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사람들은 감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늘 눈에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학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 문제를 얘기할 때도 사람들은 ‘장애인’만을 논의한다. 손발이 불편한 사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정신기능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 등만을 놓고 생각하고 얘기한다. 학자고 아니고를 떠나 모두들 이렇게 눈에 보이는 장애와 그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는 실체에만 초점을 맞추어 문제를 찾고 분석하는 데 익숙하다. 한 마디로 모두들 ‘장애를 가진 구체적인 실체’로서 ‘장애인’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꼭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손으로 만져질 수 있는 것들만 존재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흔히 ‘사회’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회란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체는 ‘사회’가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체적인 ‘개인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회’라는 표현을 쓴다. ‘한국사회’, ‘자본주의 사회’, ‘지역사회’ 등등. 그렇다면 우리의 언어 용법에 이미 사회라는 것이 확고한 ‘실체’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또 다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분석할 때는 언제나 감각적인 대상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가 장애의 문제를 논할 때마다 언제나 그렇게 감각적 대상으로서 ‘장애인’에만 분석의 초점을 맞추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기능이 온전치 못한 구체적인 ‘개인’으로서 ‘장애인’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정말 중요한 또 하나의 차원을 놓칠 수 있다. 즉 ‘개인’에만 눈길을 돌릴 때 우리는 그 ‘개인’들로 구성되는 ‘사회’라는 중요한 실체를 간과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로서 ‘장애인’과 ‘장애사회’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학자들이든 일반인들이든 모두가 입만 열면 ‘장애인’을 말한다. 이렇게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몸이나 정신 기능이 온전치 못한 어떤 구체적인 개인만이 들어 있다. ‘장애(인) 문제’라는 표현을 쓸 때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애’를 가진 개인들이 겪는 문제라는 의미가 중심을 차지한다. 그것은 정책을 다루는 정책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장애인복지 정책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장애인수당, 장애인서비스 등 거의 대부분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개인들을 위한 물질적 지원이거나 상담 서비스가 대종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모두 한 국가의 복지 수준을 논의할 때에도 장애를 가진 구체적인 개인들에 대한 국가사회의 복지급여와 서비스 수준이 어떠하냐만을 따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장애를 가진 개인들이 그 사회에서 얼마나 체계적으로 불이익을 받고 살아가느냐, 얼마나 차별과 억압, 소외 속에서 살아가느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장애를 가진 개인들의 처지를 개선해줄 것을 요구하는 활동에 몰두하게 된다. 물론 장애인들의 차별과 억압, 소외를 개선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전부일까?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눈을 장애를 가진 구체적인 개인들이 아니라 그런 개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주체로 돌려보자. 그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장애를 가진 개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해당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의 총체, 즉 장애인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는 그 사회 자체인 것이다. 한 마디로 장애를 가진 개인들에 대한 차별과 억압, 소외와 배제의 주체는 장애인들을 둘러싸고 그들에게 물질적·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사회 전체가 바로 그 주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나 장애인은 모두 사회의 산물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장애 역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창출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각을 달리하여 본다면 장애인의 문제는 장애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장애인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개인에만 초점을 맞추는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장애사회’라는 개념을 체계화하고 정교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 중에 장애를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현대사회는 위험사회이다. 그것도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위험들로 가득한 사회가 바로 우리들이 매일 숨쉬며 살아가는 사회인 것이다. 이렇게 장애가 장애를 가진 개인의 자율적 선택이거나 적극적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없다는 것을 떠올리면 장애사회의 개념은 더욱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취급하고, 그래서 장애‘인’들이 모두 장애‘인’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는 그 자체로 ‘장애사회’가 아닐 수 없다. 장애인에만 초점을 맞추는 시각은 그들이 신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비정상이라고 보는 시각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장애인이 장애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회를 장애사회로 개념화하게 되면, 장애인의 문제나 장애인의 차별과 억압은 장애인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장애사회’의 문제가 되며,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도 ‘장애인’의 열악한 복지 수준이 아니라 ‘장애인’을 비복지 상태로 내모는 ‘장애사회’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대한민국이 얼마나, 그리고 어떤 면에서 ‘장애사회’로 남아 있는지에 주목하고 장애사회를 뜯어고치는 데 힘과 정열을 모아야 할 때가 되었다. 물론 그 책임은 장애인 개인이 아니라 그들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사회, 즉 우리 모두의 책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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