요. 전 그냥 평범한 일반사람처럼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요리경연대회 나가는데도 꼭 장애인 요리경연대회라고 붙어있고.”

시설 생활에서 차별을 겪지 않아도 장애인와 비장애인의 구분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장애인 생활 시설은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시설에서 살면 먹여주고, 재워주니 그 곳에서 계속 살면 편하게 살 수 있으니 밖으로 나올 생각은 하지 말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사람은 먹고, 자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욕구와 욕망이 있고 그것이 통제당하는 순간 모욕감을 느낀다. 준영 씨에게 시설 생활 중 힘들었던 것에 대해 물었다.

“시설에 있는 것 자체가 지겹고, 반복해야 하는 게 지겹고 짜증나고 진짜 있기 싫었어요. 시설에 있을 때는 생활이 똑같아요. 반복적인 생활. 너무 지루했어요. 나가고 싶단 생각밖엔 안 들었고. 외출할 때도 허락을 다 받아야 하고 자유가 없었어요. 꼭 허락을 맡아야 한다는 게 싫었어요. 통제도 있었고 하니까.”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반복과 통제 그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준영 씨가 있었던 시설은 충남 금산에 있었다. 다른 시설과 달리 시설 생활인의 자립생활을 위해 적극 노력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시설 생활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준영 씨는 시설에서 나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시설 직원들 또한 준영 씨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시설에서 운영하는 작업장에서 일을 시작했던 준영 씨는 시설 직원의 소개로 시설 밖의 농자재 생산 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농기구 부속품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며 한 달에 70만 원을 받았다. 출퇴근 시에는 시설에서 이동지원을 해줬다. 통장을 만들어서 번 돈을 직접 관리했다. 준영 씨의 목표는 자립생활이었다.

“제가 원장님한테 답답하다고 자립생활을 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어요. 나가서 집을 사서 살고 싶고 그렇다고. 그래서 원장님이 알았다고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기다렸어요. 노들인가 발바닥인가 거기 통해서 면접을 봤어요. 거기서 되가지고. 시설에서 퇴소하고 서울로 이사 온 거죠.”

이마트나 홈플러스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준영 씨가 거주하던 다솜은 충남 금산에 있는 지적장애인 생활 시설이다. 시설원장 및 직원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과 2010년 10월부터 관계를 맺으면서 시설과 함께 지역자립생활운동단체가 시설장애인의 탈시설 자립생할을 지원하는 체계를 만들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 현재 30인의 거주인이 있는데 80% 이상은 자립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금산, 대전 지역에 연계되는 자립생활센터도 지원체계도 없어서 어려워하고 있다. 준영 씨는 스스로의 노력과 시설의 도움을 받아 주거복지사업의 지원으로 자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준영 씨가 시설에서 나오자 준영 씨의 어머니를 돌보고 있던 이모는 화를 냈다. 자신의 허락도 맡지 않고 그럴 수 있냐며 시설 직원들에게도 화를 냈다. 시설에서 이모를 설득했다. 준영은 이모에게 확실히 말했다.

“이모가 다시 시설로 가면 어떻겠냐고 물어봤는데 싫다고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했어요. 내가 가기 싫다고 의사표현 하니까 아무 말 안하더라고요.”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온 지는 1년. 처음에는 왕십리에서 혼자 살았다. 지금은 같은 주거복지사업으로 자립생활을 하게 된 분과 함께 살고 있다. 활동가들은 자립생활의 취지에 맞게 각자의 독립된 공간을 꾸릴 수 있도록 방이 2개 있는 집을 구하기 위해 애썼지만 집값이 만만치 않았고 결국 원룸 형태의 방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온전한 독립생활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준영 씨는 만족하고 있다.

자립생활을 시작하자 준영 씨는 다시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설에 있을 때 취업박람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부스를 차리고 있었던 하상복지관의 한 사회복지사가 준영 씨 멘토가 되어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된 곳은 떡찌니라는 사회적 기업이었다. 두 달 정도 일하다가 그만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게 되었다. 멘토 선생님이 자리를 구해줘서 이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마트에선 처음에는 농산쪽이었다가 검품으로 바꼈어요. 일이 좀 쉬워서 그렇게 연결해 줬죠. 7개월 동안 일했어요. 새벽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나왔어요. 출근은 6시에 하고 되게 피곤했어요. 알람 맞춰서 일어나고. 4시 20분에 알람 맞춰서 일어났어요.”

피로가 쌓였던 탓일까. 7개월을 일하고 나니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결근을 하게 됐고 결국 잘렸다.

“무단결근 한 게 후회돼요. 아, 왜 했지?”

준영 씨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시설에서 일할 땐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준영 씨는 뒤늦게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터득하고 있는 중이다. 지각 안하고, 결근 안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매일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내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결국 인생일 것이다. 이마트를 그만 두게 된 뒤 다시 멘토 선생님의 소개로 롯데리아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5일 정도 일하다가 그만두었다. 적성에 맞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빨리빨리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그게 익숙해지지 않았던 탓이다. 지금은 일자리를 구하며 면접을 보러 다니는 중이다.

“원래는 호프집 서빙하고 싶어서, 면접을 보러 갔는데 그 쪽에서도 서빙하기엔 어렵지 않겠냐고 그러더라고요. 주방보조는 괜찮을 거 같긴 한데 자리가 다시 나면 연락 준다고 했어요. 전에는 서빙 쪽으로 일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이마트나 홈플러스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제가 7개월 동안 검품일 했으니깐, 그런 쪽으로요. 가장 일하고 싶은 곳은 애슐리인데. 어제까지 연락 안 오면 합격 안된 걸로 알고 있으라고 면접관이 말했거든요. 아마 떨어진 것 같아요.”

▲ 올해 ‘이음여행’에 참여한 준영 씨와 서경원 씨. 너무 멋진 두 남자. ⓒ고은경
▲ 올해 ‘이음여행’에 참여한 준영 씨와 서경원 씨. 너무 멋진 두 남자. ⓒ고은경
핸드폰 요금 35만원, 이제 아껴쓸래요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하는 분들 중 대부분은 중증장애인으로 수급권자다. 때문에 취업 연계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준영 씨처럼 일할 의지가 있는 분들을 위해서는 주거지원과 더불어 취업지원이 절실하다. 자립생활을 유지하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취업이요? 그거 말고는 없어요.”

준영 씨는 하루빨리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봐 둔 집도 있다고 했다. 준영 씨에게 돈은 많이 모았는지 물었다.
하하하
대답을 안 하고 웃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걱정이 있었다. 처음에 시설에서 나올 때는 저축한 돈도 있고 초기자금이 꽤 있었다. 게다가 이마트에서 7개월간 일하면서 번 돈도 많이 모았다. 그러나 씀씀이가 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시설에서 지내면서 할 수 없었던 것, 내 물건을 사서 모으는 것에 재미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휴대전화 요금과 생활비가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모아둔 돈이 있어 아직은 괜찮지만 일을 그만 둔 상태에서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 늘어난 씀씀이는 쉬이 줄지 않는다.

“아껴야 잘 사니까요. 왕십리에 있을 때 제일 급한 게 옷이었어요. 입을 게 없어서 옷을 많이 샀죠. 한 달에 한두 번 옷 고를 때도 내가 직접 고르죠. 입어보고 마음에 들면 사고. 시설에 있을 때는 통장관리를 제 담당 선생님이 관리해주셨어요. 제가 막 쓸까봐. 돈을 쓰고 싶으면 허락을 받고 썼어요. 허락을 맡으면 돈을 주는 거죠. 돈 제일 많이 들어가는 곳은 핸드폰요금. 저저번달에 핸드폰 요금 많이 나왔는데 35만 원 나왔어요.”

준영 씨는 멋쩍은 웃음만 계속 짓는다.

“이제부터 아껴 쓰면 되죠.”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상에 대해서 물었다. 밥은 어떻게 해 먹는지 반찬은 직접 만들어 먹는지 궁금했다.

“라면, 계란, 김치(썰어먹는 거), 참치. 참치는 프라이팬에 볶아서 먹어요. 브로콜리도 삶아 먹고요. 시장에서 김도 사서 먹고. 호박전 사다가 프라이팬에 데워서 먹기도 하구요.”

아직 국물 요리는 하지 않는 모양이다. 주로 프라이팬을 이용한 요리다. 계란, 참치, 김치…. 매일 먹으면 질릴 음식인데, 아직은 괜찮은 걸까. 가사를 도와주는 활동보조가 필요하진 않냐고 물었다.

“활동보조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어요. 굳이 뭐 활동보조가 필요할 거 같지는 않고. 전 별로요.”

준영 씨는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자립생활을 하는 지적장애인들은 대개 자신은 활동보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신체적으로 불편한 게 없으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준영 씨는 함께 사는 분의 활동보조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다. 청소와 빨래, 가사에 있어서 함께 사는 분의 활동보조인이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준영 씨가 온전하게 혼자서 살고 있다면 다른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준영 씨를 지원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종종 준영 씨와 함께 사는 분의 활동보조인에게서 불만 섞인 목소리를 많이 듣는다고 한다. 준영 씨는 자연스럽게 도움을 받게 된 부분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같이 사는 분의 활동보조인은 두 사람 몫의 활동보조를 하게 된다. 현재와는 다른 형태의 활동보조 서비스가 자립생활을 하는 지적장애인에게 제공될 때 지적장애인들이 온전히 자립생활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걷고, 운동하고, 춤추고... 자립생활의 재미 찾는 중

준영 씨는 답답할 때마다 탄천에 간다. 서울에서 짧은 거리는 아닌데 굳이 탄천까지 가서 바람을 쐬고 온다. 탄천 얘기를 꺼내자 준영 씨 표정이 밝아졌다.

“탄천 자주 가죠. 제 유일한 아지트인데. 앉아 있다가 바람도 쐬고 공기도 맡고 십분 앉아 있다가 걸어서 서현역까지 가서 서현역에서 구경하는 거죠. 사람 구경도 하고 둘러보고. 자주 가는 오락실도 있는데 거기도 가고. 저녁때쯤 서현역에서 야탑역까지 걸어와요. 걸으려고 가는 거니까. 살도 뺄 겸.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때도 혼자 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탄천에 갔어요. 고등학교 때도 왔다 갔다 하니까 운동도 되고 좋더라고요. 뭐가 좋긴 뭐가 좋아요. 상쾌하잖아요. 바람도 좋고. 공기도 좋고. 한강은 안가요. 탄천을 자주 갔었으니까 오로지 탄천밖에 안가요.”

준영 씨는 시설에 있을 때에도 자주 외출을 했었다. 하지만 외출을 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시설에서 나오자 자유가 주어졌다. 매일 마음 내킬 때 아침이고 저녁이고 누구 허락도 받을 필요 없이 탄천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부터 맡았던 향기, 보아왔던 풍경 그대로다. 자유가 별 건가 싶다. 이렇게 매일 탄천에 죽 치고 있어도 괜찮은 것,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는 것이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유에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준영 씨는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자유의 쓴 맛을 느끼는 것 또한 인생이다. 쓴 맛, 단 맛 다 봐야 비로소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말이다. 주거복지 사업은 올해로 끝이 난다. 이제 준영 씨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체험홈으로 이사를 가게 될 것이다. 체험홈이지만 독립된 방이 있는 곳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끝내고 홈플러스에 면접을 보러 갈 것이라고 했다. 고민과 숙제를 안고 있는 준영 씨의 자립생활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밝고 활기차다. 이제부터의 삶 또한 준영 씨의 웃음소리와 같기를 응원해본다.
준영 씨는 언젠가 시간이 되면 춤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반짝거리는 구두에 스키니진을 입고 있는 준영 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춤을 추는 모습이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느 무대 위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는 준영 씨의 모습을 기대해도 될까.

+인터뷰 후기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어떤 작가가 한 말이다. 준영 씨는 탄천 이야기만 꺼내면 표정이 밝아졌다. 이야기만 해도 이미 탄천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시설 생활은 그런 의미 있는 장소를 강제하고 통제하는 생활일 것이다. 준영 씨는 자신의 장소를 다시 찾아가는 중이다. 탄천에서 시작해 준영 씨에게 의미 있는 장소는 하나 둘 늘어갈 것이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탄천을 걸어보고 싶다. 걷다가 준영 씨를 만난다면 무척 반가울 것이다. 준영 씨 덕분에 탄천은 내게도 의미있는 장소가 되었다. “준영 씨 우리 언제 탄천에서 만나요!”

글 김원호 성공회대 사회학과. 작은자야간학교 교사

펴낸 곳 서울시시설장애인자립생활지원네트워크
글쓴이 강혜민, 김다연, 김원호, 노규호, 송효정, 여준민, 이승현, 이은영, 최성규, 최영선, 홍권호
사진
고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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