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아박물관 박찬수 관장

제가 일본 유학에서 동네 기념관 정도 되는 곳에 가보니까 ‘동네 역사가 어떻고, 촌장이 누구고’ 등등 소소한 옛날 물건들까지 전부 진열해 놓고 열심히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미웠는데, 계속 듣다보니 일본은 이렇게 별것 아닌 것도 소중하게 여기는데 우리 문화는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사립박물관인 목아박물관을 열었습니다.

유물을 수집하다보니까 유물보관창고 경비가 박물관을 여는 것보다 오히려 더 들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물을 보여주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년에 8번 이상 기획전을 열며, 어느 달은 ‘조선시대 서예가로 유명한 대가들의 작품’, 또 어느 달은 ‘한글을 바로쓰는 아름다움의 새김 전시회’ 이런 식으로 일정한 주기로 주제를 바꿔 전시합니다.
또한 지역 작가나 세계적인 작가들을 매달 한 번씩 초대해 서양화, 동양화, 공예 및 조각 등 여러 분야를 지역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감대 기획전도 마련하고 있습니다.

전시품을 구하기 위해 해외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그 나라의 토속적인 작품들을 구입하기도 했고, 골동품상회를 돌아다니거나 지방에 내려가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유물들이 5~6만 점 이상, 예술 관련 서적이 2~3만 권 정도 됩니다.

제가 경상남도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 467번지에 살았는데, 아버지께서 서울로 옮기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반 지하에 살고 있는 조각가 김성수 선생님을 알게 됐고, 그 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12살 때부터 목조각을 배웠습니다.

어릴 때 배워 지금까지 목조각을 했는데, 중요무형문화재 108호 보유자가 되니 정말 행복했습니다.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공모해 당선과 낙선을 반복하다 14회 때 대통령상을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목공예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조건으로는 문헌을 통해 없어진 품목을 그대로 복원해야 하는데, 당시 불교조각을 입문하지 않으면 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불교조각에 입문해 이기형 박사에게 교리 등을 배우는 등 여러 가지를 공부할 수 있는 인연이 됐습니다. 불교 박물관이지만 천주교 또는 기독교 등 구경하는 사람에 대한 입장을 생각하면서 전시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알아보면서 재미있어합니다.

처음 일본 네 곳의 백화점 화랑에서 작품을 전시했는데 많이 팔렸습니다. 주문이 들어오고 돈이 들어오니까, 너무 좋아서 5일씩 작업해도 잠이 안 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몸에 마비가 왔습니다. 이후 마음을 추스르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안정적으로 일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상투머리를 하고 수염도 기르고 자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자 중에 하반신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명장으로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애초에 목공예에 취미없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흥미가 있는 사람은 열심히 합니다. 조금만 방법을 가르쳐주면 굉장히 잘하고, 훗날 목공예와 관계 없는 직업을 선택하더라도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돈독해집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신체의 불편함은 잊게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장애인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기술자로 당당하게 일하니까 결혼을 비롯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 데 훨씬 더 수월합니다.

정부 차원에서 임시방편으로 일방적인 지원만 하는 것보다는, 평생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제도를 갖춰주는 게 필요합니다.

앞으로 제가 배운 기술을 갖고 박물관 등을 통해 민족의 혼을 이어나가고,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느낀 여러 가지 고마움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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