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welfare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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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소수자,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의 문제다

인권은 사람마다 굉장히 많은 생각의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진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권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인권, 차별받는 사람들의 문제, 이런 여러 가지가 있죠. 뭐 일반적으로 천부인권이라고도 하고, 하늘에서 준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인권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그리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의 문제가 1차적으로 존중돼야 된다는 겁니다.

최근 불거졌던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축소 문제는 인원 감축의 문제인데, 이명박 정부는 “굉장히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 접근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인권위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끔 종속시키는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인권이라는 것이 무조건 정부의 방침이나 정권 방향에 따라가는 것들이 아니잖습니까.
독립성의 문제도 있고. 특히 정부에 쓴 소리도 할 수 있고, 반대되는 목소리도 낼 수도 있는데 그런 자신들에게 반하는 성격들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극복해야 되는 대상이 아니다

명칭이라는 것은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병신, 불구자, 이렇게 이야기하던 시대가 있었죠. 1990년대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인복지법으로 바뀌면서, 장애자에서 장애인으로 공식적인 법적용어가 된 거죠.

사회적 낙인화의 문제를 용어를 통해서 얼마나 벗어나려고 했던가에 대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우라는 말도 그런 일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병신이냐, 불구자냐 아니면 장애자냐, 장애우냐, 장애인이냐 이런 것들이 규정되는 과정 또한 사회적 낙인으로부터의 투쟁한 과정이라고 규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시혜와 동정의 대상, 차별의 대상, 더 이상 사회적으로 낙인화 되는 과정들 속에 취급되지 말아야 되는 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끄러워하고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당하게 장애인이라는 현실을 수용하고, 사회적인 차별을 어떻게 해소시킬 것인가’에 대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재활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은 장애인이 의료적 차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해서 장애인 문제가 풀릴 수 있다면 의료기술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맞죠. 그로써 장애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차라리 황우석 박사를 잘 키워서 알약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죠. 그리고 이것이 신의 영역이라면 교회나 다른 곳에 가서 열심히 기도해 일어나서 걸으면 되죠.
이것들은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장애라는 손상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차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중점적인 거죠. 이걸 마치 재활이 장애인 문제의 모든 것들을 해결한다는 양으로 모든 정책 의사결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합시다’, 그 잔인한 말에 투쟁한다

장애인차별! 철폐! 투쟁!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용어가 과격하죠.
“장애인을 사랑합시다”, 아름답죠. “사랑해주세요, 사랑이 넘치는 사회”,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수없이 외쳐도, ‘장애인을 사랑합시다’하고 이야기하면서, 그 내면에는 철저하게 장애인을 이 사회로부터 배제·분리·통제·억압하고 있습니다.

10원을 내면서 동정·시혜 등 모든 것들을 다 끌어내면서, 실제로 1만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무시해버리는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는 분노해야 되죠. 그로 인해서 장애인이 계속적으로 10원짜리 인생만 계속되는 형태로 간다는 것은 문제죠.
그런 형상들을 사랑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장애인운동 장애인 인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류 언론 사이트에 ‘장애인’을 치면 ‘어디 자선파티 했다, 봉사했다’가 주류입니다. 근본적인 사회적 형상·구조의 문제, 투쟁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아요.

말로는 ‘장애인을 사랑합시다’ 하면서 뒤통수치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로 인해 장애인이 가지는 절망감과 분노는 솔직하게 표현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더 이상 ‘사랑해주세요’라고 해서 장애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은 잘못된 사회적 형상·구조에 맞서 정면 돌파해 나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장애인운동, ‘같이 가자’는 뜻이다

정부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랑으로만 행동했기 때문에 과격하다고 표현을 하는 거지만, 그들이 행했던 차별의 문제와 악행에 비하면 오히려 너무 얌전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그들이 당연히 책임졌어야 될 의무에 대한, 그들의 책임에 비하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가서 달라고 하고, 왜 달라고 하는지 요구안 내고, 면담하자고 하는데 묵묵부답이니까 그런 결과가 초래되는 거죠.

이동권 투쟁했을 때 몸에 쇠사슬을 묶고 지하철을 막았습니다. 세상을 향해 “20~30년 이동하지 못해서 집이나 시설에 갇혀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같이 가야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당신’은 1시간여 늦는 것 때문에 그렇게 짜증나고 당장 죽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20~30년 이동하지 못한, 여전히 지금도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겠느냐.

현재 지방의 경우 특별교통수단을 이용하려면 1주일 전에 예약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교통수단으로만 움직여야 하고, 1주일 전에 예약하고, 1번 외출하는 것을 평생해보라고 하면 나라가 혁명이 일어났을 거예요. 안 그래요? 참을 수 있겠어요? 못 참을 거 아닙니까.
인간으로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누구나 보장받아야 될 권리의 문제입니다. 그렇듯이 ‘같이 가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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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권과 활동보조인 제도, ‘누구나, 당연한 권리’

이동권과 관련된 문제는 장애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지하철 역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는데 생기고 나니까 어르신들이 더 많이 타면서 “생활이 좋아졌다”고 이야기 하죠. 2001년도 투쟁할 때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고요.
당시 지하철 철로를 점거하니까 어르신들이 “이 새끼들!”하면서 때렸던 그런 기억도 있습니다.
이동권은 누구나 다 촉구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때 투쟁을 보고 기억했던 사람들이 80살이 돼 허리가 굽거나 힘이 약해져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면 ‘아, 그때 2000 몇 년도에 이래서 투쟁했겠구나’하고 생각하게 될 거에요.
또 나중에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거나 저상버스를 이용하게 될 때, 좀 다르게 다가갈 수 있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이 사회가 굉장히 경제적으로 생각하는 젊은 남자, ‘정상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맞춰져서 이동수단들이 개발되지 않았습니까.
비용의 문제 때문에 그렇게 적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 기준에 못 쫓아가면 개인의 몫으로 돌려졌던 문제들을 확장시켰던 것이죠.

이동권의 문제는 모두가 다 겪어야 되는 문제들 속에서의 권리가 다시 한 번 확인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활동보조인 제도와 관련된 문제는 이동권과 다르게 가장 차별받는 사람, 신체적으로 가장 손상 된 사람들에 대한 지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을 권리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던 사회에 ‘이것이 권리다!’라고 이야기하는 과정이죠.

스스로 밥을 못 먹고, 이동하지 못하고, 신변처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신체적 조건을 가졌다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시설에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역사회에서 생활할 수 있게끔 국가가 책임지고 지원해야 되는 의무고, 중증장애인 당사자들의 권리입니다.

활동보조인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하루 24시간 활동보조인이 필요한 중증장애인이 있지만, 보건복지가족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 달 180시간이면 하루에 몇 시간 안 되지 않습니까.

‘재활’과 ‘자립’, 주체성 왜곡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운동에서 당사자의 주체성이라는 것은 확인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사자의 주체성마저도 말살 당했던 장애인운동의 역사적 과정이 있기 때문에, 다른 운동에 비해서 당사자의 주체성이 구호인 양 이야기 됩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주체성, 여성운동에서 여성의 주체성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여성운동하는 사람한테 “당신들을 가만히 있으시고, 남자인 제가 다 해결해드릴 테니까 집에 있으세요”하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맞아 죽겠죠.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재활은 대리주의, 자립은 당사자의 주체성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재활의 영역보다 자립이라는 영역이 역사적 운동의 과정상 진일보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진일보한 형태는 너무나 보편적인 것이죠. 모든 운동의 구원이나 방향이 아니라 당사자가 주체가 돼야 합니다.

사회적 가치 변화, 통계의 변화, 경제적 변화, 이런 것들은 지금의 재활과 자립이라는 영역들 안에서 복지전달체계를 궁극적으로 장악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히 복지전달체계에서 장애인의 주체성과 당사자의 결정이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회적인 구조의 궁극적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강제력을 가져야 비용의 문제와 부딪히지 않아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만들어졌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나라는 별로 없다!’ 이런 선전하기 좋은 거리, 선전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질적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짐으로써 장애인차별에 관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바뀐다는 것보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어떻게 적용하고 장애인 당사자들이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무기’랄까. 뭐 그런 것들을 활용할 수 있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을 가지고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려고 할 때, 과연 변화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기도 하죠.

최근 마로니에 공원 TTL무대에 경사로가 없어서 제소를 했는데, 한 달 정도 되니까 바뀌더라고요. 비용이 특별하게 많이 들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정부기관과 지자체는 선뜻 개선하려고 할 겁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 기간을 유보시키는 방법 등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으나마나 한 형태로 굴러가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이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소용없다는 문제가 아니라, 이런 한계를 지적하면서 계속 장애인 당사자들이나 장애계단체가 투쟁해나가야 하는 과제로 남지 않는가 싶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얼마나 ‘강제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핵심적입니다.

‘이 사회가 감당해야 될 비용이 얼마냐’ 이런 문제 때문에 한계에 부딪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규제일몰제도 시·청각장애인들의 방송·정보 접근권 문제와 충돌했는데, 결국은 저작권 문제고 돈 문제죠 뭐.
자본주의 사회라는 형식에서 비용의 문제. 비용을 기준으로 얼마나 포용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문제들 때문에 시간을 유보시키는 형태로 가게 된다는 거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올바르게 가야된다는 것은, 이런 것들을 강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렇게 되면 거기에도 많은 저항들이 나타나겠죠. “아직 때가 이르다, 왜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을 적으로 삼으려고 하느냐, 너희들이 장땡이냐” 이런 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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