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시설에서 다시 지역사회로
[연재]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시설에서 다시 지역사회로
  • 웰페어뉴스 기자
  • 승인 2013.06.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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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을 나와 홀로 선 열여섯 장애인들의 이야기 ‘나 자립했다’

웰페어뉴스·장애인신문에서는 장애인거주시설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생활 지원을 위한 주거복지사업의 주역인 탈시설 자립생활 당사자 16인의 이야기가 담긴 ‘나 자립했다’를 연재합니다.

▲ ⓒ고은경
▲ ⓒ고은경
갑자기 당한 사고, 그리고 시설

1998년 3월, 운전 중이던 송용헌 씨는 가로수를 들이받는 사고를 당한다. 유년시절, 가정의 불화를 겪고 17세 어린 나이에 홀로 서울에 올라와 돈벌이를 시작했던 그는 이후로 30년간 장사를 해오며 살아왔다. 그러나 의식을 잃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옮겨진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고 당시 그에게는 그의 곁을 지켜줄 가족도, 간병인을 고용할 돈 조차 넉넉하지 않았다.

그 날의 사고는 그의 삶을 중단시켰다. 47년간 비장애인으로 살아왔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병원 생활은 길기만 했다. 사고 후 4년간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병원생활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의 연속일 뿐이었다. 기독교 병원에 입원한 덕에 후원인의 도움으로 낮 동안에 잠시 간병인을 쓸 수 있었지만 그의 앞에는 오직 ‘죽음’이라는 길만이 놓여있는 듯했다.

고통과 좌절 속에서 24시간을 누워 있어야 했다. 살은 썩어 들어갔고 날이 갈수록 잠시도 누워있을 수 없을 만큼 욕창은 심해져 갔다. 그 긴 고통 속에서 그는 그저 ‘삶’이라는 단어를 내려놓고만 싶었다. 간절히 죽음을 기도해야만 했다.

“중도장애인 특히 경추를 다친 사람들이 처음에는 대부분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지를 못해요. 왜냐면 그동안 잘 걸어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꼼짝을 못하니까…. 나도 사고 후 의식이 없다가 깨어나니깐 움직이지도 못하고 소·대변도 못 가리고 죽고 싶었죠. 보호자도 없어 돈도 없어 죽으려고 15일 동안 굶었는데 안 죽더라구요. 의식이 없으면 주사를 놓고 그러니까… 거기에 엉덩이 욕창은 엄청나게 생겨났고 먹지도 않아 살은 쪽 빠지고 재활학과 과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해 이렇게 살 수 없으니까 장기와 시신을 병원에 기증하겠으니 죽게 해달라고 했는데 죽을 마음으로 살아 보라며 엉덩이 욕창이 다 낳으면 시설로 보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전까지 시설은 생각도 못했는데 그런 곳이 있냐고 물으니 있다는 거예요.”

과장님과의 면담 후 중증장애인 생활시설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송용헌 씨는 돌아갈 곳도 없었기에 시설 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날부터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엎드려 있는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1시간도 엎으려 있기 힘들었지만 일주일이 지나니 24시간 동안 엎드려 있을 수 있었다. 10개월 만에 욕창치료가 끝났지만 약해진 폐로 인하여 호흡이 멈춰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진다. 호흡이 멈춰 영안실로 옮겨지는 사이 다시 깨어났다. 그렇게 송용헌 씨는 몇 번이나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었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후로 신앙도 깊어졌고, 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됐죠. 기독교병원이어서 성경을 많이 읽어주고, 의사 선생님이 성경 테입과 카세트를 사와서 한권 분량이 되는 성경말씀을 테입으로 듣고 또 들었죠. 들으니까 열심히 살아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죽었다 살았다 한 것 또한 하나님 뜻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시설, 이건 아니지, 아니지…

이런 과정을 거친 후 51세에 처음으로 입소하게 된 가평 꽃동네는 오랜 사회생활을 경험한 그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어릴 때부터 시설생활로 지역사회에 자립한 경험이 없는 장애인들과 달리 그에게는 도시의 지친 삶으로부터, 병상에서 보낸 고통의 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많은 시설 장애인에게는 자유와 권리가 박탈된 공간이었지만 송용헌 씨에게는 지난 날의 고통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공간이었고 종교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설생활 1년이 지날 무렵 송용헌 씨는 시설 내부에 일어나는 문제점을 서서히 직시하게 된다.

“시설 처음에 갔을 때 나쁘지 않았어요. 병원에서 4년 동안 있었고 병원 후원을 받아서 간병인을 구해 낮에는 쓸 수 있었거든요. 병원에서는 간호사나 조무사들이 다 해줘야 하거든요.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 시설에 가니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그런데 1년이 지나니까 시설의 안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관리자들은 신앙인들이고 수녀님이었기 때문에 괜찮았는데 문제는 직원들이었죠. 꽃동네 시설은 크기 때문에 한 층에 백 명씩 있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직원들이 장애인들한테 함부로 대하더라고요. 지적장애인들한테 더더욱 함부로 하는 게 보였죠. 말도 함부로 하고 심하게는 안 때려도 잘못했다고 때리기도 하고. 그래서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꽃동네에 보면 어릴 때부터 들어와 사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뒤늦게 들어와 생활하는 사람도 있는데 보면 주로 포기를 하고 살아요. 대부분 내 탓이지 하며 살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성격이 정의로운 면이 좀 있어서 이거는 아니다 싶어 원장 수녀님께 이런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죠.”

직원들의 폭언 및 폭행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송용헌 씨는 원장수녀를 찾아갔고 시설 내 폭력사건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원장수녀에게 폭언 및 폭행을 휘두르는 직원들에 대해서 시말서를 받게 하고 세 번 이상 시말서를 쓴 직원들은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안을 제안했다. 이런 행동에 직원들은 즉각적으로 반발하고 나섰지만 사회경험이 풍부했던 송용헌 씨는 직원들의 강압적 태도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직원들의 행태를 감시하고 나섰다.

“한 층에 방이 13개 정도 있는데 하루에 두 번씩 돌았죠. 어디선가 장애인을 때리고 있으면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죠. 그럴 때 반항하는 직원이 있으면 바로 원장 수녀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시말서 쓰게 만들었죠. 그러니 직원들은 펄펄뛰며 나만 보면 잡아먹으려 드는 거예요. 심지어는 직원끼리 대책회의를 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직원들에게 ‘시대가 어떤 시대인줄 알고 이런 짓을 하느냐? 내가 좋은 마음으로 원장수녀님한테 이야기 하는 거지 인권위에 이야기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경찰에 폭행죄로 신고하면 당신들 영창감이라고 했죠. 그렇게 삼 년이 흐르니 직원들의 폭행이 사라지더라고요.”

이러한 노력으로 시설 내 폭행은 줄어 들었지만 시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결코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가자! 지역사회로

하지만 사회생활도 겪을 만큼 겪었고 연륜이 있었던 송용헌씨는 산 좋고 공기 좋은 곳에 위치한 꽃동네에서 신앙생활을 지속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아 자립을 간절히 희망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 새로운 원장수녀가 부임한 것이 자립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데 일조했다.
 

원장수녀는 자립생활에 관심이 있는 10명의 장애인을 한 방에 지내게 하며 자립에 관한 정보와 교육 등을 진행하였다. 이후에는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연결해 주었고. 2008년도 그 방에서 지내던 장애인들이 탈시설하여 지역사회로 자립했다. 그러나 송용헌 씨는 그때까지도 시설에 남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회생활에 대한 욕망도 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성동자립생활센터 서성남 활동가(가평꽃동네에서 탈시설해 자립한 당사자)로부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으로 진행하는 시설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생활 지원을 위한 주거복지사업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면서 탈시설을 결심하게 된다.

8년간 보낸 시설 생활이 무료해질 무렵이었고 활동보조서비스, 주거 등이 지원되면 더 이상 시설에 남아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지역사회로 돌아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을 토대로 한 글과 신앙생활을 지속하면서 겪은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글을 써 책으로 내고 싶은 꿈도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독립된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에 나는 시설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어요. 사회생활을 많이 해봤고 산 좋고 공기 좋고 신앙생활하기도 좋고 너무 좋더라고요. 주변에서도 나이가 있으니까 여기서 사는 것이 좋지 않냐고 그랬죠. 그런데 성동센터 서성남 활동가가 주거복지사업을 알려주면서 언제까지 거기 있을거냐고 그러라고요. 한창 직원들과 마찰이 있을 때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김정하 활동가가 한 번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명함 받아 놓고 가끔 연락하며 어려운 일 있으면 물어보고 그랬어요. 한참 직원들과 싸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논의도 하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연락하고 지냈어요. 자립을 결심하고 김정하 활동가에게 연락을 하니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임소연 활동가를 소개시켜줬어요. 그러면서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선생님이랑 송파솔루션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준우 소장도 알게 됐어요. 김준우 소장은 저에게 자립생활의 롤 모델이 되었어요. 저분도 저렇게 자립을 하고 있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용기가 생겼죠. 주거복지사업에 신청하고 심사를 해야 했는데, 왜 자립을 해야 하는지 물어보더라고요. 시설에 8년 있으니 지겹기도 하고 지역에 나와서 할 일도 있다고 답했어요. 활동보조서비스 판정도 받아야 했고 그래서 준비하는 기간이 3~4개월 이상 걸린 것 같아요. 5월에 시작해서 11월에 나왔죠. 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지역에서 살고 싶은지 물어봐서 송파구를 택했죠.”

사고 후 병원과 시설을 거쳐 12년만에 다시 지역사회로 돌아왔다. 그러나 비장애인으로서 지역사회에서 살 때와는 달라 처음에는 다소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에 고생을 했어요. 솔직히 괜히 나왔다 싶더라고요. 시설에 있으면 때 되면 밥 주고 때 되면 자고 그랬으니까요. 복지부와 서울시에서 활동보조서비스 시간판정이 나오기 전에 활동보조 시간 때문에 고생을 좀 했죠. 그래도 송파구에서 활동보조서비스 지원금이 나와서 지역사회로 나오자마자 이튿날부터 구비로만 활동보조 100시간을 받았죠. 이후 복지부와 서울시 활동보조시간까지 합쳐 330시간 받았지만 활동보조인을 잘못 만나서 고생을 좀 했어요. 혼자 사니까 제가 소변 줄기를 차고 있는데 그게 막히면 죽어요. 그런데 관리를 잘 못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돌아갈까라는 생각도 잠시 들었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활동보조인을 새로 구했죠. 지금은 새로 오신 활동보조인이 잘하고 있어요. 오전, 오후 두 명이 활동보조를 해요. 현재는 활동보조시간도 한달에 380시간까지 받게 되었고…. 그렇게 사니깐 괜찮더라고요.”

내 삶을 기록한다, 자립은 이제부터!

활동보조문제가 해결되자 송용헌 씨는 지역사회에서 쉽게 적응했다. 무엇보다도 시설의 삶과 지역사회의 삶은 질적으로 달랐다. 자연스럽게 활동의 폭이 넓어졌다. 외출 역시도 시설과 비교되지 않게 자유로웠다. 집 부근의 성당에 다니며 지역사회 내에 종교인들과 인연을 맺었으며 폭 넓은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지금은 잘 나왔다고 생각해요. 시설하고 비교가 안 되니까요. 무엇보다도 활동영역이 넓어졌으니까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게 됐고…. 꽃동네에서도 할 수 있지만 골짜기라 차도 일주일 2주 전에 예약을 해야 했거든요. 차도 한 대 밖에 없고, 직원과 함께 나가야 하는데 직원도 부족하고 하니까…. 잘 외출이 어려웠어요. 여기서는 뭐 아무런 제약이 없어요.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수급비 받고 저는 교통공단에서도 돈이 나오기 때문에 지금은 저축하고 살아요.”

현재 송용헌씨는 장애인인권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중증장애인의 권리 확보를 위한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함께 하고 있고, 사고를 당하기 전에 사귄 이들과 모두 연락이 끊겼지만 지금은 장애인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고 활발한 교류를 나누고 있다.

“꽃동네에서도 시설 안 폭력을 없애기 위해 노력 했지만 지역사회로 나와서 더욱 적극적으로 하게 됐죠. 하지 않으면 세상을 못바꾸니까요. 광화문도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서명운동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씩 가고 있어요. 내가 시설에서 나오던 해 ‘이음여행’(시설장애인과 탈시설장애인이 만나 자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워크숍)에 참여해 영상을 봤어요. 그 영상을 보면서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에 내려가 점거하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각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설치를 요구하던 투쟁 모습과 활동보조서비스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한강대교를 기며 처절하게 싸우는 내용이었죠. 그걸 보면서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됐죠.”

중도장애인으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죽음만을 갈망했던 그였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시설에서 다시 지역사회로 돌아와 자기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제 지역에서 완전히 자리잡은 그는 다시 시설로 되돌아갈 마음은 죽어도 없다고 이야기한다.

장애인운동을 활발히 펼치며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면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해나가는 송용헌씨. 그의 자립생활은 이제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이다. 그렇게 송 씨는 자신의 삶에 대해 모든 것을 천천히 기록해 나가는 중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인터뷰 후기

송용헌 씨를 인터뷰 대상자로 선택한 것은 그가 글을 쓴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궁금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시설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와 만나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불행했던 가정, 첫사랑, 교통사고, 종교, 시설 생활, 그리고 지역사회 활동 등 그의 전반적인 인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병원 생활이야기가 인상에 남았다. 사고를 당하고 돌연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지만 그의 곁은 지켜줄 이 하나 없었다. 간병인을 고용할 돈도 없어 후원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그였다. 살은 썩어갔고 주변에서는 송 씨 곁에 다가가면 썩은 냄새가 난다고 고통을 호소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죽음이었는데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자 그는 다시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인터뷰 후에 고 김주영 활동가의 장례식에서, 추모식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광화문 농성장에서도… 그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살아내고 있다. 다시 이 곳에서 말이다.

글 김다연 장애인인터넷 신문 비마이너 기자

펴낸 곳 서울시시설장애인자립생활지원네트워크
글쓴이 강혜민, 김다연, 김원호, 노규호, 송효정, 여준민, 이승현, 이은영, 최성규, 최영선, 홍권호
사진 고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