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부 훈령으로 방조한 국가의 '명백한' 책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 촉구

지난 1975년~1987년까지 대형건물에 무분별하게 사람을 불법 감금하고 강제 중노역은 물론 사망까지 이르게 한 ‘형제복지원 사건’이 일어난지도 어느덧 2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누군가는 그때의 악몽을 안고 하루하루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진실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 당시 인권유린의 현장인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박인근 (전) 원장 뒤에는 이를 내무부 훈령과 보조금 지원으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방조한 국가가 있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심각성은 인정하는 분위기나, 당시 국가(내무부 훈령)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은 인정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지난 4일 형제복지원 사건의 국가책임을 입증하는 최초의 자료를 공개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형제복지원사건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서울시 여의도 이룸센터 누리홀에서 ‘형제복지원사건은 명백한 국가책임이다’ 자료공개 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회에는 그동안 대책위가 ▲국가기록원 ▲부산시 ▲국회의원 진선미·김용익·도종환 의원실 ▲형제복지지원재단(구 형제복지원)의 내부제보자 등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공개했다.

공개된 자료는 △형제복지원과 부산시의 계약서 및 공문서 △신병인수인계서, 입소자 기록카드, 신병인수대장 △인수인계 파출소, 경찰관 이름 게재 서류 △신병인수증 △박인근 자서전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 14권 △부랑인 단속 공문 △사건 이후 전원조치 자료 △현재 장애인거주시설과 정신요양시설에 입소한 과거 형제복지원 사람들 명단 자료 △부산법의감정위원회와 형제복지원의 사체처리 위탁계약서 △형제복지원 발간 월간 홍보지 ‘새마음’ 19권 △김용원 다시 수사검사의 수사기록 일체 △안기부 참여 회의록 문서 △수용자 현황 △신규부랑인 인계 절차 안내 공문 등이다.

형제복지원 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기약 없는 논의 아닌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

현재 형제복지원 사건과 관련해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는 ‘내무부 훈령에 의한 형제복지원 피해사건 등의 진상 및 국가책임 규명 등에 관한 법률안’을 놓고 논의 중이다.

하지만 별다른 진전없이 논의만 진행될 뿐 올해가 아니면 언제 제정될지 언제 잊힐지 몰라 피해자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이날 참석한 형제복지원 사건 생존피해자 손정운 씨는 그 당시 참혹했던 형제복지원의 삶을 이야기 했다.

“거기의 삶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거는 지옥 지옥 하는데 지옥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아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나오죠. 그거와 비슷해요. 갓난아기부터 70~80세 먹은 사람들부터 장애인들까지 사람이 아니에요. 물건이에요. 지(박인근) 돈 버는 목적이지 수단이지. 사람이 아니에요. 도망가면 반죽음 밥흘리면 흘린만큼 맞는데, 맞아 죽는 애도 있고 죽는 애도 봤고 안 맞기위해 먹어야 했어요.”

손 씨는 진주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새어미니와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동안 가해지는 새어머니의 구박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출했다.

가출 후 진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역까지 갔는데 돈이 없었던 손 씨는 부산역사 안에서 앉아 있다가 부산중부경찰서에서 데려가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형제복지원에서 갖은 구타와 노역으로 얼룩진 손 씨의 삶은 되돌릴 수 없는 그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삶이었다. (웰페어뉴스 “아직도 ‘꽃다운 학생’이 그곳에 있다” 참조)

그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규명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손 씨는 “우리 국회의원분들 당위당락 여당·야당 따지지 말고 분명히 듣는 귀, 보는 눈이 있을텐데 여기 오셔 가지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잠깐이라도 들어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참석한 형제복지원 생존피해자 한종선 씨도 “국가가 만든 부랑인 꼬리표를 떼어달라.”고 외치며 “우리가 끝까지 싸우는 이유는 이 사건이 이대로 묻힌다면 미래의 다른 세대가 우리와 같은 삶을 살 것이다. 이것을 막아야한다. 법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의지를 다졌다.

이어 “우리와 반대되는 의견이 나온다고 해도 주눅들 필요없다. 우리가 겪은 이야기를 누구부돠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 책임을 끝까지 묻고 당당히 맞서 싸워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여준민 사무국장 “정부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과거사로 치부하는 것 같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며 “지금도 시설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보건복지부나 지자체는 몰랐던 게 아니라 다 알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들이 이런 문제를 일으켜 진실을 왜곡하고 또 왜곡된 진실로 인해 피해자들이 계속 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무부 훈령으로 방조한 국가의 명백한 ‘책임’

박인근은 그의 자서전 ‘형제복지원 이렇게 운영되었다!’를 통해 부랑인 수용을 국가가 시킨 것이라 증언했다.

자서전 중 넝마단체와의 마찰을 회고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넝마단체가 ‘왜 우리 사람들을 잡아가느냐’고 항의하자, 박인근은 인수인계증과 내무부훈령 410호를 보여주며 경찰에 의해 인수받은 것이라고 답변한다. 이어 ‘내무부 훈령에 따라 경찰·공무원이 인수인계하는 것일 뿐 형제원에서 자체적으로 사람들을 데려올 수 없다’고 말한다.

▲ 희망법 김재왕 변호사.
▲ 희망법 김재왕 변호사.
희망법 김재왕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사건하면 가혹행위를 조장했던 박인근만 생각한다. 사실은 비단 박인근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내무부 훈령에 의한 국가의 방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내무부 훈령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내무부 훈령 410호’는 건전한 사회 및 도시질서를 저해하는 모든 사람(일정한 주거 없이 관광업소, 접객업소, 역, 버스정류소 등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통행하는 곳과 주택가를 배회하거나 좌정해 구걸 또는 물품을 강매함으로써 통행인을 괴롭히는 걸인, 껌팔이, 앵벌이 등)을 부랑인으로 정의하고 이를 단속해 부랑인 수용시설로 보내졌다.

김 변호사는 “내무부 훈령은 정부가 만든 행정규칙일 뿐이다. 국가라는 행정기관에서 공무원에게 지시한 것인데 이것으로 국민을 가둬서는 안됐다.”며 “만약 인신을 구속하거나 체포를 하는건 당시 헌법으로 법률유보의 원칙이나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 당시 공무원은 내무부 훈령에 있는 부랑인을 넓게 해석해 단속했다.”며 “내무부 훈령에 따른 수용은 법률에 근거없이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법률유보의 원칙’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때에는 국회가 제정에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 ‘명확성의 원칙’은 기본권을 제한하는 경우에도 법의 적용을 받는 국민이 그 내용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무부 훈령 제210호는 법률에 근거하지도 않았고 부랑인이라는 의미도 포괄적으로 해석되며 명확하지 않은 의미여서 법률유보의 원칙과 명확성의 원칙을 위반했다.

김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사건 발생 이후 내무부 훈령이 페지된 것을 보더라도 국가는 문제가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형제복지원 사건 사망자들에 대한 분노도 터져 나왔다.

공감 장서연 변호사는 “형제복지원 사건 사망자의 공식 통계는 513인이다. 언론을 통해 사인에 대한 의혹들이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이 정권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수사를 중단했다.”며 “지금 국회에서 국가책임이다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1987년과 다를 게 없다. 더 있을 수 있는 사망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 회복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대책위는 앞으로 밝혀야 할 것들로 ▲폭행, 구금 등의 사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인원과 이에 따른 경찰의 혜택 ▲형제복지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어떻게 비호됐는가 ▲사망자들의 사인과 어떻게 어디로 팔려갔는가 ▲실종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박인근의 재산축적 과정 ▲형제복지원 사건 조사가 축소된 이유 등을 제시했다. 

▲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자료를 보고 있는 피해생존자 손정운 씨.
▲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자료를 보고 있는 피해생존자 손정운 씨.

▲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자료들.
▲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자료들.
▲ 1985년 12월 3일에 작성된 형제복지원 수용일지.
▲ 1985년 12월 3일에 작성된 형제복지원 수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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