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수 변호사

저는 우리나라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7대 국회에서는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을 만들었고, 18대 국회에서는 장애인연금법 및 장애인활동지원에관한법률을 만들었습니다.

18대를 국회를 지냈던 사람으로서 발달장애성인이 사회에서 한 국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성년후견제도를 만든 것이 뜻 깊습니다. 그동안 장애인운동의 역사가 신체적장애인 중심으로 흘렀다면, 이제는 소홀했던 정신적장애인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민법에서는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정신적장애인을 법원에 금치산선고신청을 하도록 돼 있습니다. 금치산자 선고를 받으면 선거권도 없어지고, 권리를 다루고 있는 법령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맙니다.

우리나라 민법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출발해 일본을 거쳐 들어왔는데,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금치산제도는 옳지 않다’는 반성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프랑스에서는 1968년, 독일에서는 1991년, 일본에서는 2000년에 성년후견제를 도입했습니다.

발달장애인이 성년 된 이후 직계 가족뿐만 아니라 전문가가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성년후견제도에서 말하는 전문가는 치매노인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가족들이 더 잘 이해하고 돌볼 수 있기도 하지만, 상속 문제와 같이 가족에 의해서만 후견 받는 것은 제도적으로 불편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화된 법인이 후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복수후견인제도까지 만들었는데, 이를테면 재산관리는 변호사와 법무사가 생활에 있어서는 사회복지사가 지원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특히 발달장애인 앞으로 나오는 장애인연금 및 수당이 당사자에게 전달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강원도 원주시 귀래 사랑의 집 사건처럼 양육을 방패삼아 가로채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가 후견인을 지정해 후견인이 당사자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후견제도를 누리기 위해서는 경제적 부담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텐데, 재산이 많은 사람은 시장원리에 따라 보수를 지불하되 저소득층은 국가가 책임을 지도록 합니다.

성년후견제도 시행이 늦은 감이 있지만 18대 국회에서 거둔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꼭 필요한 제도며, 올바르게 시행만 된다면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운 인권국가가 됐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해당 지역의 발달장애인을 파악해 성년후견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년후견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의사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후견인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고,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 후견인을 길러내야 하며, 가족이 후견인 역할을 할 경우에도 전문 교육을 시행해야 합니다.

후견인뿐만 아니라 후견감독인제도가 있고, 법원 또한 최종적으로 감시하는 역할을 하도록 돼 있습니다. 앞서 성년후견제를 도입한 나라들을 보면 후견인은 당당한 고급 직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변호사, 법무사, 사회복지사들도 후견인으로 직업을 변환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성년후견제의 시행일은 7월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빨리 후속법률들을 갖추고, 전문후견인을 길러내는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간혹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어떻게 발달장애인을 끌어안고 가느냐’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제 2만 달러가 넘어가는 세계 7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제도도 아닐뿐더러,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앞서 장애인운동이 굉장히 자랑스럽다고 했는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정치인들이 나서서 제도를 먼저 갖추기보다 장애계단체의 연대와 힘으로 필요한 법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무한 경쟁이 아닌 함께 끌어안고 같이 가는 것,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도 장애인운동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장애를 이유로 법관 임명을 거부당했을 때, 장애계단체의 도움으로 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애인을 지원하는 제도도 없었고,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판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승강기가 없는 대학교를 다니며 정말 어렵게 공부해서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법정에는 승강기가 없다’고 거부당했습니다. 싸우지 않을 수 없었고, 장애계단체가 함께해준 결과 판사가 됐습니다. 늘 그때를 떠올리며 작은 힘을 보태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성년후견제는 ‘문명국가로 가느냐, 그저 그런 국가로 머무느냐’하는 중요한 갈림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에 올바르게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 관심 갖고 지켜봤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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