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회] 광화문 농성 5년의 기억
[좌담회] 광화문 농성 5년의 기억
  • 웰페어뉴스 기자
  • 승인 2017.08.2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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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광화문 공동행동 활동가들의 5년

부양의무자 기준·장애등급제 폐지를 외치며 광화문 광장에서 농성을 시작한지 어느덧 5년.
그들이 광화문 농성장에서 농성을 한 기간 동안 대통령은 두 번 바뀌었고, 농성장 한편에 마련된 영정사진은 13개로 늘어났다.
매일 투쟁·농성·선전전을 통해 장애등급제·부양의무자 기준의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사회·정치의 중요 의제로 이끌어 내고 있는 이들.
장애인신문은 농성 현장에서 농성장 지킴이로 혹은 활동가로 혹은 장애 당사자로 보냈던 5년간의 농성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어보고자 한다.
좌담회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박현 활동가, 장애등급제폐지부양의무제폐지광화문 공동행동 이형숙 공동집행위원장,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사무국장,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이윤경 활동가가 참여했다.
그리고 기사는 활동가들과 함께한 좌담회를 통해 지난 5년의 시간 속 광화문의 기억으로 사회의 변화와 농성장의 의미를 찾아보는 내용을 담았다.

광화문 농성을 시작한지 어느덧 5년이 지났다. 소감을 말해 달라.

모두 / (잠시 정적 뒤 웃음)진짜 어렵다. 제일 어려운 것 같네.

이윤경 / 5년이라는 숫자가 별 생각이 없다가 누가 ‘전장연 10년 중에 절반은 광화문 농성이야’ 이야기하면서 숫자가 확 와 많이 온 것 같아요. 하~정말 길었구나(웃음) 그랬는데, 소감이라고 이야기할 만한게 아직 없는 것 같아요. 1년, 2년, 3년,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사실 시간에 응당 ‘그래, 5년 싸웠으니 이렇게 되는구나’ 결과가 기대되니까 부담되는 시간이기도 하고…….

지난주에 1박2일 집회하고 나서, 지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똑같은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어요. 소감은 이정도? (곰곰이 생각하다가)크게 감흥이 없는데 어떡하지?

박현 / 끝났다는 느낌도 없고, 계속 가도 상관없는 것 같아요. 이게 뭔가 감회가 있다는 것은 끝나고 나서 되돌아보는 건데, 아직 진행 중이니 5년 됐다는 기간에 대한 감회가 없는 것 같아요.

이형숙 / 아마도 우리가 단시일 내에 끝낼 거란 생각을 처음부터 안 해서 그런지, 광화문 농성을 쉽게 만만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각자 마음속에 이것은 큰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감회가 없는 것 같아요.

김윤영 / 5년이 길긴 길죠. 저희 이번에 문화제 사회 봤었던 활동가는 농성장 함께 할 때는 분명 결혼 안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이가 4살이에요. 엄청 긴 시간이 맞죠.

이형숙 / 처음 농성했을 때 집행위원 총괄 했던 활동가가 아이를 낳았거든요.

김윤영 / 우리도 결혼을 했고, (이)형숙 언니는 애 졸업시키고…….

이윤경 / 맞네, 결혼을 많이 했네.

이형숙 / 나는 더 많이 늙고.(웃음) 이렇게 보니 5년이 참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네요.

시간을 2012년 8월 21일로 되돌려 보자. 처음 광화문 농성장을 만들던 그 날은 어땠나?

▲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사무국장은 광화문을 기둥이라고 표현했다. “광화문을 ○○이라고 말하긴 어렵고, 광화문 농성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멈추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나도 안 바뀐 현실에 답답하고 제대로 하고 있나 의심이 드는 게 우리를 가장 지치게 하거든요. 활동가들이 갈피를 잃는 것 중에 하나가 현재 어디까지 왔나하는 지표가 없으니깐. 그런 의미에서 농성은 소중한 기둥이었어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 다만 멈추지 않고 가면 서두르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다’ 많은 위로가 되고, 만들었던 것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 빈곤사회연대 김윤영 사무국장은 광화문을 기둥이라고 표현했다. “광화문을 ○○이라고 말하긴 어렵고, 광화문 농성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멈추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나도 안 바뀐 현실에 답답하고 제대로 하고 있나 의심이 드는 게 우리를 가장 지치게 하거든요. 활동가들이 갈피를 잃는 것 중에 하나가 현재 어디까지 왔나하는 지표가 없으니깐. 그런 의미에서 농성은 소중한 기둥이었어요.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 다만 멈추지 않고 가면 서두르지 않아도 해결할 수 있다’ 많은 위로가 되고, 만들었던 것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김윤영 / 8월 21일 기자회견을 앞두고 미리 광화문 상황을 보니, 이미 이곳저곳이 경찰로 가득했어요. 해치마당을 내려가는 경사로에서부터 이미 경찰들은 바둑판 모양 처럼 자리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모든 승강기와 리프트, 경사로가 막혀 있었어요. 장애인의 출입을 차단한거죠. 아무도 내려오지 못하게……. 그때부터 싸움이 이미 시작된 거죠.

오전 11시 기자회견이 시작되고 경찰과 대치가 본격화 됐어요. 이미 막혀 버린 길 앞에 싸움이 시작됐고, 그 사이 몇 명이 지하로 내려가기는 했지만 고립 상태로 무려 8시간이 흐르기도 했었죠. 당초 모두 내려가 거점을 마련하고 진행하려 했던 문화제는 밖에서 진행됐어요. 엄청난 비가 내리고 있었어요. 당시 내렸던 비가 얼마나 세찼는지, 맞으면 아플 정도였어요. 그 난리 속에 경찰에 끌려가기도 하고 병원에 실려가기도 하면서 사건 사고들이 지나갔죠.  ‘아 진짜 첫날부터 빡세게 시작한다’(웃음) 이게 우리의 첫 기억이었어요.

시간이 흘러도 광화문 지하로 내려갈 방법이 없어 방법을 바꿨어요. 시청역과 종각역, 경복궁역으로 흩어져 다시 광화문역에 내렸고, 계단을 기어서 지금의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죠.

이형숙 / 박현 소장님은 그때 어디있었어요?

박현 / 그때 천막 친 데 있었어요. 지하철 타고 오다가 광화문 막혔다고 해서 돌아 돌아 종각역에서 광화문역으로 왔는데, 그 곳에도 경찰이 있었죠. 뭐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밀고 들어갔죠.

이형숙 / 저도 연락을 받았어요. 일찍부터 폐쇄가 됐으니 ‘알아서 오라’고 이야기 하더군요. 저는  다른 길을 택해 교보문고 쪽에서 들어왔어요.

이리 저리 길을 찾아 농성장에 자리를 잡은 활동가들이 있었어요. 애린, 박길연(손으로 사람수를 세며)한 열댓 명 쯤 있었던 것 같아요. 밥은 커녕 11시부터 갖혀 있었는데 오후 4~5시가 되니 화장실이 당장 급했죠. 길을 막고 있던 경찰에게 사정을 했죠. 처음에는 우리가 다른 수가 있을까 고민하더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말에 길을 터주더군요. 단, 다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 함정아닌 함정이었죠. 한 활동가가 화장실을 갔다 다시 현장에 들어오는 것을 제지당하는 것을 보고, 전 결국 참기를 선택했죠.

밤 11시 넘어 드디어 밖에 있던 활동가들이 광화문 지하로 내려와 합류했어요. 하루 종일 땀흘리고 비를 맞으며 버텨온 이들, 그리고 우리를 막고 선 경찰들의 냄새가 뒤엉켰어요. 그래도 경찰은 교대라도 했죠. 우리는 교대도 못하고…….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김윤영 / 교대하는거 진짜 부러웠죠.

이형숙 / 지하철 역 땀 냄새가 어후~~~~~ 농성장을 잡은 이후에도 긴장은 했죠. 초비상있어요. 혹시 밤에 자면서 경찰이 들이 닥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도 됐죠.

박현 / 11시쯤 경찰이 다 빠지니까, 한 동지가 돌아다니면서 ‘형, 우리가 이긴 거죠?’라고 묻던 이야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김윤영 / 전 진짜 기분이 좋고 두근거렸던 생각이 나요. 플랜카드를 펴고, 바닥에 롤을 펴고 ‘아이고야~’ 드러눕는데 되게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 ‘뭔가 시작한다’ 이런게 있었던 것 같아요. 빈사연(빈곤사회연대)은 꾸준히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를 위해 싸워왔는데, 이렇게 이 의제를 중심에 걸고, 농성을 시작하는 게 너무 기대되는 일이었던 거예요. 되게 기쁜 일이었고, 엄청 떨리고 기분 좋았던 것 같아요. 변태 같나?

이윤경 / (김윤영 사무국장을 쳐다보며)으아~  엄청엄청.

김윤영 / 투쟁 너무 좋아! 이런.(웃음) 아니 무기가 생긴 것 같잖아요. 만날 우리 얘기는 뜬구름 잡는 얘기, 말도 안되는 소리, 그걸 어떻게 폐지해, 그게 돈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이런 반응이었는데, 무기가 생긴 것 같고, 엄청 현실적인 공간에 자리 잡았으니 이제 어떡할거냐!(웃음)

그런데 정말 그 다음날부터 물품 하나 들어오는 것이 다 투쟁이었어요. 어디서 국회의원 들어 올 때 책상하나 겨우 들어오고, 어디에서 누가 올 때 의자 몇 개 반입하는 거 협의하고, 천막이 들어왔을 때는 농성한지 2~3주 됐을 때쯤 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엔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했어요.(웃음) 그러다가 천막을 깎고, 허리를 피고 들어갔던 것도 몇 달이 걸린 것 같아요.

이형숙 / 갑자기 그 생각이 나네요. 역장이 와서 ‘물건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고 핀잔을 주더군요. 매일매일 하나씩 가방에 넣어 필요한 물건을 넣었거든요.

김윤영 / 나중에는 정수기도 설치하고 그래가지고.

이윤경 / 완벽해졌지.(웃음)

김윤영 / 지금은 냉장고, 정수기, 전자레인지 등등(웃음)

광화문역에서 농성을 한 이유가 궁금하다.

박현 / 비를 피할 수 있고, 전동 휠체어 충전도 가능한 적절한 장소가 필요했어요. 광화문에는 교보문고와 세종문화회관 등이 있어 사람도 많아 우리의 이야기를 더 많이 전달할 수 있고요. 중요한 것은 광화문에 승강기도 있으니까요. 원래 계획했던 장소는 조금 더 들어간 곳이었지만, 당시 고립됐던 장소가 지금의 농성장이었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자리잡았죠.

또 광화문 광장은 활동하는 분들에게는 익숙한 곳이에요. 이동권 투쟁부터 주구장창 광화문에서 활동했으니까요. 시민사회 단체들의 활동도 많은 곳이었고요. 지금도 세월호 뿐 아니라 많은 목소리가 모이는 곳이다 보니, 배우기도 많이 하고 있어요.

지금의 광화문은 우리에게 해방구인 것 같아요. 광화문 지키러 가면서 많은 것을 보게 되는. 많이 느낄 수 있었어요. 광화문 광장으로도 많은 연대 단위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한편으로는 뿌듯해요.

김윤영 / 편의성도 있고, 광화문이 서울 한 복판이잖아요. 청와대 가장 가깝게 천막 칠 수 있는 곳이었고,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서울의 중심에서 알려보자’ 이런 의미로 선택하게 됐죠.

당시 광화문 광장을 오가는 시민들의 반응도 궁금하다.

▲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광화문공동행동 이형숙 공동집행위원장에게 광화문은 일상이다. “사실 광화문 농성장이 아마도 없었으면 이런 활동의 맛을 못 느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자 기준 등 우리한테 직면한 내용이죠. 활동보조 신청하는데 등급이 안맞고, 수급비를 신청하는데 부양의무자 기준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했죠.”
▲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광화문공동행동 이형숙 공동집행위원장에게 광화문은 일상이다. “사실 광화문 농성장이 아마도 없었으면 이런 활동의 맛을 못 느꼈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장애등급제·부양의무자 기준 등 우리한테 직면한 내용이죠. 활동보조 신청하는데 등급이 안맞고, 수급비를 신청하는데 부양의무자 기준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했죠.”

이형숙 / 초창기예요? 되게 싸~했어요. 냉대였죠. 뭐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죠. 지저분하다고……. 왜냐면 그런 풍경을 본적이 없잖아요.

이윤경 / 2년차까지는 싸했던 것 같아요. 민원이 많았어요. ‘보기 싫다’, 특히 우리가 싸우고 있는 문제로 사망하신 분들의 영정사진이 함께 있다보니 민원이 많이 들어왔었어요. ‘너무 무섭다’, ‘치워 달라’ 등등…….

특히 당시 스카이 농성장이라고 강정, 쌍차, 용산 해서 연대 농성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지나가는 사람이 불을 질러 문제가 있었어요. 그때 한 언론사가 우리 농성장 몰래 찍고 ‘여기도 화재위험있다 방치할거냐 서울시’라고 기사를 내면서 의도된 민원도 많이 있었고…….

이형숙 / 그럴때마다 긴장하는 거죠. (멋쩍은 웃음)

김윤영 / 호의적인 사람들도 많았어요. 무엇이 문제인지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고,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오며가며 안부를 볻기??했죠. 응원을 하기도 하고, 고생한다며 음료수 등을 주는 사람도 꽤 많아요.

그리고 ‘웃픈’이야기지만, 가장 많은 질문은 ‘교보문고 어떻게 가느냐’, ‘화장실 어디예요?’, ‘9번 출구 어디예요?’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죠.(웃음) 지하철를 안내, 저희가 하고 있는 거죠.(웃음)

이형숙 / 심지어 안내 지침도 만들어 농성장 책상에 붙여 놨어요. 매일 농성장 담당자가 바뀌고 지역 활동가들도 있어, 답변을 위한 방법이었죠.(웃음)

지금은 농성장 모습이 제법 잘 자리잡은 듯 보인다. 전기도 공급되고, 지킴이 순번도 원활히 돌아가는 것 같다. 지금의 농성장 모습을 갖추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떠한가. 특히 여름, 겨울은 농성장 지키기가 더 힘들었을 것 같다.
 
김윤영 / 여름에는 환기, 습기, 모기 이게 ‘삼기(?)’가 최고예요.(엄지를 치켜 세우며) 여름엔 진짜 덥고, 겨울엔 진짜 추워요. 지금 농성장에 아크릴 상자 설치한 이유가 바람이 너무 확 몰아치니까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예요. 그리고 전기도 어려움 중에 하나죠. 광화문 통로에 두개의 전기가 들어오는데, 상업시설과 연결돼 있다보니 초반에는 문제도 있었어요. 전기를 나눠 쓰다 보니 상업시설 전기가 나가 난리가 났었거든요. 지금은 경험으로 학습해 그런 문제는 없어요.

사실 그런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너무 속상했는데.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만드는 경우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농성장 바로 뒤쪽에 전광판 가려진 부분이 있거든요. 거기에 2009년도 드라마 광고가 붙여있죠. 도대체 몇년전이지...(웃음) 한번은 광고업자는 속이 타서 우리한테 손해배상 청구하겠다고도 했었죠.

또 지금은 사라졌는데, 농성장 옆으로 화장품가게가 많이 있었어요. 그분들도 장사가 안 되면 우리 탓이라고 하는거예요. 천막 때문에 시야에서 덜 보인다고 생각하니까 피해 보고 있다고 속상해 하시는 거죠. 결국 가게들이 재계약 안하고 나가긴 했는데, 그런 항의 받을 때마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문제일까 생각하게 되고…….

이윤경 / 되게 깊은 생각 했네요. 저는 항의받으면 가서 뭐라도 샀어요. 화장품 정말 안사는데, 처음 화장품가게에서 뭘 산 곳이 거기인 것 같은데.(웃음)

이형숙 / 자의 반 타의 반, 농성장 활동가들이 화장품 가게에서 쇼핑을 많이 했죠. 하하

박현 / 저도 핸드크림 안 바르는데 그냥 가서 샀어요.

이형숙 / 첫 해 겨울은 정말 추웠어요. 해치마당 바람이 너무 심해서, 겨울에 추워서 말도 못해서 영상만 틀어놓은 적 있어요. 지금은 비닐 천막이 아니라 나무 천막이지만, 첫해 천막은 정말 추웠어요. 정말 추워서 연말연시 명절 때 대부분 공휴일에 사수하는 사람이 없는데, 그때 체감온도가 농담으로 영하 40도라고 한 기억이 난다.

아무리 전기장판 틀고 온열기 갖다 놔둬, 그냥 어는거예요. 아마 그때 마음은 이렇게 오래 갈거라 생각 못했죠. 그래서 첫 해는 춥기도 추워서 뭔가 분하더라. 지금 생각해도 으~~~~(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만 들어도 힘듦이 느껴진다. 농성장을 계속 해야 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농성장 유지 결정은 어떤 식으로 이뤄졌나.

이윤경 / 2년차까지는 회의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안건으로도 올라오지 않았어요. 2013년 초와 2014년 초, 그리고 8월 전국장애인활동가대회를 하는데 그때 농성이 매번 아주 민감한 안건이 되는 거예요.

전장연에 한해서 말하면 1월에 전체 계획을 짜는 회의를 하는데 농성장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농성투쟁 어떻게 할 거냐’, ‘얼마나 힘든줄 아느냐’, ‘돈도 많이 든다’ 그때마다 뭔가 지금 그만두면 안될 것같은 이유들이 생겨요.

예를 들면 2013년에는 장애등급제 폐지한다는 대선 공약이 포함되기도 했어요. 그때 ‘공약에 넣었는데, 공약에 있는거니? 정부가 폐지를 하건 안하건 지금 접을 수 없는 것 아니냐. 최소한 공약에 대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봐야지. ‘6개월 더 하고 판단 해보자’ 고민들이 많았죠. 그리고 1년쯤이 됐을 때인가, 변하는 것도 없고 당시 정부는 공약만 있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었죠.  반년만 미뤄보자. 그러면서 더 가보고. 나름 내부에서 치열하게 논의하고 결정했구요.

부양의무자 기준은 이야기할 틈도 없었어요. 왜냐면 이건 그냥 안되는 거였어요. 박근혜 정부 당시 부양의무자 기준은 바늘 틈만큼도 들어갈 틈이 없었어. 이건 의제를 알려낸다는 것이 핵심이었지, 당시 정부에는 아무 가능성이 없었거든요.

박현 / 서울 지역만 보게 되면, 김주영이랑 송국현 동지의 사망이 굉장히 컸어요. 상처가 컸어요. 장애등급제로 지원을 받지 못해 혼자 있다 화마를 피하지 못한 사건이어서 피해가 더 와 닿은 사건이에요. 전날 농성장에서 봤던 사람이 사고를 당해서 죽었으니까. 기가 찼어요. 그 다음에 자연스럽게 넘어갔던 것이 24시간 지역별 투쟁. 활동가들이 전념했던 것 같아요. 그랬던 기억이 나요.

김윤영 / 어떤 식으로 토론 해도 결국엔 우리의 농성을 그만둘 수 없는 이유를 찾았던 것 같아요. 계속 싸워야 할 이유가 생겨나기도 했고, 광화문 농성장이 주는 의미가 있었던 거죠…….

광화문 농성 기간 동안 대통령이 두번 바뀌었다. 먼저,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 날 광화문 농성 분위기가 궁금하다.

이형숙 / 당시 19일이 선거였으니까 그전에는 후보가 어디든지 가면 우리는 달려가야돼요. 밤이건 낮이건, 특히 서울에서 선거 유세 많이 하니까 선거유세 제보만 들어오면 무조건 달려가 요구안을 소리쳤죠.

이윤경 / 사실 우리의 의지를 전달하는 것보다 대선 다음날 진짜 힘들었는데…….

김윤영 / 대선결과 나온 날 광화문 사수를 위해 현장에 있었거든요. 투표 끝나고 광화문 농성장에 앉아 있다가. 한 8시쯤 사람들 다 가고, 당선확실 올라오니까 하……. 그냥 잘 수 없다 싶었어요.

지나가던 어떤 분들이 우리 농성장 발로 차면서 ‘박근혜 당선됐으니까 이런 거 쓸어버려야 한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더군요. 심지어 ‘박근혜 당선 됐으니 장애인들도 좋은 일 있을 거다’ 하면서 5만 원씩 넣어주신 분도 있었어요. 황당했죠. 정세판단 못하시는 거죠.

농성장에서 손전화로 중계보고 있다가 나가봤는데, KT건물에 태극기 쏘고 있고.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상앞 부터 해치마당 다 덮은 큰 태극기 펼치면서 환호하는 사람들이 몰려 있었어요. 진짜 하……. (몸서리치며)농성장 문도 조금 일찍 닫았어요. 밖이 너무 흥분상태였거든요. 당시 광화문역사는 새벽 1시에 셔터가 내려오는데 그날은 12시 전에 내렸어요.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고 아예 내려버린. 그날은 되려 광화문역사의 결정이 감사했어요.(웃음)

박현 / 사실 가끔이지만 역무원이 보호도 해줘요. 술먹은 사람들 지나가면.(웃음)

이윤경 / 농성장을 지키는 문제는 다들 매우 힘들어하고, 12월에 잠정적으로 대선이 끝나고 정리하겠지란 마음을 가졌기에 힘들어도 했는데,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니 당황한거죠. 계속해야되는건가. 뭐랄까. 당장 접자 이야기는 못하지만…….

김윤영 / 사실 내가 했었어. ‘19일 투표하고 20일 농성 접는 것을 미리 선포해놓자’고. 박경석 대표에게 계속 제안했어요. 당선되고 나서 철수 시점 못잡는다. 우리는 요구했고 평가하고 일단 한번 접자 했는데…….

이윤경 / 안 받아줬죠?

김윤영 / 예. 그렇습니다.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웃음)

이형숙 / 사실 그때는 파주남매 영결식 있어서 11월 정신이 없었어요. 활동지원 24시간 있었었고요. 그런데 우리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후보가 당선되고 나니 방법이 없었죠……. 그런 것들이 아주 묘하게 얽혔던 것 같아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된 이후는 어땠나.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윤경 활동가는 광화문을 얼굴이라고 표현했다. “광화문은 얼굴이다. 활동가들이 힘든 점을 이야기 하면서도 서로 지치지 않고 격려한다. 모두 힘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농성장에서 지키고 있을 때 얼굴과 오버랩 되면서 보여요. 저 사람은 저 자세로 있었는 데, 저렇게 인증샷을 올렸는 데 그렇게 얼굴이 떠오른다. 농성장은 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하루하루고 5년이고 투쟁이었고 지금까지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얼굴입니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이윤경 활동가는 광화문을 얼굴이라고 표현했다. “광화문은 얼굴이다. 활동가들이 힘든 점을 이야기 하면서도 서로 지치지 않고 격려한다. 모두 힘내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농성장에서 지키고 있을 때 얼굴과 오버랩 되면서 보여요. 저 사람은 저 자세로 있었는 데, 저렇게 인증샷을 올렸는 데 그렇게 얼굴이 떠오른다. 농성장은 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하루하루고 5년이고 투쟁이었고 지금까지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얼굴입니다.”

이윤경 / 바뀐 것은 많죠. 아주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정치라는 건 사실 굉장히 뭐랄까. 서로의 이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겠지만, 어쨌든 정부가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한테 말을 거는 것. 대화하자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 그런 시도? 우리는 만날 대화하자고 면담요청서 지금까지 보낸 게 몇 백통이 될텐데, 그 요청서 날렸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쪽에서 면담 답이 오고, 농성 건 갖고 이야기하자고 내용이 어떻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듣고 말할 준비가 돼있는 정부라는 것이 굉장히 다른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야, 이제 뭐라도 해볼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 자신감? 한 번에 다 바뀔 거라는 기대는 안하지만, 좀 더 해보면 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우리 안에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경계하는 것도 있는 것도 있고, 저도 그렇고 내부적으로 너무 긍정적으로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긴장이 확실히 느껴져요. 누가 어떤 발언을 하건, 예를 들면 ‘문재인 정부에서는 이런 게 될거다’ 이런 이야기 아무도 하지 않고 우리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 어떻게 될지 모른다,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다라고 말해요. 긴장감이 우리 안에 있는거지. 한두번 뒤통수 맞은게 아니니까…….

이형숙 / 가장 직접적인 변화는 보건복지부 장관을 두 번이나 만났다는 것?(웃음) 그것만 해도 바뀌지 않았나. 같은 맥락이죠. 우리가 이야기하면 만날 수 있겠다는…….

김윤영 / 실제 그래서 바뀐 것이 있냐고 하면 당연히 아니죠. 아직 바뀐 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이랑 다른가? 하면 사실인거예요.

그런데 그게 문재인 대통령의 등장으로 그렇게 됐나? 사실 그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부양의무자 기준, 장애등급제를 알게 된 거는 5년 동안 우리가 만들어온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대통령 공약이 될 수 있었던 거고, 대통령 행보에 앞으로도 부채질 할 것이고, 갑자기 사람이 ‘뿅’ 나타나서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차츰차츰 바꿔 나가고 있다.

실제로 처음 시작했을 때랑 지금은 정치세력으로 신경 쓰기 시작했고,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돼 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바뀐 것이 없다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많이 성장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한미 FTA 촛불집회를 비롯해 지난해 촛불집회까지. 광화문 농성장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함께 연대하고 투쟁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리고 연대하면서 생기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몇 가지만 이야기 해 달라.

김윤영 / 공동행동 만큼 엉덩이가 가벼운 조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진짜 날아가요. (모두 웃음). 하하하 사실 이게 안 쉽거든요.

이윤경 / 연대 진짜 많이 했고, 연대 요청 들어오면 다 하려고 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다갔지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지만……. 광화문 폐지 농성이 외롭지 않게 싸울 수 있는 힘도 연대에서 만들어진거죠.

지난해 2차 촛불집회 때 였던 것 같은데, 갑자기 사람들이 물결처럼 내려오는 거예요. 촛불집회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였는데, 막 사람들이 내려와서 우리가 허겁지겁 앰프 키고, 계속 이야기했어. 녹음해놓은걸 틀어놓은 것처럼 ‘여기는 지금 장애등급제 농성장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면서 서명하고 가고, 진짜 서명 많이 받았고 모금도 많이 했어.

그날 사람들 눈이 반짝거렸지. ‘이제 시작이구나. 정국이 열렸구나’, 그래서 막 광화문 중심으로 선전전 서둘러서 준비하고. ‘박근혜 퇴진하라!’만 외치면 모든 사람들이 눈이 반달눈이 되서 우리 쳐다보고 막 서명해주고. 그때 원 없이 팻말 만들고…….

김윤영 / 문제도 있기는 했어요. 박사모 조직이 파이낸스 쪽에서 모여가지고 집회하기 시작했는데, 가장 먼저 타격 받은 게 우리 농성장이었어요. 교보빌딩쪽으로 나가려면, 우리 농성장 거의 지나게 되는거죠. 박근혜 퇴진 팻말 보자마자 뜯고 폭행하는 것이 일상다반사로 아침마다 일어났었어요.

태극기로 기분 나쁘게 머리 가슴 배 계속 찌르고 뭐라하고 진짜 폭력적인 언행도 많이 하고 이러고 있는 중이었어요.

어느 날 누가 뭐를 훅 던지고 갔는데, 거기 한 활동가가 이동하려고 휠체어를 뒤로 쭉 뱄는데 펑! 어? 무슨 일이지? 난리가 난거예요. 진짜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 사람들이 똥 폭탄을 내렸놓고 갔었던거죠.

이형숙 / 그 다음날부터 종로 경찰서에 농성장 시설보호 요청을 했죠(웃음). 그리고 우리를 향하던 방패는, 우리를 보호하는 방패로 돌아선 일도 있었죠.

김윤영 / 그러자 우리를 괴롭히던 이들이 외치더군요. ‘니네들이 민중의 지팡이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책임자 나오라고 해!’(웃음)

수많은 투쟁, 연대부터 여름·겨울 농성장 지키기 까지. 체력 소모가 심할 것 같다. 특히 장애인 활동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윤경 / 장애인 활동가들이 확실히 빨리 아프고, 많이 아프고 여기저기 아파요. 아픈 사람들이 경찰 앞에 있으면 마음이 두근거리고 뒤로 나왔으면 좋겠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다 그럴거예요. 더 속상한 것은 사고에 취약해요. 불이 나면 못 도망가고, 아프면 빨리 치료 못받고 참아야 하니까. 그러다가 죽고…….

그런 문제제기를 들어요. ‘장애인한테 이거 너무 힘든 일이다,’ ‘중증 장애인들의 몸상태를 알고 하는 거냐’ 근데 또 생각해보며, 이런 결정을 누구 혼자 하지 않고 같이 결정해요. 매번, 이런 이야기 나오면 난감함이 있어요. ‘맞아. 같이 살자고 하는데, 사람들이 힘들고 피곤하고 아프고, 그러면 하지 말자고 할 수도 없고 적당히 할 수도 없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비장애인이니까 사실 내가 백번 알고 있다고 해봐야 사실 모르는 거고, 그랬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되지. 조용하고 결정하길 기다려야 되나’ 생각이 좀 많이 들고, 어떻게 하면 덜 아프고 덜 힘들게 함께 싸울 수 있을까 고민은 매일 해요.

▲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박현 소장에게 광화문은 상처다. “광화문 농성 하고 나서 죽었던 주영이, 계속 연이은 죽음들에 대해서 많이 딜레마가 심했어요. 내가 앞에 나가서 뭔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스스로 공포감이 있었죠. 사람들의 죽음에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저한테는 상처였고, 아픔이었는데. 또 하나 괜찮은 것은 농성장이 대한민국 역사상 광화문 역사에서 농성을 하는 게 우리가 처음이에요. 거기에 많은 대단히 각자의 농성하고 천막짓고 했던 모습 보면서 이게 힘없는 사람들의 해방구가 되겠구나. 참 좋구나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는 아팠어도, 좋았던 .애환입니다.”
▲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박현 소장에게 광화문은 상처다. “광화문 농성 하고 나서 죽었던 주영이, 계속 연이은 죽음들에 대해서 많이 딜레마가 심했어요. 내가 앞에 나가서 뭔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스스로 공포감이 있었죠. 사람들의 죽음에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구나. 저한테는 상처였고, 아픔이었는데. 또 하나 괜찮은 것은 농성장이 대한민국 역사상 광화문 역사에서 농성을 하는 게 우리가 처음이에요. 거기에 많은 대단히 각자의 농성하고 천막짓고 했던 모습 보면서 이게 힘없는 사람들의 해방구가 되겠구나. 참 좋구나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는 아팠어도, 좋았던 .애환입니다.”

김윤영 / 되게 안 익숙해지는 것 같아요. 장애운동을 하면 너무 치열하게 싸우니까. 저는 사실 정말 싫은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휠체어에서 내려 기어가는 투쟁 있잖아요. 하나도 안 익숙해지고, 이걸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밖에 안 들고 너무 속상하고, 사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대단한 권력이나 금은보화 아니잖아요. 1인 생계급여 49만 원? 안 죽고 살 수 있는? 조금 더 안전한 무엇? 그것도 나 혼자 갖겠다는 것 아니고 그렇게 돼야한다는 것인데, 이것 때문에 바닥을 기어야 되고, 밥을 굶어야 하고, 추운 데 찬 데서 자야하고, 권력자에게 온갖 모욕도 받아야 하고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익숙해지지 않고, 안했으면 좋겠죠.

그리고 진짜 싫은 것이 노역투쟁이에요. 정말 너무 싫어요. (이형숙 공동집행위원장을 보며)정말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박현 / 그런데 막상 쉬라고 시간을 주면 못 쉬어요. 뭐하고 쉬어야하는지 모르겠어요. 대부분 활동가들도 쉬라고 2박3일 주어진다 해도 실제로 못 쉬어요. 건강 챙기는 게 잘 안된다. 웃으면서 이야기하기엔 가슴아픈 이야기인데,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농성이에요. 아프다고 해도아파도 집회있다고 하면 아침일찍 나와서 해요. 민중총궐기때 못나갔는데, 그때도 집에서 뉴스보고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자꾸 쌓이는 것 같아요.

이형숙 / 만약에 집회가 있고, 나가야 될 일이 있는데 못나가면 마음이 불편해서 나가는 것이 편해요. 촛불집회 때도 쉬어야 다음 일정을 소화 하는데 오히려 나가서 춥고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나가야 편해요. 힘은 들지만, 나가서 밖에 나가서 싸워야지 세상이 바뀌는 것 같으니까 가만히 있는 것보다. 그게 광화문 농성을 버티지 않았나.

현재 농성장 이야기가 궁금하다. 성과가 있다면?

이윤경 / 일단 예전에는 2성급 호텔 지금은 5성급 호텔 정도? 하하하. 일단. 전장연 조직규모가 엄청 커졌어요. 센터 수가 많아졌다 느낌이 아니고, 아무리 센터가 많고 단위가 많아져도 집회할 때 모이는 인원이 그에 비례하게 많아지진 않거든요. 그런데 광화문 농성이 있어서, 계속 싸우는 거점이 있으니까 이걸 중심으로 우리의 조직이 양적으로 질적으로도 커지는 거예요.

이번 420 투쟁때 1,500명 모였었거든요. 전장연 역사에 이런 적이 없어요. 이번 5주년때 또 1,000명이 넘었어요. 왜 이렇게 됐지? 아무리 생각해도 광화문 농성 중심으로 해서 계속 끊임없이 싸워온 거? 다른 것 하지 않고 의제를 내부에서 제기하고 외부로 꺼내서 계속 싸움을 만들어내고 하니까 그걸 동의한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김윤영 / 엄청 많은 사람들이 농성장 같은 경험 공유하는 것이 굉장히 신기한 일인 것 같아요. ‘매일매일 농성장에서 서명 받고 세종문화회관 화장실 위치 설명하고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되게 재밌다’ 이 힘이 엄청 크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진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원래 빈곤, 장애인 겪는 문제는 시각화 되지 않잖아요. 사회 어딘가에 있는  소외된 목소리로 돼있는데, 이 사람들이 쳐다볼 곳이 생긴거잖아요. 광화문에서 이걸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이 사람들이 현실을 바꿀 거라고 알고 있고 그런 것이 큰 변화인 것 같아요.

끝으로, 함께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이형숙 / 함께했던 동지들이 있었으니까 광화문 농성이 2012년부터 이어졌고 앞으로도 광화문 운동을 함께 할 목표가 있고, 목표를 위해 앞으로도 나아가야 한다. 변함없이 의심하지 않았고 함께 한 것처럼 앞으로도 쭉 정면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한다.

김윤영 / 끝까지 우리 손으로 하는 거다. 이 문제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우리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끝날 때까지 우리손으로 끝내야 겠구나 생각이 들고 함께 만들어 가자.

박현 / 보여지지 않는 활동가들이 있다. 물이 안떨어지도록 물을 공수해준 활동가도 있었고, 보이지 않게 열심히 청소해줬던 활동가도 있고……. 그런 동지들이 있었으니까 우리가 활동하는 거다. 그런 동지들에게 고맙다.

이윤경 / 당신들은 제 자부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