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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장애인 공기소총 부분이 주 종목이며, SH2 종목이라고 해서 ‘서서 쏴’ 종목과 ‘엎드려 쏴’ 종목이 있습니다.
베이징 대회에서도 같은 종목에 출전했으며, 이번 광저우 장애인 아시안게임에서 운 좋게 2관왕을 했습니다. 광저우 장애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부모님과 형제들이 가장 기뻐해주셨습니다.

현재 국내에 실업팀이 두 개밖에 존재하지 않아 아직 소속은 없으며, 일반 선수로 시합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평소 훈련은 아내와 함께 오전에 두 시간, 오후에 두 시간 훈련하고 있습니다. 국가대표 선발을 거쳐 소집되면 그때 감독님과 코치님에게 지도받습니다.

지난 경기 때 마지막 발에 9.9점을 쏘고 나서 이제껏 이뤄놓은 것을 다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공기소총 부분에서는 9.9점이면 큰 실점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운 좋게 0.2점이 앞서 1위라는 영광의 자리가 주어진 것 같습니다.

저는 2006년 쿠알라룸푸르 아태장애인경기대회로 처음 국제대회에 참가했었습니다. 그때는 동메달 두 개로 입상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2010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열린 세계장애인사격선수권대회입니다. 그 대회에서 600점 만점을 쏘면서 아름다운 경기를 했습니다.

내용상으로는 아름다웠는데 결선에 10명의 만점이 나오는 순간, 7위로 밀려서 내려왔습니다. 가장 행복하게 쐈던 순간들에는 막상 입상하지 못했습니다.

사격에서 이뤄지는 것은 거의 정신적인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집중력을 잃거나 한 발만 잘못 쏘면 매달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2001년 9월 귀갓길에 일어난 자동차 전복사고로 경추 쪽 신경이 손상돼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전까지는 태권도 사범으로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1년 6개월 정도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했는데, 처음 사고를 당하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눈을 한 번 감으면 뜨기 싫을 정도로 제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곁에 부모님이 계시고 가족이 있었기에 힘을 얻었습니다.

계속해서 체육 쪽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서 퇴원하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거쳐 시드니올림픽 메달리스트하고 연결이 됐고, 총을 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만 바라보고 사격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막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목표는 올림픽도 아니었고 아시안게임도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장애인체육 쪽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를 가기 위해 사격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하다 보니까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게 된 것 같습니다.

2003년 사격을 시작해서 2006년 전문체육에 계시던 감독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감독님께서 ‘비장애인하고 똑같다는 생각을 갖고 사격을 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 인생에서 많은 도움이 된 분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도 제게 인생 공부를 많이 시켜주고 계십니다.

모든 시합이나 훈련 때 조준선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행복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경기에 임할 때 항상 가족사진을 모니터 옆에 올려놓습니다. 사격할 때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게 되는데, 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가장 큰 행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고비가 생길 때면 가족사진을 보고 위로 받습니다.

2003년도에 아내를 만나 2006년도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올림픽 이후 예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제가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가는 데 부족한 부분을 아내가 채워주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을 아들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광저우 장애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뒤 아들에게 금메달을 걸어주고 싶다고 했는데, 입국해서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아들에게 걸어줬습니다. 걸어줬는데 아들은 메달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오랜만에 온 아빠엄마에게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빠 손, 엄마 손 잡고 집에 가자’고 했는데, 그때 참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국내 전국 규모 대회들이 여럿 있는데, 4월 후반기부터는 시합에 들어갈 것 같습니다. 동계 때 다시 훈련을 시작했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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