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만난 칠레 교민 이혜경 씨… 경제적 이유로 포기하려던 보치아 선수 ‘후원’
세계적인 선수가 된 정호원, 어려운 학생 위해 모교에 수년간 ‘기부’ 이어와

▲ 정호원 선수(왼쪽)와 권철현 코치의 경기 모습. ⓒ웰페어뉴스 DB
▲ 정호원 선수(왼쪽)와 권철현 코치의 경기 모습. ⓒ웰페어뉴스 DB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무대에 올라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선수가 되는 길은, 감히 예측할 수 없는 험난함과 고됨의 연속일 터.

그 긴 싸움을 이어오는 사이 몇 번의 고비가 찾아오기 마련이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포기’의 한 치 앞에 서야 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절망’과 ‘위기’라고 표현되는 그 순간에 단 한 번의 인연으로 선뜻 장애인 선수를 후원한 고마운 인연이 있다.

사연의 주인공은 보치아 BC3 국가대표 정호원 선수. 2009년 처음 세계랭킹 1위 자리에 오른 뒤 8년 중 7년의 시간을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국의 자랑이다.

빛나는 성적과는 반대로 험난했던 그의 선수생활에서 만난 ‘특별한 인연’은, 10년 전 비행기에서 만난 칠레 교민 이혜경 씨다.

당시 정호원 선수는 브라질 리우로 향하던 길이었다. 패럴림픽 출전을 위해 브라질 리우를 찾은 지금처럼…….

“대회에 출전하나 봐요. 전 칠레에 살고 있는 교포입니다” 짧은 인사로 시작된 ‘인연’

▲ 정호원 선수(앞)와 권철현 코치. ⓒ대한장애인체육회
▲ 정호원 선수(앞)와 권철현 코치. ⓒ대한장애인체육회

2006년 10월, 정호원 선수는 그의 경기 보조자이자 현재 국가대표 코치를 맡고 있는 권철현 코치와 함께 ‘리우 보치아 세계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해 비행기에 올랐었다.

지구 반대편, 우리와 꼭 12시간이 차이나는 브라질.

정호원 선수와 권철현 코치는 브라질 리우로 들어가기 위해 미국 LA를 경유하는 일정을 잡아놓았었다. 하지만 당시 브라질은 재정 위기로 국적항공사 마저 부도가 났고, 인천에서 LA까지 13시간의 긴 비행 뒤 다시 칠레 산티아고를 경유하는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 그들에게 우연한 만남을 만들었다.

비행기를 탑승한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정호원 선수와 함께 있던 권철현 코치에게 옆에 앉아 있던 승객이 말을 건네 왔다.

“대회에 출전하나 봐요. 전 칠레에 살고 있는 교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혜경 씨였다. 정호원 선수와 권철현 코치는 “낯선 땅에서 한국 교포를 만나 무척 반가웠다.”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분은 학창시절 서울체고를 다니며 탁구 선수로 활동했던 엘리트 체육인 출신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아 서너 시간동안 그들은 장애인 체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목적지인 칠레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혜경 씨는 전자우편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며 ‘항상 응원하겠습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격려 때문이었을까. 리우보치아세계선수권대회와 같은 해 11월 쿠알라룸푸르 아·태장애인경기대회에서 정호원 선수는 연이어 금메달을 획득했고, 2년 뒤 열리는 2008 베이징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출전과 금메달 이라는 꿈에 한발 더 다가선 듯 했다.

후원자를 찾지 못해 ‘포기’를 생각하던 그들에게 전달된 ‘작은 응원’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그들 앞에는 ‘현실’이라는 큰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이야 (비록 단 한 곳이지만) 보치아 실업팀이 있지만, 당시는 실업팀은커녕 지원이나 관심도 저조하던 때였다.

정호원 선수 역시 개인적으로 운동을 지속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했고, 1년 가까이 일을 쉬며 정호원 선수와의 훈련에 집중해왔던 권철현 코치에게도 가족들을 위해 더 이상은 휴직을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대기업 사회공헌팀과 지방자치단체 등에 후원 계획서를 수없이 보내 봤지만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열정과 실력, 환상의 호흡까지 모두 갖춘 그들이 장애인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포기’를 선택하려던 그때,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1년 전 비행기에서 만났던 이혜경 씨에게서 연락이 온 것. 대회 결과와 고마움을 전하며 후원자를 찾고 있다는 일상을 전했던 메일에 뜻밖의 답장이 돌아왔다.

▲ 과거 이혜경 씨에게 온 편지의 한 부분. ⓒ권철현 코치
▲ 이혜경 씨에게 온 편지의 한 부분. ⓒ권철현 코치

“반갑습니다. 좋은 기억들이었는데, 호원이가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니 참 반갑습니다. …… 호원이가 올림픽에 참가 하려면 어떤 도움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요? 큰 기업에서 후원을 넉넉하게 도와주면 좋지만 작은 성원들을 모아서라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외면하지는 않으렵니다. 작은 성의를 합해서라도 돕고 싶은 마음입니다.”

정호원 선수와 권철현 코치는 “당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며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교포가, 비행기에서의 잠시 인연으로 이런 큰 도움을 준다는 소식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고 기억을 되새겼다.

그렇게 1년을 이혜경 씨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은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할 수 있었고, 마침내 2008 베이징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에서 보치아 BC3페어(2인조) 금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정호원 선수는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보치아 선수가 됐다. 15년의 보치아 국가대표 선수 생활 속에서 국제대회에 출전해 획득한 금메달만 20개. 은메달 4개와 동메달 2개 까지 합하면 26개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10년 전 낯선 땅에서의 인연으로 시작해 지금의 ‘정호원’을 있게 해준 특별했던 응원.

정호원 선수와 권철현 코치는 “이혜경 선생님(선수와 코치는 이혜경 씨를 선생님으로 부른다)이 살고 있는 칠레는 리우패럴림픽이 열리는 브라질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며 “리우에 도착하면서부터 우리에게 10년 전 찾아왔던 기적과 다시 가까이 마주선 느낌.”이라고 남다른 감회를 전했다.

이어 “아쉽게도 몇 년 전 유일했던 연결의 끈인 메일주소가 휴면상태로 바뀌며 연락이 끊겼다.”며 “리우패럴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꼭 소식을 전해드리고 싶었는데…….”라고 아쉬움을 전했다.

그리고 리우패럴림픽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나면 칠레 교민회 등을 통해 이혜경 씨의 소재를 찾고 싶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받은 사랑을 ‘몰래 기부’로 되돌려주는 ‘정호원’

특히 정호원 선수는 자신이 받았던 지원을 다시 미래의 꿈나무들을 위해 몰래 기부를 해왔다.

▲ 정호원 선수의 훈련 모습.ⓒ대한장애인체육회
▲ 정호원 선수의 훈련 모습.ⓒ대한장애인체육회

정호원 선수는 “내가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지원하고 싶었다.”며 2009년부터 모교인 충주 숭덕학교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해 장학금으로 기부해온 것.

학생 시절부터 보치아 선수로 활동했던 정호원 선수는 긍정적인 태도와 노련한 경기 운영으로 인정받아왔지만, 운동으로 생계를 꾸려가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선수생활을 그만 두려고 했었다.

‘장애가 있는 두 아들을 위해 고생하며 살아오신 어머니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취업해 경제적 도움이 되고 싶었다’는 그는, 직업훈련학교 입학에도 도전했지만 중증 장애인에게 높았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포기하지 못했던 보치아 선수의 꿈은, 이혜경 씨와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응원이 더해지면서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했다.

그 보답으로 시작한 기부. 장학금을 전달한지 몇 년 뒤에서야 권철현 코치도 그 사실을 알았다. 늘 곁에 있는 자신에게도 숨긴 채 조용히 진행했던 기부에 권철현 코치는 “대견하고, 대견할 뿐.”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15년차 보치아 국가대표 정호원 선수. 리우패럴림픽이라는 큰 무대 앞에 선 그는, 세계가 인정하는 실력과 목표를 향한 열정, 그 무엇보다 빛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금메달을 바라보고 있다.

한편 정호원 선수와 권철현 코치는 지난달 31일 리우 현지에 도착해 적응훈련 중에 있으며, 오는 10일 BC3페어(2인조) 조별예선을 시작으로 세 번째 패럴림픽 도전 일정을 시작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권철현 코치가 SNS를 통해 올린 사연을 바탕으로 인터뷰를 더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기사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권철현 코치 역시 정호원 선수에게는 또 한명의 든든한 지원자입니다.

2002년 부산아태장애인경기대회에 처음 함께 출전했던 둘은, 이후 정호원 선수가 운동을 그만하려고 고민하던 중 권철현 코치를 찾아오면서 다시 파트너가 됐습니다.

후원이 없어 어려웠던 많은 고비와 당당하게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의 무대까지… 10여 년의 시간동안 정호원 선수가 국제무대에 오르는 모든 순간에 권철현 코치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웰페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