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기획 인터뷰①-김민석 씨

김민석(가명, 47) 씨는 경상북도에서 서비스업을 하고 있다. ‘길게 생각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그는 최근 누리소통망을 통해 형제복지원에 대한 경험과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김 씨는 1983년부터 1987년까지 형제복지원에서 지냈다. 그는 형제복지원의 여러 소대를 옮겨 다녔고, 대부분 소지(소대장 1인-서무 1인-조장 2인-소지 2인)로 일했다. 이 때문인지 김 씨는 자신이 기억하는 형제복지원을 보다 구체화 하고자 했다.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진상규명 활동을 돕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김 씨가 형제복지원에 있던 때는 형제복지원의 건물이 완공되고, 내부 체제 또한 촘촘히 갖춰진 뒤다.

‘지금이니까 웃으며 이야기한다’는 김 씨는 차분하고 침착하게, 1년 전에야 부인에게 털어놓았던 형제복지원 이야기를 전했다.

경찰은 청소년을 형제복지원에 보냈다

김 씨는 3세 때 입양돼 부산시에서 살았다. 1983년, 15세 때 양모(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엄궁파출소에 간 것이 형제복지원으로 들어가게 된 계기였다.

“억수로 집이 잘 살았거든. 잘 사는 정도가 아니고 엄청 잘 살았어. 어느 날 갑자기 낮에 두 시? 세 시쯤 됐을 기야. 장래가 걱정되기도 하고, 눈엣가시였겠지. 대가리는 커가고, 애가 겁도 없고 이러니까. 형제복지원에 있을 때 호적에서 파였다는 것을 알았거든. 입양 됐다는 것은 형제복지원 나온 뒤에 알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파양이 목적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김 씨는 파출소에 넘겨졌다. 이윽고 경찰 손에 이끌려 경찰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형제복지원이었다.

“(형제복지원이 아닌) 소년들이 가는 데가 있었단 말입니다. 저그들은 (형제복지원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 나이에 빽차를 탔는데 무슨 말이 귀에 들어왔겠습니까? 공포스러웠지. ‘조금만 가 있으면 너그 아버지가 데리러 온단다’ 그 말 뿐이었지. 엄궁파출소에서 가면 10분~15분 거리야. 정문 말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어. 정문으로 안 들어가고 마 그냥 그로 들어가뻐리대. 공권력 없었다 하는데 그건 아니라. 내가 빽차 타고 갔는데… ….
사무실에 몇 시간 있었던 걸로 기억해. 동사무소 분위기였으니까. 좀 이따 누가 불러가지고 이름 적고. 나는 수용자 카드에 ‘부모 의뢰’ 이래 돼 있을 기야. 내가 그걸 봤거든. 본 기억이 나.”

▲ 김민식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경험·목격한 소대의 특징을 정리하고 있다. ⓒ복지TV 한종수 PD
▲ 김민식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경험·목격한 소대의 특징을 정리하고 있다. ⓒ복지TV 한종수 PD
김 씨는 첫 날 신입 소대로 옮겨졌다. 형제복지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거치는 임시 거소로, 끌려올 때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신입 소대에는 하루 평균 60인 정도가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거나, 사라지거나, 다른 소대로 배치되는 사람이 있어도 정원은 줄지 않았다. 어린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끌려왔으며, 하루 20인씩 끌려오는 때도 있었다.

신입 소대에 머무는 시간은 일주일에서 열흘. 그동안 끌려온 사람들은 예배, 식사, ‘탄생(박인근을 미화하고 노숙인 등을 나쁘게 그린 영화)’과 ‘종점에서 시발점으로(1981년 제작된 형제복지원 홍보영상-보건사회부제작, 부산시 후원)’ 및 박인근 원장이 상 받는 모습이 담긴 영상 시청을 반복해야 했다.

형제복지원은 신입 소대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쓰도록 했다. 열흘이 지나도록 가족이 찾지 않으면 다른 소대로 배치되는 방식이었다.
‘언제 나갈지 모르는’ 임시 거소였어도 형제복지원 안에 들어온 이상 가혹한 폭력의 대상이었다. 가족이 찾아오지 않았는데 사라지거나, 다쳐서 열흘을 채우기 전에 다른 소대로 보내지는 경우도 많았다.

들어가서 나갈 때까지 폭력이 멈추지 않는 곳

“하룻밤 지나고 나니까 몽둥이로 맞는 사람 있고, 막 두들겨 맞고 이러니까. 어른 같은 경우 저항을 많이 하지. 그러면 그냥 죽는 기라. 되게 맞아서 대가리 깨지고 나간 사람도 있었어. 그때는 어디 갔는지 모르는데, 뭐 그 사람이 집으로 갔겠습니까? 안 보이면 죽은 거지. 좀 심하다 싶으면 장애인 소대 보내뿔고, 조기 소대 배치가 돼 버리는 거야.
반항도 할 여력이 없지. 밥 먹으러 가거나 이러면 참 심각했지. 그냥 ‘집합’ 소리만 나오면 다 뛰 가야 돼. 줄 틀어져도 안 되고, 한마디로 말 안 들으면 몽둥이 들었으니까. 줄 잘못 섰다고 맞아서 머리가 깨졌지. 말 들으라고 본보기지. 다른 소대 배치될 때까지 (치료 없이 그대로) 뒀을 기야. 며칠 되니까 어린애들은 거의 다 피부병 걸렸지. 환경이 안 좋으니까.”

김 씨도 신입 소대 안에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썼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말 운이 좋은 몇몇 사람’의 경우였다. 김 씨는 밤마다 기대와 공포가 함께 엄습했다고 떠올렸다. 김 씨가 형제복지원에 있으면서 피눈물을 흘렸던 가장 슬픈 날들이었다.

“‘데리러 와 달라, 반성 했으니까 데리러 와 달라’고 그랬지. 열흘이 지나도록 안 오고 이래 하니까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는 거야. 밤에 잠이 안 오지. 혹시나 데리러 올까 하는 기대, 일단은 무섭고. 잠이 올 리가 있겠습니까. 그때 당시 애는 내뿐이 없었던 것 같아. 그 분위기에 젖어서 (다른 사람들과) 무슨 이야기를 해. 어른들끼리 ‘빨리 나가야 된다’, ‘집에 편지가 도착 안 했을까? 그래도 대한민국인데’ 그러면서 전부 기다리는 거지.”

결국 김 씨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만 죽지 않았다는 것, 그뿐이었다.
열흘이 지나 중대장은 신입 소대 사람들을 시·청각교육장으로 불러 모았고, 각각 다른 소대로 옮겨졌다. 김 씨는 신입 소대 소대장의 지목을 받아 신입 소대 소지가 됐다.
신입 소대 소지가 주로 하는 일은 시·청각교육장과 방을 치우는 것. 김 씨는 누군가 맞아 흘린 핏자국도 닦았다고 했다.

그렇게 보내기를 약 두 달, 김 씨는 첫 도망을 결심했다.

“소지가 내 하고 하나 더 있었으니까. 소지인 애 하고 같이 도망가자고 했지. 그냥 도망가자. 신입 소대 저쪽 끝에서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열렸나 닫혔나 볼 수가 있거든. 나는 거기가 경비가 없는 줄 알았어. 신입 소대에서 불과 70~80미터 될 기야. 뛰는데 거기서 막 몽둥이 들고 뛰어나오는 기야. 잡혔는데 ‘뭐 됐다’.
중대장실 끌려가는 거지. 중대장이 김○○, 같은 남자라도 주먹이 센 사람 있잖아. 한 대 맞으면 ‘뻥’ 하는 사람. 중대장이 그런 사람이었어. 그때 당시에 문신이 있었어. 팔에 여자 문신하고 등에 뭐가 있었어. 엎드려뻗쳐서 허벅지 다섯 대 맞았는데. 야, 다섯 대 맞았는데 허벅지 피가 터집니다.”

형제복지원을 나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이 위치한 곳이 산속이었으며, 선도 및 경비가 형제복지원 주변을 ‘철벽’같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

김 씨는 다시 신입 소대에 머물다가 10소대(당시 청소년 소대, 나중에 검정고시반으로 바뀜)에 배치됐다. 10소대에 들어간 첫 날, 이유 없는 폭력이 날아들었다. 맞고 난 뒤 몸이 아파 움직임이 느린 것도 맞아야 하는 이유였다. 김 씨는 ‘그저 동작이 빨라질 때까지 두들겨 맞았다’고 설명했다.

10소대에서 6개월, 김 씨는 다시 도망에 실패해 2소대(청소년 소대)에서 일주일을 보내다가 의무실로 보내졌다.

“먼저 가 있던 애들 하는 것 보고 따라하는 거지. 치료하는 거는 탈지면에 소독약 뿌려서 닦아주고 연고 발라주고 감아주면 그만이다. 유황 연고, 아카찡키(포비돈-아이오딘 종류) 같은 거 발라주고. 먹는 약은 테라마이신이라고 항생제 주고. 제대로 된 치료가 없다고 보면 된다니까. 주사도 불법이고 치료도 불법이고.
아침 9시부터 오후 5~6시 점호 때까지, 하루 한 300인 왔었다. 거의 피부병. 여름에는 피부병, 겨울에는 동상. 꿰매야 할 상태까지 온 사람은 15~16인 됐겠지. 어디서 다쳤겠노. 놀다가 다쳤겠어요?”

장애인 소대는 ‘죽는 날만 기다리는 지옥’이었다

김 씨는 의무실에 있는 동안 정신질환자 소대(정신질환자 수용소)와 장애인 소대(장애인 수용소) 상황을 직접 봤다. 이른바 외래 진료 같은 것이었다. 의무실이 위치한 건물은 A동, 정신질환자 소대와 장애인 소대 건물은 각각 B동과 C동이었다.

각 소대에 따라 차림새도 달랐다. 일반 소대 사람들과 장애인 소대 사람들은 파란색 운동복, 정신질환자 소대 사람들은 흰색 가운을 입었다.

김 씨는 B동에서는 약 냄새가, C동에서는 썩은 냄새가 났다고 기억했다.
특히 장애인 소대는 ‘죽으라고 놔두는 곳’이라고 표현했다. 어느 날 가보면 침대에 있던 사람이 이불·베개·수건과 함께 사라져 있던 곳. 대다수가 탈장과 욕창이나 피부병에 시달렸던 곳, 여성장애인들이 임신으로 배가 나온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 곳이었다.

“3층 건물인데 한 층에 방이 열두 개에서 열네 개였던 것 같아. 한 방에 침대 열두 개. 거기도 소대장이 있고 소지가 있었어. 소지도 장애인이다. 장애유형 구분 없이 다 한 소대에 있는데, 발달장애인이 많았다.
자기 스스로 밥을 먹으러 찾아와도 줄을 설 줄 모르잖아. 누가 도와주지도 않고 그래 있으면 밥을 못 먹는 기라. 질서를 안 지키니까 사람들이 ‘그냥 가라’고 그런 식으로 하고. 누가 나오느냔 말이야. 소지가 갖다 주긴 하는데 소지도 장애인이어서 자기도 못 챙겨 먹는데 챙겨주겠느냐 말이지. 대소변을 누가 봐주느냐 말이다. 더러우면 더럽다고 난리고.”

김 씨는 장애인 소대에서 친구의 사촌과 마주치기도 했다. 지금은 김 씨의 친구도 사촌의 안부를 알지 못하는 상태다. 김 씨는 폐쇄됐을 때 나오지 않았으면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바라봤다.

일반 소대 중에는 폐질환자들이 수용된 곳도 있었는데, 김 씨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가 한꺼번에 사라져 텅텅 비어있기를 반복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숨이 꼴딱꼴딱할 때는 각 소대장이 의무실에 연락해. ‘사망자 몇 명’ 이렇게 의무실에서 사무실로 보고하거든. 그건 내가 작성 안 해서 (사망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해부실습용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는 (실제) 있을 수 있어.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디로 갔느냐 말이다. 의무실에 국산 연고가 하나도 없었거든, 그런 물품은 어디서 받는지 몰라.”

김 씨는 의무실에서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뭣도 모를 나이고 개념이 없는 나이니까, 피부병이 걸렸다한들 내가 과연 정성스럽게 약을 발라줬느냐 말이다. 나는 정성스럽게 안 발라줬다고 생각하거든. C동은 냄새가 역겨우니까 빨리 나오고 싶고.”라는 말을 반복했다.
평범한 어린이의 태도에 불과했지만, 그는 회의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원망스러웠던 점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김 씨는 “나보다 어린 아이들이 왔을 때 약을 더 발라주고 싶은데, 딱 요만큼만 줘라 해서 약을 함부로 돌리도 못하고 그랬던 게 많이 원망스러웠다.”고 답했다. 그는 “종선(‘살아남은 아이’ 지은이)이도 그때쯤 나이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의무실에서 1년 정도 있다가 3소대(청소년 소대)로 보내졌다. 의무반장의 성폭행이 원인이었다. 김 씨는 피해자였고, 해당 사실을 중대장에게 알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근신’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의무실에 있던 다른 사람도, 얼굴이 예쁘장한 어린이라면 누구나 성폭행의 대상이었다는 것.

▲ 김민석 씨가 연락하고 있는 다른 피해자와 함께 기억·정리한 형제복지원의 부대 및 특징.
▲ 김민석 씨가 연락하고 있는 다른 피해자와 함께 기억·정리한 형제복지원의 부대 및 특징.
아기들은 해외로 ‘무더기 입양’

형제복지원에는 아기들도 있었다. 김 씨의 기억에 따르면, 박인근 원장 사택 바로 옆에 유아 소대가 있었다. 한 방에 많을 때는 100인도 있었는데, 그곳도 ‘가득 찼다 텅텅 비어버리는 방’ 중 하나였다.

“2~3개월 지나면 가득 차 있다가 또 훅 사라지고. 내가 서류 적고, 입양사진 찍고, 팻말 적고, 옷 입히고 했다니까. 그때 내가 본 게 ○○○○복지회 였어요. 거기 진짜 추적하면 형제복지원에서 많이 나갔어. 사무실에서 초코파이 주고 하니까 나는 그 재미에 그 작업을 했거든. ‘양아버지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선물 잘 받았습니다’ 대필했어. 뭐 어디서 외국인이 왔다고 해서 입구에서 흰색 옷 입고 합창했다고 하는 증언이 맞아, 진짜 그랬어.”

귀가조치 뒤 또다시 형제복지원으로… ‘인민재판’과 ‘낙인’

정확하지는 않지만 3소대에서 3~4개월, 4소대에서 5~6개월을 보낸 1985년 어느 날, 김 씨의 양부(아버지)가 형제복지원을 찾아왔다. ‘귀가조치’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이미 호적이 정리된 상태였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입양 됐다는 사실을 몰랐던 김 씨는 배신감에 집을 나왔다.

김 씨는 형제복지원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았다. 1만 원 열 장, 10만 원 아홉 장, 술 한 병을 들고 무작정 집을 떠났다. 짜장면 한 그릇에 250~300원 하던 시절, 김 씨는 그저 잘 먹고 잘 입고 다닌다면 생각에 단속을 피할 장소를 찾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때는 통금이 있었던 것 같아. 방을 잡든가 해야 하는데 나이가 어리니까 돈 쓸 줄을 몰라서. 우연히 형제복지원에서 도망친 여자애를 만나 복계천 다리 밑에 있었지. 경찰들이 단속을 나왔는가봐. 부전일파라고 또 파출소로 갔다.
원래 다음날 풀어줘야 하는 데, 또 형제복지원으로 잡혀갔어. 이제 아무 생각 없지. ‘또 가는갑다’ 그렇게 생각했지. 형제복지원차가 오면 파출소 앞에 딱 대놓으면 경찰들이 양쪽에 두 명 서 있고, 사람들이 몽둥이 들고 서있는데 도망간다는 건 말도 안 되고.”

김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도망친 여자아이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잡혀 들어갔고, 박인근의 주최 아래 이뤄지는 이른바 ‘인민재판’을 받았다. 인민재판은 찬송가와 복음성가, 기도와 설교, 이어 ‘아멘’이라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 앉으면 박인근의 말이 시작되는 방식이었다.

“박인근이 ‘쪼깬한 것들이 도망갔다 잡혀오고 집에 보내놨더니 잡혀오고 인간도 안 되는 새끼들’ 이래 하면서 욕도 들어먹고, 중대장이 밖에 데리고 나와서 줘 때리고. 6소대(근신소대)로 갔지. 6소대 소대장은 인상이 참 더럽거든요. 그 사람도 폭력전과 뭐 그러는데 험악한 사람들 모였으니까 유하게 안 다뤄. 누가 유리 깨서 목에 자해하는 것도 봤고 그랬거든.
거기는 한여름에 미국 군복 입고 똥 푸러 다니고. 나는 똥은 안 퍼고 댕겼는데 군복 입고, 군화 신고, 포대에 ‘나는 도망갔다 잡혀왔습니다’ 이래 적힌 거 입고, 아침 9시부터 형제복지원 그 넓은 데를 계속 도는 거야. 점심 때 쉬고 빵 하나 콩국 하나 먹고 또 돌고, 한 시부터 세 시까지 돌고.”

김 씨는 6소대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9소대(원생 소대, 장기 수용자)에 머물렀다가 13소대(합창단 소대, 악대부)로 옮겨졌다. 9소대에 있는 김 씨의 또래 중에는 박인근 원장의 호적에 등록 돼 있는 경우도 많았다. 13소대에서는 성가대에서 피아노를 치는 박인근의 딸들을 가까이서 봤다고 떠올리기도 했다.

몇 개월 뒤 김 씨는 14소대(목욕탕 소대)에 배치됐다. 다른 소대는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고, 목욕은 한 달에 한두 번 이뤄졌다. 때문에 14소대에서 일하는 사람은 평소 목욕탕을 청소하면서 목욕할 수 있는 것조차 특별한 운이었다.

“목욕시간이 딱 한 시간, 50분 줘. 한 번에 60~70인이 들어가지요. 늦게 나오면 두들겨 맞는 기야. 여자 소대 목욕해도 다 감시하고, 장애인 소대 목욕할 때는 도와주는 사람 없어. 스스로 씻고 나와야지. 장애인 소대는 진짜 말로 내가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하다.”

‘새마음 교회’ 노동 착취…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과 함께 사회로 나오다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새마음 교회 축대 무너지는 바람에 돌 깨는 석공 3인, 중대장하고 같이 딱 붙어있는 특공대 10인이다. 흙 나르고, 일일이 손으로 돌 깨다가 축대 복구하는 거야. 뭐 통장 만들어서 나중에 준다 그랬는데 안 줘. 받은 사람 없을 기야. 그때 5소대(외부출력 소대) 갔었어. 나는 항시 중대장 주위에 늘 붙어 있었어. 늘 도망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겨울에는 추워서 불피우고 겨울잠 자는 뱀 같은 거 껍데기 벗겨서 깡통에 꿔 먹고, 먹을 게 없으니까 지네 그런 것도 머리 잡아서 침 이런 거 뽑고 돌돌 말아서 집어넣었지. 다쳐도 보상이 없어. 그런데도 5소대는 나름 편한 소대야. 교회 안 가도 되거든. 교회 가는 것만큼 싫은 것도 없거든.”

김 씨는 5소대에서 중대장실로 옮겨졌다. 중대장 소지가 형제복지원에서의 마지막 역할이었다. 중대장의 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중대장에게 맞거나 죽은 이들의 피를 치웠다. 형제복지원을 지키고 있는 선도들에게 빵과 담배를 갖다 주는 일을 했고, 따라서 형제복지원 안의 거의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1년 반쯤 지난 1987년, 형제복지원이 수사를 받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건들이 사회로 터져나가기 시작한 것.

김 씨는 그날이 몇 월이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반팔 윗도리를 입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점호가 끝난 밤 10시, 여느 때처럼 선도들에게 빵을 갖다주는 길에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도망쳤다.
당시 수사가 진행 중인 탓인지 도망가는 게 보여도 놔주는 분위기라는 것을 느꼈지만,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고 했다. 김 씨의 ‘가장 행복힌 순간’이기도 했다.

김 씨가 형제복지원을 처음 나와 찾은 곳은 서면, 어린 시절 함께했던 친구들을 찾다 홀로 잠이 들었다.

“길에서 잔 거지. 무섭다기보다도 그냥 들떠 있었지. 나왔다는 해방감 때문에. 진짜 그때는 내가 참 겁이 없었어. 스무 살까지는 되게 별났었어. 친구들도 ‘무서웠던 존재’라고 했었어. 나는 살기 위해서 하는 기라. 돈이 없으니까 빼앗아야 되고. 주변에 약하고 대마초하는 아들이 참 많았어요. ‘건드리지 마라’ 이런 과시용으로 신경안정제 150알도 먹었어.”

파출소만 가면 ‘형제복지원’ 떠올라… 38세에 첫 주민등록증을 받다

김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제때 교육 받지 못했고, 사회에 나와서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나마 주변에 친구들이 있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혼자라는 생각에 자살을 몇 차례 시도하기도 했다.

방황하는 날들을 보냈던 김 씨는 가해자 신분으로 파출소에 잡혀가기를 몇 번, 어느 순간 덜컥 겁이 났다고 했다.

“한 번은 상대방이 너무 많이 다쳤어. 그 다음부터는 파출소 가는 게 겁이 나더라고. 가면 또 신분증 보자 이러거든. 될 수 있으면 그런 일이 있는 곳은 피하고, 웬만하면 맞고 다녔지. 파출소 가면 또 형제복지원 들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
악기 배워서 공연 다니고 그러니까 (주민등록증이) 필요가 없었어. 그러다가 38세에 집사람하고 결혼식을 올려야겠지 그래서 만든 기라 이게.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으러 갔더니 ‘왜 없었냐’고 그래, 그래서 ‘형제복지원 가 있었다’ 하니까 ‘그럼 그럴 수도 있었겠네’. 아무 말 안 하더라고.”

김 씨는 몇 번의 사업 실패로 우울증을 겪기도 했지만, 그 어떤 경험도 형제복지원에서의 생활만큼 악몽인 것은 없었다. 김 씨는 자신의 머리에 누군가 손 대는 것이 싫어 이발소 대신 부인의 손을 빌려 머리털을 깎는다고 했다.

김 씨는 형제복지원이란 한마디로 ‘교도소’보다 더 무서운 곳이라고 표현했다.

“교도소는 죄를 지어야만 가지만 형제복지원은 ‘인간사냥’에 의해서 막무가내로 가는 곳입니다. 형제복지원을 나오려면 도망가거나 죽어야만 나올 수 있는 곳입니다. 교도소에서 사람이 죽으면 가족에게 연락이 가지만, 형제복지원에서 죽으면 무연고 처리가 됩니다. 또 교도소는 면회가 가능하지만 형제복지원은 누구를 만날 수 없는 곳입니다. 교도소는 아플 때 제대로 된 치료와 약·주사를 지원 받지만, 형제복지원은 아까도 말했듯이 치료라는 개념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하다못해 교도소는 정해진 밥에 정해진 영양식이 나오지만 형제복지원은 먹기 힘든, 음식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나오는 곳이지요.”

지금도 가끔 형제복지원 안에서 맞는 꿈을 꾼다는 김 씨는 쉽게 잠들기 위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누리소통망에 형제복지원 사건을 기록하면서부터는 하루 소주 두 병과 맥주 한 병을 마신다고 했다.

김 씨가 괴로워하면서까지 기억을 되살리는 이유는,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다.

“과연 형제복지원에서 나와서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어. 장애인 소대에 있는 사람은 다 죽었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일단 박인근이 죗값을 먼저 치러야지. 돈을 받아서 치유 된다하면 가능하죠. 하지만 그게 아니니까 나는 말을 참 안 하고 싶어. 수백억 원을 줘서 해외에서 별장 하나 지어 가 이 나라 쳐다보지 않을 정도면 몰라.
박인근 가족 모두 인민재판 받아야 해. 진짜야. 우리들 다 있는 데서 받아야 해. 지금도 장애인거주시설이나 이런 데 다 방치하고 폭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박인근 사위가 하는 시설에서도 두 명이 죽었지. 박인근이 왜 공무원한테 인테리어 맡기고 그랬겠습니까? 그걸 빨리 캐내고 그래야 조금이나마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지. 다 그렇게 똘똘 뭉쳐가지고 그래 되겠나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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