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의 이름으로 21명 장애인을 데려다 폭력과 학대, 수급비까지 횡령해 공분을 샀던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장모씨의 입양자녀이자 피해 장애인인 故 이광동씨가 차가운 냉동고에서 12년 4개월여 만에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 평안히 잠들었습니다.

사진 한장 구하지 못해 그림으로 대신한 영정, 그리고 뒤를 따르는 유족과 장례위원들은 다시 한 번 비통한 눈물을 쏟아냅니다.

이씨는 아사직전의 상태로 충주의 한 병원을 홀로 찾아왔지만 2000년 5월 27일 사망했고, 장씨는 의료사고 등을 이유로 시신을 방치, 12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날 장례에는 이씨와 같은 이유로 10년째 냉동고에서 나오지 못한 입양남매 故 장성희씨의 영정도 함께 올랐습니다.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아 시신을 찾아오지는 못한 故 장성희씨는 여전히 원주의료원 냉동고에 잠들어 있습니다.

지난 6월 한 방송사를 통해 공개된 믿지 못할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죽은 이가 자신의 아들 같다는 노모의 연락이 전해졌고, 친자확인결과 ‘장성광’ 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아들 이광동씨였습니다.

INT-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효정 활동가
저희가 꼭 석달 보름만에 다시 이곳에 오게 됐습니다.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유가족들에게 너무 죄송합니다. 가난의 사슬로 만들어진 대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가족을 버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장씨에게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가족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두 영정과 함께 선 집 앞에는 여전히 철 대문으로 닫혀 자물쇠가 잠겨 있었습니다. 유족들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소리쳐 물었지만, 장씨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고, 하얀 리본으로 억울한 죽음에 슬픔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INT-故 이광동 씨의 어머니
내 아들 살려 내

가난 때문에 아들을 장씨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고, 장씨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서 아들과도 연락이 끊겼다는 노모와 가족들.

가난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그들은, 차가운 냉동고에서 12년을 외롭게 버텨왔던 고인을 이제야 평안한 휴식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서 애꿎은 가슴만 내리칠 뿐 울음소리 한번 편히 내지 못하고 조용히 울어야 했습니다.

30여 년 동안 장씨는 ‘입양’이라는 방식으로 ‘가족’을 모아 인권침해와 수급비 횡령을 저질러 왔고, 지난 6월 20일 장애계단체와 언론사, 가족들이 장씨의 집을 방문해 당시 장씨와 생활하고 있던 4명의 장애인을 긴급 분리 조치했습니다.

남·녀 구분 없이 밀려 있는 머리카락, 한명의 팔에는 ‘나는 장애인입니다’라는 문구와 전화번호 문신이 새겨져있었고, 수급비를 받기 위해 1인 3역으로 주민등록에 등재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씨는 자신은 목숨 받쳐 사랑했고, 죽은 자녀는 의료사고로 소송 중이며, 다른 자녀들은 철거 당시 잃어버려 찾고 있다는 답변만 할 뿐이었습니다.
 

영상촬영/ 신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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