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지원, ‘대행’ 아닌 ‘지원·의사전달’ 역할로
의사결정지원, ‘대행’ 아닌 ‘지원·의사전달’ 역할로
  • 황현희 기자
  • 승인 2017.09.06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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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보호보다는 위험 감수할 수 있도록 해야
생각·선호를 알 수 있도록 다양한 주관적 경험 제공 필요
▲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 추진 공동행동 등 장애계 단체는 지난 5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의사결정 지원제도 도입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 추진 공동행동 등 장애계 단체는 지난 5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의사결정 지원제도 도입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지적장애인 ㄱ씨가 5억 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 유부남 ㄴ 씨가 5억 원 재산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ㄱ 씨는 ㄴ 씨에 이끌려 자신이 가진 돈을 주고 있다. 이런 속도라면 1년 안에 5억 원을 모두 ㄴ 씨에게 줄 가능성이 있다.

ㄱ 씨가 ㄴ씨에게 5억 원을 주려고하는 의사는 존중돼야 하는가? 존중되면 안 되는가?
ㄱ씨가 ㄴ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를 막아야 하는가? 막지 말아야 하는가?

·ㄷ 씨는 조현병이 있다. 증상이 발현되면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가두려고 한다는 강박으로 이를 거부하기 위해 고함을 지르고 때에 따라 폭행하기도 한다. 어느 날 증상이 발현된 ㄷ 씨에게, 그의 친구는 병원 치료를 제안한다. 하지만 ㄷ 씨는 병원 가기를 거부했다.

ㄷ씨의 의사는 존중돼야 하는가? ㄷ 씨 친구 말대로 비자의 입원을 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개방병동에서 지역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다른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하는가?

·ㄹ 씨는 정신요양시설에서 20년 동안 살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위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장 시설에서 나가고 싶지만, 퇴소하게 되면 갈 곳이 없다. 스스로 식사를 준비하거나 일상생활 해본 적이 없기 때문.

ㄹ 씨의 희망대로 그를 퇴소 시켜야 하나? 시설에 계속 있도록 해야 하는가?

인간의 기본 욕구이자 권리인 자유와 자율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도덕적 원칙이자 법적 원리인 의사결정. 개인은 외부로부터 속박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규율 또는 도덕 가치들에 따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적극 선택할 수 있다.

의사결정 개념에 기반을 두고 사례를 살펴보자. 개념대로 라면, 사례 당사자 모두 어떠한 의사 결정을 하더라도 타인이 간섭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ㄱ 씨, ㄷ 씨, ㄹ 씨 모두 의사 결정이 어렵다는 다른 누군가가 판단·의사를 대신 결정해준다.

이에 한국사회가 그동안 보여 온 장애인 의사결정 지원방식에 비춘다면, ㄱ 씨는 후견인이 그의 돈을 못 쓰게 만들고, ㄴ 씨와의 만남을 차단할 것이다. ㄷ 씨는 정신병원에 비자의 입원될 것이다. ㄹ 씨는 의지와 상관없이 시설에서 계속 지내야 한다.

모두 개인의 선호 혹은 자유에 반하는 의사 결정이다. 과연 이것이 의사결정 능력이 어려운 사람들의 의사 결정을 도와주는 진정한 의미의 의사결정 지원 제도인가?

당사자의 생각·의견이 존중되는 의사결정지원제도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지난 5일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렸다.

전문가들은 기존 의사결정지원제도가 당사자 본인의 의사·선호가 존중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며, 당사자 본인 욕구가 최대한 실현되고, 당사자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역할로써의 의사결정지원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잉보호 NO, 당사자가 위험 감수 할 수 있도록 해야

▲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철웅 교수.
▲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철웅 교수.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철웅 교수는 의사결정이 어려운 사람들의 위험을 원천 차단하는 방식의 의사결정지원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가령, ㄱ 씨가 갖고 있는 돈을 지키고 ㄴ 씨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원천 차단하는 것이 의사결정지원이 아니라, 부당한 영향력 안에 있는 ㄱ 씨를 설득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선택은 ㄱ 씨의 몫이다.

제 교수는 “당사자를 부당한 영향력에서 보호해줌과 동시에 적절한 수준의 위험은 당사자가 그것을 감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에 필수적. 우리 모두 의사결정에 위험이 있다. 물론 5억 원을 모두 ㄴ 씨에게 주는 것은 막아야 겠지만, 적정한 위험을 보호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과잉보호는 지양돼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현재 한국의 의사결정대행 관련 제도 등이 당사자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고 꼬집으며, 의사결정지원 방식이 당사자의 욕구와 희망을 존중해서 그것들이 법적 효력을 발생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의사결정지원제도는 기본적으로 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 당사자가 정하지도 않고 의사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가족, 친족, 그 밖의 관계자가 사회보장급여를 신청하거나, 의료시설·요양현장에서 의사대행자의 의사결정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 대표 예이다.

제 교수는 “진정한 의미의 의사결정지원제도는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뜻을 해석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대행자가 당사자보다 뛰어난 어떤 것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말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전달해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의사결정의 기반이 되는 ‘주관적 경험’ 마련해줘야

▲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동석 정책위원장.
▲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동석 정책위원장.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동석 정책위원장은 다른 사람이 누군가를 대신해 의사를 결정하는 대체의사결정방식이 아닌 당사자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원해주고, 이후 자기결정에 따라 장애인을 대신해 주장·실행되도록 하는 지원의사결정방식이 정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의사결정은 합리적인 이성만으로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이성과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이에 그는 합리적 이성 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이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통해 얻는 다양한 의사소통, 의사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이 주관적 경험을 할 수 있고,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이 위원장이 제안하는 구체화된 내용은 ▲의사결정과 관련된 정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원 ▲정보를 기억 속에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 ▲의사결정 과정으로써 관련 정보를 사용하거나 정보의 비중을 알 수 있도록 지원 ▲자신의 결정을 언어, 수화, 기타 다양한 방식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도록 지원 등이다.

그는 “의사결정지원제도로써 ‘장애인의 판단 능력이 결여 돼 있다’는 전제를 하고 있는 성년후견제는 최소화 하는 것이 맞다. 후견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지원의사결정제도를 확립해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