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만해도 고깃집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보면 껌을 파는 분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그들에게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식사 후 껌을 씹는다는 것도 좋기는 하였지만 비록 시중가보다는 비싼 껌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나눔을 실천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껌파는 분들 중에는 건물이 몇 채가 된다느니,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느니, 껌을 판 돈이 그분들에게 가지 않고 조직폭력배들에게 간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들의 나눔의 행위는 멈추어 버렸다.

사회정책을 디자인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승인이 필요하다. 

이 사회적 승인이란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는 세금을 어느 정도로 분배할 것인가?’ 에 관한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배분동기이다. ‘얼마나 주어야 일을 열심히 할까?’ 라는 물음처럼 ‘얼마나 나누어야 시민들이 승인할까?’ 라는 물음이다. 앞서 제시한 근로동기와 배분동기는 동기부여의 측면에서 보면 다르지 않은 메카니즘(Mechanism)을 가지고 있다.

사회보장급여액이 충분하게 지급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사회적 승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껌을 파는 사람들에게 나눔을 멈춘 것처럼 우리가 자원을 나누는 그 대상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만 분배를 용인한다는 것이다. 근로에 대한 보상도 이것과 같다. ‘보상을 너무 많이 하면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니, 임금분배도 역시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만 그것을 용인한다. 사회적 약자의 자활과 조직 구성원의 성장을 위한 근로동기 촉진을 위해 분배를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기저에는 사회와 조직이 정한 수준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배의 동기를 매슬로우(Abraham Harold Maslow)의 욕구 5단계를 통해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분배에 의해 남이 나보다 나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생존의 요구). 둘째, 인간은 자신이 처해진 사회구조가 변화되지 않는 선에서 불평등을 허용한다.(안전의 욕구) 셋째, 분배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소속되고 싶은 대상이나 집단이 분배를 원하지 않는다면 분배를 거부한다.(소속의 욕구) 넷째, 인간은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나 범위 안에서만 분배를 허용한다. 반대로 자신의 명예와 권력에 손상이 온다고 예측되면 분배행위를 거부한다.(존중의 욕구) 다섯째, 생존과 안전, 그리고 소속과 존중이 필요하지 않거나 구축된 인간은 분배를 허용한다.(자아실현의 욕구)’ 이다. 이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분배의 사회적 승인은 개인과 집단의 ‘욕구가 허용’되는 기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조직이든 사회이든 분배의 동기를 승인받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제시한 바대로 개인과 집단의 욕구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욕구는 생존, 안전, 소속, 존중, 자아실현 등 인간내면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이를 ‘권리허용치’라고 규정한다. 때문에 사회정책에 있어서 효율성 논의뿐만 아니라 사회적 승인을 얻어낸다는 것 자체도 상당한 모순적 상황이다. 결국, 일을 한다는 것과 일에 대한 보상이라는 것은 금전적 보상과 효율성,그리고 사회적 승인을 통해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노동과 분배의 동기부여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기본소득 담론으로 이어진다. 근로의 유무와는 관계가 없는 기본소득이라는 개념 자체가 효율성, 근로동기, 사회적 승인이라는 기존 사회정책의 모순적 상황과는 대립된다.

이제 기본소득이라는 명제는 좌파정권이나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소유물이 아니다. 자본주의 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경제포럼(WEF)이 2016년 다보스포럼에서 다룬 주제가 ‘포용적 성장’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다룬 주제가 기본소득이다.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일론 머스크(Elon Reeve Musk), 샘 올트먼(Sam Altman)등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의 CEO들이 주장하는 것이 또한 기본소득이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의 재원이 자본주의에서 축적된 그들 기업의 수익이고 이들은 이것을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승근배 계명복지재단 양지노인마을 원장<br>
승근배 계명복지재단 양지노인마을 원장

그들은 왜 일을 했을까? 그들은 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일을 한다는 것과 그들 통해 얻어지는 부의 축적은 아무 의미를 주지 못한다. 최종 목적은 어찌 되었던 간에 공동체의 유지라는 사회적 기여이다. 결국 자아실현의 욕구까지 온 것이고 때문에 기꺼이 분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의미에서 발견된다. 일을 하는 의미, 나누고자 하는 의미는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단, 사람마다 그 의미가 작동하는 순간이 다른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권한과 자율성’, 그리고  ‘권리 허용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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