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질환 체크리스트, 영국 표본 ‘번역’했다지만 목적 ‘달라’
개인 기본권 침해·경찰의 권한 남용 우려 충분

위 문항을 읽고 ‘예’, ‘아니오’로 점검해보자.
 
만약 항목 중 ‘고’가 1개 이상이면 경찰은 당신을 정신질환의 심각한 증상 증후가 있는지 의심하며 응급입원(비자의 입원, 강제입원)을 고려할 것이고, 정신보건전문요원과 협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즉, 경찰은 응급입원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중’ 1개 이상 또는 ‘저’ 3개 이상이라면, 정신질환 병력이 있거나 현재 보이는 증상이 경미한 상태로 판단된다. 이에 경찰은 관내 정신건강증진센터와의 협조를 진행할 것이다.
다만, 폭력성 체크리스트에서 2개 항목 이상 해당될 경우 응급입원 조치할 수 있다.

‘저’ 항목만 3개 미만이라면 정신질환 가능성이 있으나 매우 경미한 상태다. 그러나 경찰이 의심한다면 정신보건전문요원에게 재평가를 의뢰할 것이다.

결국 당신이 위의 항목 중 어느 항목에 ‘예’라고 답한다면, 경찰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응급입원에 포함 될 수 있다.

경찰청은 지난해 5월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을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바라보고, 정신질환자 응급입원 의뢰 등의 절차를 마련하기 위해 정신질환자 진단 체크리스트를 마련했다. 해당 체크리스트는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연구용역으로 지난달 완성됐다.

지난해 경찰청이 발표한 내용과 이에 따른 여론이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라는 비판을 받은 데 이어, 해당 체크리스트 역시 날선 비판을 받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 추진 공동행동은 지난 15일 ‘경찰청의 정신장애인 체크리스트 작성 관련 긴급집담회’를 가졌다.

▲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 추진 공동행동은 ‘경찰청의 정신장애인 체크리스트 작성 관련 긴급집담회’를 열었다.
▲ 더불어민주당 진선미 의원, 정신장애인복지지원법 추진 공동행동은 ‘경찰청의 정신장애인 체크리스트 작성 관련 긴급집담회’를 열었다.

대부분을 고위험으로 만드는 ‘응급입원 도구’

한국사회복귀시설협회 박재우 정책위원은 발표된 체크리스트가 얼마나 신뢰성·타당성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울시에 살고 있는 정신질환자 190명을 대상으로 체크리스트에 따라 진단했다.

그 결과 고위험군이 109명(57.4%), 중위험군이 81명(42.6%)인 것으로 나왔다. 서울시 거주 정신질환자 190명이 모두 중·고위험군인 것이다.

▲ 한국사회복귀시설협회 박재우 정책위원.
▲ 한국사회복귀시설협회 박재우 정책위원.

하지만 체크리스트가 고위험군이라 가리킨 109명 중 절반 이상인 63명은 3년간 정신질환으로 입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중위험군으로 판단된 이들의 66% 역시 3년 동안 입원한 적이 없었다.

지역사회에서 자·타해 위험 없이 살고 있는 정신질환자 모두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응급입원 대상인 것이다.

박 위원은 “자·타해 위험이 있는 사람을 판단할 시점은 현재여야 한다.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한 적이 있으세요?’, ‘살면서 자해(자살)을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는 과거를 묻는 것인데, 이를 토대로 현재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정신질환=위험하다’는 편견을 심화시키는 도구가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 박 위원은 근본적으로 ‘경찰이 과연 행정입원을 요청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정신질환자의 자·타해 위험성 판단은 과거 이력이 아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므로 높은 전문성이 요구된다. 의사도 오랜기간 지켜보고 진단해야 하는 영역을 경찰이 현장에서 체크리스트 11개 문항으로 손쉽게 판단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비판했다.

이어 “체크리스트 목적이 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 예방에 있다면, 경찰청은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고 갈 게 아니라 모두가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적 효력 없는 체크리스트, ‘밀고 나간다면 소송도 불사할 것’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김도희 변호사는 체크리스트에 따라 행정입원이라는 강제 인신구속, 신체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정신건강복지법 제2조가 명시하고 있는 차별 받지 않을 권리, 자의입원이 우선돼야 할 권리, 신체와 재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등에 위배된다. 또한 경찰관직무집행법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할 의무, 공권력이 남용되서는 안될 의무 등의 기본이념 위배 소지가 있다.

김 변호사는 “체크리스트를 통해 개인의 인신을 구속하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법이 정하는 규율을 넘어선 것.”이라며 “지역사회에서 무리 없이 생활하는 사람들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고, 응급입원 요청 소지가 다분한 체크리스트는 중대명백한 하자로 효력 또한 당연무효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변호사는 체크리스트가 그대로 사용된다면 ▲‘공권력의 헌법상 신체자유, 자기결정권 자유 등 기본권 침해’ 사항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청구하거나 ▲‘공무원이 직무의 집행시 고의 또는 과실로 위법하게 손해를 가한 경우에 해당’으로 국가배상청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나오자마자 문제 투성 체크리스트, 어떻게 만들어졌나

경찰청에 따르면, 해당 체크리스트는 영국 경찰의 PolQuest(폴퀘스트)를 번역한 자료다. PolQuest 사용 매뉴얼의 목적은 ‘형사사법제도에서 보건 및 사회서비스로 전환하려는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 경찰은 정신건강전문가에게 의뢰해야하는 사람을 보다 정확하게 식별’하기 위한 것이다.

PolQuest를 살펴보면 활용 대상은 ‘구금자’로 정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PolQuest로 정신건강문제를 진단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PolQuest는 오로지 정신건강전문가의 임상평가가 필요한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신건강문제 존재 가능성 식별 ▲상세한 정신건강 사정을 필요로 하는 개인 식별 ▲과거력 문제와 현재 문제 구분 ▲현재 상세한 정신건강사정이 필요하지 않은 개인 식별 등을 살필 수 있게 구성됐다.

한국정신보건전문요원협회 이용표 정책위원장은 “우리가 그대로 번역한 영국 PolQuest는 형사사건에 연류돼 구류상태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고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심검문의 용도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김도희 변호사 역시 “PolQuest는 경찰이 범죄 혐의자를 체포한 뒤 정신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참고기준용이었다. 또한 이 질문들을 통해 의학 진단은 할 수 없으며 범죄 위험성도 평가할 수 없다.”며 “결국 범죄자의 정신과 치료 필요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활용하라는 참고자료를 한국 경찰은 범죄 예방과 강제 구인의 근거로 쓰겠다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 경찰청 생활질서과 박창호 과장.
▲ 경찰청 생활질서과 박창호 과장.

한편, 긴급 집담회에 참석한 경찰청 생활질서과 박창호 과장은 체크리스트가 ‘단순히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참고자료’일뿐이라는 해괴한 답변을 내놓았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 △정신질환 유무 추정 △자·타해 위험성 △상황의 급박성을 살피는데, 급박성과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할 때 체크리스트를 참고한다는 것이다.

박 과장은 “체크리스트가 응급입원의 결정적인 중요자료는 아닌 방향으로 가고 있다. 사건 현장은 우선 급박성이 가장 중요하다. 나머지는 참고자료로만 쓰일 뿐이다. 당사자와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공청회를 통해 보완과 수정을 거치겠다.”고 말했다.

이에 당사자와 전문가들로부터 ‘결국 처음부터 잘못 된 체크리스트를 밀고 나가겠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뭇매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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