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네에서 탈시설한 권오진 씨 인터뷰

▲ 민들레장애인야학의 권오진 씨는 꽃동네를 ‘지옥’이라고 이야기한다.
▲ 권오진 씨는 꽃동네를 ‘지옥’이라고 이야기한다.
“꽃동네는 이름만 ‘꽃동네’고 두 얼굴을 갖고 있어요. 장애인들이 살만한 시설도 아니고, 그 오 신부(예수의꽃동네유지재단 오웅진 이사장)도 횡령 같은 것 했다고 나오고… 꽃동네는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굉장히 긍정적이고 어떤 이는 ‘성공적인 시설’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이는 정말 실상을 모르는 이야기죠. 만약 교황이 꽃동네의 실상을 안다면…” 

오는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꽃동네(충청북도 음성 소재)에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축제’라고 이야기하며 교황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지만, 9년간 꽃동네(경기도 가평 소재)에서 지내던 권오진 씨의 입장은 달랐다. 권 씨는 꽃동네의 실상을 알면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민들레장애인야간학교에 다니고 있는 권 씨는 그의 나이 25세에 뺑소니사고를 당했다. 권 씨가 고속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중, 옆 차선에 있던 자동차가 갑자기 차선을 침범했다. 권 씨는 이를 피하려고 방향을 급히 돌렸고, 그대로 철책에 곤두박질쳤다.

권 씨는 4·5·7번 척추를 크게 다쳤고, 왼쪽 무릎도 손상돼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이 사고로 권 씨는 척수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권 씨는 당시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새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있는 상태였는데, 권 씨가 27세가 되던 1998년 새어머니는 권 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던 권 씨는 2003년경  주변에서 ‘꽃동네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꽃동네 입소를 선택했다.

하지만 밖에서 ‘좋다’고 이야기하는 꽃동네와 안에서 겪는 꽃동네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제가 꽃동네 들어가기 전에 정신병원에 있었거든요. 그곳 하루하루도 정말 지옥이었어요. 주변에서 꽃동네가 좋다길래 (정신병원을) 나와서 꽃동네에 갔는데… 그래도 정신병원은 주치의들한테 답답하다고 산책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보내주고 그랬어요. 꽃동네는 그런 게 없었죠. 산책 한 번 가려고 하면 직원들 눈치나 봐야하고…”

권 씨는 꽃동네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자유 박탈’이었다고 말했다. 면회가 가능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꽃동네측은 ‘다른 거주인들은 면회 오는 방문자가 없는데 혼자 방문자가 자주 오는 것은 좀 그렇지 않냐’며 제한했다.

권 씨에 따르면 가평에 소재한 꽃동네는 당시 모두 4층으로 운영됐고, 한 층당 100여 명의 거주인과 20여 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이는 직원 1인이 5인의 거주인을 ‘관리’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야간에는 직원 2인 정도만 남아, 1인이 50인을 맡는 꼴이었다. 이는 방임·방치와 다를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직원들은 많은 거주인들을 세심하게 신경쓰지 못했습니다. 씻는 것은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비누로 온몸을 ‘쓱싹’ 하는 게 다였어요. 거주인이 너무 많으니까 2주만에 씻는 거주인들도 있었어요. 양치질도 하루에 두 번하고 못 할 때도 있고… 거주인 모두 깨끗하게 씻고, 직원들이 청소를 깔끔하게 할 때는 거주인의 부모님이 오시거나, 후원차 방문이 있을 때뿐이었어요.”

꽃동네는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곳으로, 종교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권 씨는 종교가 없음에도 매일 아침 7시와 저녁 6시, 40분씩 예배에 참석해야만 했다고 했다. 꽃동네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권 씨도 ‘여기에 있는한 자신의 선택과 상관 없이 예배에 참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종교활동을 제외하고나면 권 씨는 식사하는 것과 누워있는 것이 활동의 전부였다. 서예와 같은 교육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중증장애가 있는 권 씨와 같은 경우는 대상에서 ‘열외’였다. 권 씨를 비롯한 다른 중증장애 거주인들은 먹고 잠자는 것, 같은 처지에 있는 거주인과 대화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너무 답답해서 직원들에게 태워달라고(산책을 나가자고) 하면 ‘시간이 없다’ 등의 핑계를 대며 거부했습니다, 한 번은 직원들이 그렇게 거절하고 무엇을 하러가나 봤더니, 세면장에서 자기들끼리 담배를 태우고 있더군요. 크게 뭐라고 할 순 없었습니다. 직원들과 마찰을 빚어 기분이라도 상하게 하면, 몇 번 하지도 않는 외출마저 아예 시켜주지 않았거든요.”

그래도 권 씨는 참고  또 참으며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소통이 어려운 장애인들과 힘 없는 노인들에게 가해지는 ‘폭행’과 ‘폭언’을 목격하면서, 그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노인들 같은 경우, 늦은 밤에 신변처리를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직원들은 그것을 치울 때마다 ‘아, 이 할아버지 또 쌌네’라고 말하기도 하고, 밀치거나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랬어요. 너무 화가 나서 바로 원장에게 가서 말했지만, 원장은 ‘내가 직접 듣고 보지 않은 이상 믿지 않겠다’고 말하더군요. 굴하지 않고 계속 문제를 제기했더니 나중에는 ‘짜증이 난다’고 까지 하고요… 나중에 원장이 폭행한 직원 당사자에게 사실 여부를 묻자, 직원은 ‘신변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러지 말라며 툭툭 건드렸을 뿐’이라고 답하더군요.”

직원들의 폭력과 원장의 방관에 거주인들은 피해를 봐도 숨기는 경우가 많았다. 권 씨는 한 거주인의 팔이 부러진 이유를 물었지만, 해당 거주인은 ‘목욕침대’가 넘여져서 그렇다고 우겼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그 거주인은 ‘직원이 때려서 부러졌지만, 소문이 날까봐 숨겼다’고 조심스레 털어놨다는 것.

권 씨는 점점 직원들과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다. 자신에게 ‘그 어떤 자유’도 없다는 것에, 꽃동네 입소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진심으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가면 ‘혼자’가 된다는 두려움과 막막함에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권 씨는 알고 지내던 사람이 인천민들레장애인야간학교의 도움으로 ‘탈시설’ 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권 씨에게도 ‘나갈 수 있다, 나가야 한다’는 굳은 결심이 섰다.

권 씨가 퇴소절차를 밟던 2011년 5월 10일, 원장은 ‘나가서 혼자 무엇을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며 그의 결심을 꺾으려 했다. 권 씨는 ‘죽어도 나가서 죽겠다’고 외쳤다.

“너무 힘들었어요. 정말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어요.”

권 씨는 잠시 꽃동네에서의 생활을 되돌아보는 듯 긴 시간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름만으로는 봄처럼 따뜻할 것 같았던 꽃동네, 권 씨는 ‘그 안에서 있었던 기억들은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권 씨는 현재 아는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인천광역시에서 지원하는 전세임대주택을 신청·선정된 상태로, 내년쯤이면 자립생활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며 부푼 기대를 드러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정말 만족스럽고 행복합니다. 진짜 죽었다 깨어나도 시설에는 가기 싫어요. 다시는 시설에 안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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