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위, 본격 활동 나서기 위한 ‘피해자 증언 대회’ 열어

▲ 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지난 10일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어 사건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진상 규명에 나섰다.
▲ 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10일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어 사건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진상 규명에 나섰다.

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준)가 10일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어 사건이 끝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재조명하고 나섰다.

이 사건은 1987년 형제복지원 수용자 한 사람이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돼 폭행으로 사망했고, 이에 35인이 집단 탈출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형제복지원에서 9세의 어린이로 입소됐던 한종선 씨가 약 30년 전에 겪었던 상황을 책으로 쓰기도 했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매년 국가로부터 20억 원의 지원을 받는 전국 최대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랑인은 너저분한 옷차림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 등 뚜렷한 근거는 없다.

형제복지원 원장이었던 박인근 씨는 부랑인 선도를 명목으로 사람들을 감금하고 강제 노역을 시키며, 저항하면 굶기거나 폭행하는 등 인권을 유린했다. 이 과정에서 12년 동안 513인이 사망했다.

피해자 증언에 따르면, 사망 원인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복지원 인근에 암매장 되거나 각 의과대학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리는 일도 있었다.

1960년대는 법적 근거 없이 부랑인에 대한 강제 수용이 가능했고, 노역에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 아래 1975년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조치 및 사후 관리에 관한 업무지침’(1975.12.15.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의거,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당시 검찰 내부, 청와대, 부산시는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사건을 축소, 은폐시켰고 고등법원에서는 2차례나 특수감금죄를 인정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2번 모두 특수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원생들에게 대한 불법구금, 폭행, 사망 등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1987년 6월 징역 10년 형과 벌금 6억8,178만 원을 선고받았으나 1987년 11월 1차 항소심에서 벌금형이 사라진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다음 해 7월 2차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989년 3월 3차 항소심에서 2년 6개월로 형이 확정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됐고, 박 원장은 형기를 나와 다시 이름만 바꾼 채  형제복지원, 재육원, 욥의 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 등 26년째 사회복지법인을 계속 운영해오고 있다.

반면,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신적․경제적 어려움으로 평범한 일상은 꿈 꾸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피해자 증언에 앞서 한종선 씨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그 당시는 혼자였으나 지금은 함께 증언해 주는 분들이 있는 것에 감사하다. 이렇게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도와주신 인권활동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앞으로 어떤 일들이 진행될지는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의 문제가 고쳐지길 바란다.”며 격려했다.

이어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준비대책위원회 선두에 선 강경선 교수는 “과거 내용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올해 2월 즈음 문제를 풀어보고, 현재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모였다. 이미 학술대회도 성황을 이뤘고, 다양한 분야에서 노력이 더해지고 있다.”며 “작년 11월 정도 모여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 끝까지 가서 성과를 얻자.”며 힘을 언얹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 시작은 형제복지원이었다”

형제복지원에 어떤 상황에서 입소하게 됐는가

▲ 형제복지원 피해자 오민철 씨
▲ 형제복지원 피해자 오민철 씨

오민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이 자리에 나온 것도 많은 고민이 있었다. 나와서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두렵기도 하고, 많은 분들과 얘기를 나눠보는 게 평생 처음이다. 형제복지원 처음 들어간 계기는...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제주도로 내려갔지만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는 학교에 적응을 못 했던 터라 형을 만나려고 부산에 왔다. 당시 1984년 14세, 부산역 벤치에 앉아있는데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와보라고 해서 갔더니, 한 열 명쯤 앉아 있더라. 버스에 타라고 해서 탔는데 무서워서 도망갈 엄두도 못 냈다. 왜 들어가게 됐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아무런 이유 없이 2년 반을 생활했다.

양세환: 그때는 양세원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12세때 입소했다. 부산역 앞 팔각정에서 연 날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누가 나를 잡았다. 당시 집을 나와 청량리에서 도둑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구걸도 하다가 가끔 부산역 벤치에서 잠도 자곤 했다. 하필이면 그 해에 단속이 가장 심했다. 하루는 늦은 밤 벤치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남자 두 명이 와서는 벤치 위에 있는 남자를 잡아가더라. 순간 겁이 나서 저 아저씨들처럼 잡혀 가지 않을까 조심했다. 문제는 다음 날. 연을 날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날 잡았다. 그 사람들이 팔각정 옆에 있는 보호소 같은 곳에 감금 아닌 감금을 했고. 내게 ‘너는 부모도 없고, 갈 곳도 없지 않으냐, 아버지에게 연락해봐’라고 물었지만 연락할 곳이 없었다.

이상철: 형편 때문에 호적 상 고아로 자랐다. 때문에 출가를 했었고, 그 과정에서 부산에 있는 범어사로 갔다. 하지만 당시 시대가 어수선했고, 다시 처음 출가했던 장소인 강원도로 가야겠다고 짐을 쌌다. 그 날이 형제복지원에 가게 된 날. 부산에서 강원도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는데 하루에 한 대, 아침에 있더라.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하루 부산역에서 지내고 아침 기차로 가려고 하는데, 어떤 형님이 와서 ‘여기 있으면 위험하다. 끌려갈 수 있으니 파출소로 가라’고 했다. 파출소에서 저녁 8시쯤까지 그 형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순경인지 경장인지 와서 ‘태워 보내라’고 했다. 형님이 만류했으나 귀찮은지 그냥 태워보내라고 지시했는데, 그게 형제복지원 차였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잇기 고통스러워 보인다. 당시 생활은 어떠했는가?

오민철: 당시 아동이어서 어른들 생활은 모르겠지만 아동의 경우는 교육적 프로그램은 없었고, 하루하루 아무 의미 없는 생활을 했다. 자고 일어나고를 반복했다. 그 안에는 기합, 운동 등이 있었다. 참 거기 생활은 지금 생각하면 인간이 해서는 안될 짓이다. 내가 죄를 지어서 들어간 것도 아니고.. (말을 잊지 못 했다)

▲ 형제복지원 피해자 양세환 씨
▲ 형제복지원 피해자 양세환 씨

양세환: 그곳에는 갓난아기부터 노인, 장애인까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부랑인으로 강제 수용됐다, 실상 길을 가다, 공원에서, 부산역에서 아무 죄 없이 끌려온 무고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는 28소대로 보내졌는데 도망가다 잡히니까 마구 구타했다. 일주일에 4일 정도를 맞았는데 심지어 깍지를 끼고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어린 나이였지만 30분을 시키더라.형제복지원은 음식조차 엉망이었다. 반찬들은 소금에 흠뻑 절어있었고, 남이 먹다 버린 생선 뼈다귀를 가마솥에 넣고 썩은 내가 진동할 때까지 삭히다가 된장을 발라 젓갈로 준다. 

사실 그곳의 담장은 4m가 넘었지만 탈출하고자 함이 간절하게 만들었다. 3,500여 명의 인원들 중 탈출한 사람은 고작 200명도 안됐다. 하지만 늘 시도했다. 맞기도 싫고, 갇힌 삶이 너무 싫었다. 꿈도 있었고, 먹고 싶은 것들도 많았기에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형제원 사건은 두 번다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사건이다. 다시는 형제복지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일어나게 되면 사법처리 말고. 그들이 한 행위가 사회 전체에 발각이 되길 바란다.

▲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상철 씨
▲ 형제복지원 피해자 이상철 씨

이상철: 그곳의 생활은 식사에서 굼벵이가 나오는 등 비인권적인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더구나 남김없이 먹어야 했다. 칫솔도 한 칫솔로 50여 명이 닦았다. 그런 환경 속에 있었다. 전염병도 돌고... 나는 의무 소대에 배치 받아서 생활했다. 의무 소대라고 해도 의사나 간호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소대장도 원생인데 소대장이 청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맥박을 쥐고, 주사도 놓고 다했다. 내가 주로 했던 일은 입원실을 청소하거나 사람들 수발드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관을 옮겨다 놓는 일이었다. 베니어합판으로 만든 관이었는데 워낙 얇고 가벼워서 하루에 한두 개는 혼자 옮겼다. 죽은 사람은 본 적이 없는데, 관을 목공소에서 가져와 사무실 앞에 가져다 놓으면 원생들이 처리했다. 참 이상한 건, 입원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죽은 사람을 본적이 없다는 것.시체가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더라. 악몽 같은 생활이었다. 과거가 늘 완벽하지는 못해도 잘못이 있으면 현재 와서 되새겨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러운 과거는 청산하고, 또다시 되풀이하지 않아야

이 같은 피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인권 전문가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과거사위원회을 비롯한 8개 단체는 형제복지원사건진실규명 준비위원회를 끝내고, 준비위원회의 마지막 활동으로 다음 주 중 본격적인 대책위원회를 꾸릴 예정이다.

또한 다음 달에는 대책위 발족 후, 특별법안을 마련해 내부 간담회를 거쳐 입법 발의할 계획을 밝혔다.

상지대학교 법학과 김명연 교수는 “88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으로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렸던 날, 오늘날 대한민국 있게 했던 날, 그 이면에는 거리에서 말끔하게 청소됐던 피해자들이 있다. 진실을 규명해서 피해자들은 사과를 받고,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며 강조했다.

이어 김 교수는 “오늘날 사회복지시설에 있는 인권침해에 대해 국가는 한 번도 책임지지 않았다.”며 “반드시 국가에 책임을 물을 것이다. 더불어 단순히 정당한 보상뿐 아니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반복들을 막아내고 역사적 의의를 발견해 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끝으로 “11월에 모든 학자들이 모두 모여서 학술적인 규명 작업에 들어가면, 적어도 형제복지원과 관련된 것들은 어느 정도 정리돼 나올 것이다. 앞으로의 행보도 밝아 보인다.”라고 예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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