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선 씨 인터뷰

▲ 한옥선 씨.
▲ 한옥선 씨.
김포시 통진읍에 거주하고 있는 한옥선 씨(41)는 지난 2004년 9월, 불의의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게 됐다. 얼굴, 허리, 등, 배 등 전신의 약 56%에 화상을 입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제가 일찍 결혼했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IMF 때 사업을 실패하면서 잘못된 선택을 했죠… …. 제가 집에서 예배를 마친 뒤 남편이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남편이 술에 잔뜩 취해서는 가스를 켜놓고 있더군요. 마음의 결심을 한 거죠. 결국 (남편이 라이터를 켜 폭발이 났고) 남편은 그 자리에서 죽고, 저는 응급실로 실려 갔어요. 제가 살아난 것은 거의 기적이었죠.”

병원에 실려 간 한 씨는 그 뒤로 손상된 피부를 복구하기 위해 피부조직을 이식하는 수술을 받았다. 고통스러운 수술 뒤, 처음 직면한 것은 ‘비용’문제였다.

“화상으로 손상된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을 하는데, 신체 중에 이식할 만한 부분이 부족했어요. 사망자의 피부를 이식 받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죠. 회복 속도도 더뎌 애를 많이 먹었어요. 꼬박 9개월 동안 병원에 있었죠. 화상장애인은 수술을 한 번 안에 끝나지 않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왼쪽 팔이 굽은 상태로 굳어버려서 수술을 받았거든요. 그 뒤에도 팔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꾸준히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의료 지원이 한정돼 있어서, 수술 한 번에 300만 원~400만 원이 나가요. 결국 돈 때문에 퇴원하게 된 거죠.”

현재 화상 치료에 대해서는 건강보험급여를 통해 비용을 덜 수 있다. 하지만 용도, 횟수, 용량 등에 제한을 두고 있어 해당 기준을 초과하는 모든 비용은 환자의 몫이다.

또한 수술 외에 발생하는 비용은 건강보험급여에 포함되지 않아, 외래진료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외래치료시 화상용 연고나, 화상용 밴드 등을 구입해야 하거든요. 최소 이틀에 한 번은 사용해야 하니까, 구입량이 만만치 않죠. 적게는 5만 원, 크게는 몇십만 원, 한 번 구입할 때마다 20만 원~30만 원이에요. 이 제품들은 ‘의료용’이 아닌 ‘미용’으로 분류돼 있어서, 모든 금액을 개인이 지불하고 있어요.”

한 씨는 상황이 이렇다보니 스스로 수술 및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전했다. 

화상 때문에 관절들끼리 붙어버려요. 피부가 팽창해서 관절이 눌려 고관절에 손상이 가기도 하죠. 또 땀구멍이 손상돼 열 조절이 되지 않아 염증이 생겨요. 이런 것 때문에 최소 6개월에 한 번은 수술을 해야 하는데, 비용이 말도 안돼서 엄두도 못 내요. 화상치료는 현재 중단한 상태죠. 관절이 붙지 않도록 10년 동안 수술했어요. 굽은 팔을 펴고나니 구부려지지 않아 다시 수술해야 하는데, 꿈도 못 꾸고 있죠. 외래진료 시간 맞추기도 힘들고 이것저것 너무 힘들어요. 나만 생각했다면 이 악물고 돈 낼 거 내면서 치료했을 텐데, 두 아들을 두고 있는 엄마로서 나만 위할 순 없더라고요.” 

이처럼 화상에 대한 지원이 미흡한 이유는, 장애유형 등에 ‘화상에 의한’과 같은 구체적인 명시가 없기 때문. 

현행 제도상 화상으로 인한 피해만으로는 장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화상으로 인한 다른 2차 장애가 있는 경우에만 안면장애, 지체장애, 시각장애, 절단장애 등으로 구분한다.

한 씨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화상인(火傷人)’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장애인이면서도 장애인이 아닌, 제도에서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말이다.

“얼굴은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한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그런데 너무 의학적 기준에 치우쳐 장애인을 판단하고 있어요. 화상으로 변해버린 얼굴 때문에 사회생활을 하는 데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데, ‘흉터만 있지, 기능의 문제는 없다’는 장애등급 판정 기준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이야기입니다.”

2004년 사고가 난 뒤 약 9년이 흐른 지금. 한 씨가 받아야 하는 치료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한 씨는 신체의 열 조절 기능이 회복되는 등 조금이나마 알아서 좋아진 몸 상태가 고마울 따름이다.

‘불쌍하다’는 시선, 화상장애인의 자존감을 없앤다

한 씨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의료비용 뿐만이 아니다. 바로 사람들의 시선. 한 씨는 밖이 아닌 집으로 돌아온 뒤 마주한 가족으로부터, 처음으로 ‘동정의 대상’이 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화상을 입고 한 3년동안은 아무것도 못했어요. 가족들이 청소기를 잡거나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며 막아섰죠. ‘아프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와 같은 거였죠. 신체를 계속 움직이면서 재활을 해야 했는데, 그렇게 막아서니 몰래 할 수밖에 없었어요.  예전에는 제 능력을 인정 해주고 저를 존중 해주던 가족이 다쳤다는 이유만으로, ‘부족하고 인지능력이 없어서 보살펴줘야 하는 존재’로 보는 것 같았어요. 가정에서 나만의 결정권이 없으니 위축 돼서 살 수밖에 없었어요. 울타리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죠.”

밖으로 나가서는 ‘외관상’의 이유로 따가운 시선을 받거나, 직업조차 구할 수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려고 해도 고용주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 사회활동이 경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직업을 구하지 못하면 여러가지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 씨는 정부의 정책과 제도에 앞서 인식의 변화가 먼저라고 강조했다.

“밖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어쩌다 그렇게 됐냐’, ‘불쌍하다’는 말을 많이 해요. 저는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절대 동정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인식하니 계속 화상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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