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선거법·선관위 내부지침… 가족 외에 사람 1명이 투표 동반할 경우, 투표참관인도 투표 참관하도록 돼있어
장애계, 선거권·평등권·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

▲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계 단체는 4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장애인 참정권 침해 헌법소원 심판청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계 단체는 4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장애인 참정권 침해 헌법소원 심판청구’ 기자회견을 열었다.ⓒ하세인 기자

제19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던 지난 5월 9일. 뇌병변 장애가 있는 정명호 씨는 투표를 하기 위해 근처 투표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끝내 투표를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8월 4일. 그는 본인의 투표를 가로막았던 근거가 되는 공직선거법 조항이 헌법이 보장하는 참정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재판소를 찾았다. 투표를 위해 찾아갔던 투표소에서 그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대선 투표가 진행되던 지난 5월 9일. 그는 투표를 하는 모든 국민들과 다름없이 신분 확인 뒤 기표 종이를 받고 활동보조인과 함께 기표대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투표 사무원은 정 씨에게 ‘활동보조인 1명만 동반해서는 투표를 할 수 없다’고 기표소 입장을 제지했다. 투표 사무원은 제지 근거로 공직선거법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업무 지침을 제시했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의 내용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해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명을 동반해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선관위 업무 지침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가 있는 선거인이 지명한 사람이 없거나 지명한 사람이 1명(가족 제외)인 경우에는 투표참관인의 입회하에 투표사무원 중에서 2명이 되도록 선정해 투표를 보조하도록 안내’로 돼있다.

공직선거법과 업무지침에 의하면, 정 씨는 활동보조인과 단 둘이 기표소에 들어갈 수 없다. 가족 1명을 데려오거나, 기표소 입장의 기준인 2명을 충족시키기 위해 투표 사무원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

▲ 보완대체의사소통기기를 통해 본인이 겪었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정명호 씨.
▲ 보완대체의사소통기기를 통해 본인이 겪었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정명호 씨.ⓒ하세인 기자

정 씨는 당혹스러웠다. 대한민국 선거는 기본적으로 비밀선거가 원칙인데, 투표일에 처음 보는 사무원과 기표대에 함께 들어가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비밀 보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기표소 입장을 막는 투표사무원에게 “나는 활동보조인과만 들어갈 것이다. 당신(투표사무원)은 내가 생전 처음 본 사람인데,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누구를 찍는지 다 공개해야 되냐. 이는 선거권 침해.”라고 투표사무원 동반 투표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해당 투표소 투표사무원은 끝까지 활동보조인 1명과 기표소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정 씨는 투표를 할 수 없었다.

이에 정 씨의 이야기를 들은 장애계 단체는 장애인 참정권을 침해하는 공직선거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과 비밀의 자유' 침해한 공직선거법과 업무지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김재왕 변호사는 공직선거법과 선관위 업무지침이 헌법이 보장하는 ▲선거권 ▲평등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김재왕 변호사.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김재왕 변호사.ⓒ하세인 기자

먼저 그는 “선관위는 2명이 함께 들어가야 투표의 공정성이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활동보조인은 장애인과 함께 살면서 친분‧신뢰를 쌓은 관계다. 활동보조인이 장애인의 의사에 반해서 투표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뿐더러, 장 씨 같은 경우 본인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활동보조인이 누구에게 투표하는지 확인하고 잘못했을 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무조건 두 명이 투표를 보조해야 한다는 것은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무시한 행위다. 뿐만 아니라 투표 사무원의 참관은 비밀투표 원칙에도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공직선거법과 선관위 지침은 가족과 활동보조인의 차이를 둔다.

가족을 동반하는 경우 동반인이 1명이어도 투표가 가능하지만, 가족이 아닌 활동보조인 등 다른 사람이 동행할 경우는 2명이어야 투표할 수 있다.

이에 김 변호사는 “해당 법은 장애인을 가족에 의해 보조받을 수 있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 의해 보조받을 수 있는 사람을 구별하고 있다. 이는 장애인 차별.”이라고 꼬집었다.

장애당사자들도 국민의 기본 권리인 참정권조차도 ‘장애’로 제약 받는 현실에 분개하며, 해당 사건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문애린 활동가는 “정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장애인은 어디를 가나 자힌의 장애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구나’라고 생각했다. 투표를 하기 위해서도 당사자들은 자신의 장애 정도를 밝혀야 하고, 자신이 인지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증명해야 한다. 장애인이 투표할 경우 2명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장애인은 인지 능력이 없고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존재’라는 의식이 깔려있다. 우리를 더 이상 물로 보지 말라! 우리도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행사 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장애인 참정권 침해는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대통령 선거 당일 많은 장애인들이 투표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김성연 사무국장에 의하면, 시각장애인이 선관위 직원과 단 둘이 투표를 진행한 사례도 있었다. 이 경우, 안면인식도 없는 사람에게 기표를 맡기게 되고, 당사자는 당사자 대신 기표한 선관위 직원이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 알 수 없다. 선관위는 투표의 공정성을 이야기하며 2명 동반 참관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공정성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이에 김 사무국장은 “해마다 진행되는 선거에서 장애인은 계속 소외되고 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법을 바꿔야 한다.”며 “이번 헌법 소원을 시작으로 다시는 장애인이 기본권을 침해받지 않도록, 국민의 기본권이 지켜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저작권자 © 웰페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