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 폐지를 골자로 장애인지예산, 장애인종합지원센터, 표준소득보장제 도입… 복지부 “실행가능성 더 검토해봐야”

▲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및 발전 방향 모색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 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 및 발전 방향 모색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현행 장애인 복지법(이하 복지법)이 장애인활동보조지원제도, 장애인연금제도 등의 신청 절차에서 엄격한 장애등급을 요구해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만들고 복지 사각지대를 유발하고 있다는 장애계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이에 장애인권리보장법제정연대(가칭)가 지난 2014년 장애인권리보장법안을 마련하고, 2017년 1월 ‘장애인 권리보장 및 복지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 권리보장법)’을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보건복지위원장이 대표 발의했다.

장애인 권리보장법은 총 7장 171조항과 부칙 3조항으로 구성돼 있고 ▲장애 정의에 권리적 가치를 포함한 정의 포함 ▲장애인지예산 도입·실시 ▲국가장애인위원회와 장애인지원기금 설치 ▲실효성 있는 권리 보장을 위한 중앙장애인권리옹호센터 구축 ▲복지서비스 통합 지원을 위한 중앙·지역장애인종합지원센터 설치 ▲기본 생계유지를 위한 표준소득보장제도 도입 ▲탈시설·장애인 가정의 지역사회 내에서 원활한 생활 지원 등이 주요 내용이다.

부칙에는 장애인복지법을 폐지한다는 조항이 담겨 있어 장애인을 권리의 주체로 만드는 복지정책을 시행하자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담아냈다.

장애인권리보장법, 증명 통한 등급이 아닌 욕구·필요에 따른 등록으로…

장애계는 시혜와 동정, 의학·재활 중심, 공급자·행정편의·사업 중심에서 당사자 권리와 자기 결정권 중심, 이용자·장애인 입장 중심으로 복지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 법 개정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장애인 권리보장법은 이러한 장애계의 요구를 현실화하기 위해 장애를 정의함에 있어 신체·정신 장애라는 개인적 요인에서 사회·문화라는 환경적 요인까지 끌어안아 장애의 사회적 차원을 부각시키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박경석 대표는 토론회에 앞서 “정부의 편의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선택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법에 따라 많은 장애인들이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힘들게 살아왔다.”며 “장애인 권리보장법은 이제 시작이고 초안에 불과하다. 지난 2009년 채택된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서 보장하고 있는 장애인의 평등, 비장애인과 동등한 권리 보장,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권리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장연 이정훈 정책실장에 따르면 복지법은 장애인들의 삶과 권리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애인들의 삶과 권리를 제한하고 있다.

복지법은 장애인을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오랫동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이러한 정의는 일시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은 사고를 통해 장애를 얻게 된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

또한, 현행 장애 등급제는 의학적 손상 정도를 적격성 판정의 절대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장애인 개인의 욕구와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정훈 정책실장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정훈 정책실장

이 정책실장은 “본인이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진짜 장애인인지 아닌지를 증명해야 하는 ‘장애등급제’는 국가의 대표적인 행정편의 정책이며, 부양의무제 역시 장애인 당사자의 노동권을 포기하거나 가족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배제하는 정책.”이라며 “다른 선진국처럼 장애로 인한 활동의 어려움 정도와 본인의 서비스 필요도에 따라 적격성 여부가 평가돼야 한다. 나의 장애를 증명하는 절차가 아니라 본인의 필요에 따라 등록하는 과정으로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장애등급제 폐지에 따른 핵심 대안이자 장애인 권리보장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등급에 따른 획일적인 서비스가 아닌 개인의 욕구와 필요를 반영한 ‘개인별지원체계’다. 개인별지원체계는 중증장애인이 수용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 내에서 가정 또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지원·자립·공공주택에 거주하면서 국가의 공공서비스인 복지·교육·노동의 연계로 하루 24시간을 스스로 채워나갈 힘을 가지도록 권리를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인별지원체계는 예산 확보와 공적 전달체계 마련이 가장 중요하다. 공적 전달체계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과 서비스 이용자를 연결하는 전달 망으로, 이 체계를 국가와 지자체가 제대로 운영하지 않으면 개인 맞춤형 서비스는 기능하지 못한다.

이에 장애인 권리보장법은 장애인 공적 전달체계 담당기관으로 ‘중앙장애인종합지원센터’ 설립을 명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장애인 판정과 종합적 복지욕구·지원 정도 사정 △개인별 지원계획 수립 △복지서비스 구매 조력·대행 △자립생활주택 위탁 운영 △복지서비스 제공인력 관리 △지역사회 지원 협조 체계 구축 등 장애인에게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국가가 책임지고 통합·관리해서 제공한다.

또한, 장애인 권리보장법은 장애인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보호하는 시스템 마련을 위한 ‘장애인권리옹호센터’ 설립을 명시하고 있다.

중앙과 지역에 장애인권리옹호센터를 설립해 ▲장애인에 대한 권리 옹호 ▲차별금지·인권보장을 위한 업무 통합·운영 ▲지역·관계 기관 간 연계체계를 구축하도록 했다.

또 권리구제 신청이 없을 경우라도 사전 공지 없이 직권에 의한 조사가 가능하도록 권한을 강화하고, 법에 따른 조사권한을 갖춰 피해자를 확실히 보호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외에도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탈시설 자립생활’ 지원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거주전환지원계획, 자산형성 지원 사업 등을 실효성 있게 보장하도록 명시했다.

장애인 권리보장법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홍성대 전문위원는 법안이 방대하고 새로운 서비스와 기관 설립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 장애계와 정부의 신중한 접근을 요청했다.

그는 “기존 체계를 수정·보완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해 당사자 간의 충돌이 예상된다. 법안을 다듬고 현안 과제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향 설계와 지침 설정이 매우 중요하다.”며 “장애계와 국회 상임위에서 이 법안을 둘러싼 논의를 협의할 실무팀을 꾸려야 법안 통과가 수월해질 것.”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복지부 “현행법도 제대로 못하는데, 범위 넓어지면 더 힘들어…”

장애계 “시혜 여부 판단은 당사자가 해야… 보장법 발의 취지 이해 못해”

한편,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현행법이 장애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장애계의 주장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법·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예산과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입장을 내놓아 새 법안 발의 과정에서 진통이 예고됐다.

복지부 장애인정책과 임을기 과장은 “장애인 권리보장법 제정 취지에는 공감하나 실행 가능성에 대해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장애인등급제를 폐지하려면 54개 법령을 고쳐야 하는데, 장애인서비스 144개 중에서 등급제와 관련된 서비스가 70개다. 이를 국정과제로 삼고 지난 4년간 논의하면서 매달렸다. 완전히 폐지를 검토하다 보니 이렇게 늦어진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장애인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지역사회 내 자립을 돕고자 하는 장애인 권리보장법 취지에 대해 적극 공감하고,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복지부도 적극 노력할 것.”이라면서도 “장애인들이 혜택을 체감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복지법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장애인 권리보장법이 나온 게 아닐까 한다.”고 말해 장애계 인식과 다른 견해를 보였다.

그는 장애인 권리보장법이 강조하는 장애 정의에서도 “현행 복지법이 정의하는 신체·정신 장애에서 사회·문화 장애로 범위가 넓어지면 서비스 정도가 넓고 얇아진다. 이렇게 되면 노인도 장애 영역에 포함되는데 우리나라 복지 수준이 그렇게 성숙하지 않다.”며 “신체·정신 장애와 사회·문화 장애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신체·정신 장애 영역부터 잘 해나가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또한, 임 과장은 “등급제 폐지는 찬성하지만, 중·경증 판정에 대해 장애계가 오해하고 있다.”며 “현재 예산 절감 차원에서 15개 유형별 맞춤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판정시스템은 개선해 나갈 것이며, 등급 자체도 없애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전장연 조현수 정책실장은 복지부가 장애인 권리보장법 발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주는 사람이 어떻게 ‘나는 시혜적으로 주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시혜·동정의 시선이라는 것은 당사자가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가 복지법이 시혜적인 정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신청주의 방식으로 장애인을 선별하고 의료적 관점에서만 장애 정도를 판단하기 때문.”이라며 “법 제정 이후의 시행은 예산 등의 문제로 좌절되는 것이지 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인 권리보장법 제정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어 “중·경증 단순화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했는데, 지난 4년 동안 장애계와 복지부가 합의해온 사항이 이번 시범사업에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가 중·경증 단순화를 반대하는 이유.”라며 “한정된 예산 범위 내에서 법을 집행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산과 편의를 핑계로 장애인을 등급으로 나누고 잔여 예산 내에서 선택적으로 복지를 제공하지 말자는 것이다. 오히려 복지부가 장애인 권리보장법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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