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미국 미네소타주 주관 변호사 시험 합격

지난 4월,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주관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김현아(31)씨.

변호사 시험을 위해 몇년간 공부에만 매진하다 합격이라는 기쁨을 안아 들고 한국으로 돌아와 재충전의 시간을 보낸지 3개월 여.

인터뷰를 위해 그에게 약속을 청했다. 약속장소에 다다르자 밝은 목소리로 인사가 들려왔다.

한국 여성 시각장애인 최초의 미국 변호사 시험 합격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김현아 씨는, 자신의 수식어가 아직은 조금 어색한 듯 수줍어했다.

빛과 아주 큰 사물 형상 정도만 간신히 구분할 수 있는 시각장애 1급. 소리와 촉감으로 세상을 만나고, 풍부한 감성으로 법을 공부한 그의 꿈이 궁금해졌다.

장애인 교육과 인권을 고민하는 ‘변호사’… “그것이 내가 그린 미래였다”

어릴 때 우연히 들려온 텔레비전 소리. 그 속에서 김현아 씨는 넓은 세상을 만났고, 법조인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 김현아 씨.
▲ 김현아 씨.

어릴 적 한번쯤은 꿈꿔 봤을 법한 미래, 김 씨의 처음도 그랬다. 국제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고, 법정드라마나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목표를 향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하나 더, 김씨는 남들과는 다른 좀 더 구체적인 꿈을 그려나갔다.

부산맹학교에서 초·중·고등부 과정을 수료하는 과정에서 바라본 친구들을 보면서 장애인에 대한 교육과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김 씨는  “부산맹학교에 다니던 시절, 자폐성장애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수업을 따라오는 것에 대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장애 유형과 특성에 맞는 교육 환경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때부터였다. 장애인 교육과 인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교육과 인권이 연관이 없어보이지만 한 사람의 일생으로 생각하면 내가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인권, 즉 사람이 개인 또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리고 행사하는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침해받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단순한 학업 공부 뿐 아니라 좀 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교육학과 법학을 함께하기로 했다.

2004년 공주대학교에 입학한 그가  특수교육과 법학을 복수전공을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김 씨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당시 학교 수업과정으로는 장애인의 교육과 인권에 대해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

그러던 중 지난 2007년 미국 Columbia college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왓다.

김 씨는 “당시 그 곳에서 지내면서 한국보다 발전된 장애인 지원 정책 등을 경험하면서 미국 로스쿨에 들어가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며 “처음에는 편한 삶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하냐는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시작도 안하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에게 가장 획기적이었던 지원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도 장애학생지원센터를 통해 학습지원을 손쉽게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국은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의무 설치 규정이 아니였기 때문에 학업에 있어 어려움을 느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체계적이지 못했던 때였다.

실제 김 씨가 수업에 어려움을 느끼자 교수진들이 직접 나서 교과목을 녹음해 제공하는 등 학습지원이 이뤄졌다.

김 씨는 “물론 한국과 수업 방식이나 교과 과목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힘든점도 있었지만 이러한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해결해 줄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며 “한국 또한 이런 체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꿈을 위한 한 발자국…“내가 느낀 불편과 한계, 바꿔나가야 할 사회를 공부한 시간”

다양한 지원체계 속에서 김 씨의 로스쿨 입학 준비가 본격 시작됐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한국인으로서 미국 로스쿨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봐야할 관련 책이나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 특히 시험 관련 자료의 경우 점역으로 완료된 책은 쉽사리 구할 수가 없었다.

▲ 김현아 씨.
▲ 김현아 씨.

김 씨는 “당시만 해도 한국 시각장애인이 미국 로스쿨을 준비하는 사례는 드물어 시험에 대비할 수 있는 점자로 관련된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족, 친구들, 한국에 위치한 복지관 등에 문의해 도움을 받았다.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약 2년 여 만인 2009년. 김 씨는 미네소타 로스쿨에 합격했다.

합격 후 기쁨도 잠시, 미로같은 로스쿨 건물은 김 씨에게 또 하나 넘어야 될 산이였다. 그래서 학기가 시작되기 전 몇 번이고 학교를 돌아다니며 건물구조를 익혀야 했고 학기가 시작된 뒤에는 교과목을 따라가기 위해 법률 용어 관련 영어 공부를 해야 했다.

하루 교과 수업만 100페이지 내외. 그 외 관련된 내용의 토론과 교수님의 돌발 질문이 가득한 수업들. 그리고 많은 자료를 분석해 정해진 기호와 형식에 맞춰 작성해야 하는 법률 서류들.

이를 모두 소화하기 위해 김 씨는 수면시간을 줄였다. 최대한 줄일 수 있을만큼 줄이고 모든 시간을 공부에 쏟았다. 이로 인해 감각이 흐려져 계단에서 구를 뻔도 하고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해 메모하며 공부한 시간 3년. 김 씨는 지난 2013년 로스쿨을 졸업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고 ‘이것이 한계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장애인 인권과 교육권 향상이라는 꿈을 품은 그에게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앞으로 자신의 활동에 원동력이 되 줄 것이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 후 로펌 인턴, 조정회사 등에서 일하면서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고, 지난 4월 합격이라는 기쁜 소식을 받게됐다.

김 씨는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었고 이로 인해 힘들어야 하는 상황은 내가 이겨내야 하는 내 몫이었다. 그래서 우울해질려고 할 때마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이겨냈다. 그리고 그 목표는 현실이 됐다.”고 말했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법 제도·정책에 목소리 낼 수 있는 사람 될 것

변호사로서 새 삶을 준비하는 김 씨.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한 발걸음에 탄탄한 바탕이 마련됐다. 한국 장애인의 교육과 인권, 그리고 인식개선에 도움 될 수 있는 변호사, 그 미래를 향한 ‘직진’만이 남았다.

이를 위해 한국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당사자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김 씨.

현재 김 씨는 한국에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진 뒤 단기적으로는 변호사로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법 제도와 정책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계획을 전했다.

“한국과 미국의 가장 큰 차이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한국은 돌봄의 대상, 시혜와 동정의 대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바라보지만 미국은 단순히 몸이 불편한 사람으로 본다.

예를 들어 한국의 활동지원제도의 경우 도움이 필요한 대상자에게 무조건적인 도움을 제공하지만 미국은 최대한의 능력치를 본 다음 무엇이 부족한지 파악하고 그에 대한 지원을 제공한다. 그렇다보니 미국의 활동지원은 아주 세분화돼있다. 이러한 지원속에서 미국은 다양한 분야를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한국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도 이제는 장애인을 단순히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장애인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 ‘시민’으로 바라봐야 한국의 장애인 관련 정책과 법 제도들이 변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작권자 © 웰페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