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988 서울장애인올림픽 사무총장 조 일 묵

▲ 1988 서울장애인올림픽 조 일 묵 前 사무총장
▲ 1988 서울장애인올림픽 조 일 묵 前 사무총장
오는 29일 2012 런던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개막을 앞두고 전세계가 장애인스포츠의 감동 열전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장애인 스포츠 시작은 어디일까. 우리나라는 1968년 텔아비브장애인올림픽에 첫 출전한 이후 19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을 치루면서 장애인 스포츠가 알려지고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모두가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서울장애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나라 ‘대한민국’. 특히 서울장애인올림픽 이후 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이 동반개최 되게 됨으로써 장애인올림픽 역사에 기록되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장애인스포츠의 눈부신 발전과 기량 성장을 이어왔다. 런던장애인올림픽을 앞두고 1988년 장애인 스포츠의 본격 출발하던 그때를 돌아보며 서울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 조일묵 사무총장이 회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기고〕88 서울 장애인 올림픽을 회고하며...

요즈음 온통 세계의 이목이 ‘영국 런던’에 쏠리고 있다. 올림픽이 개최된 런던, 관례에 따라 이곳에서는 장애인올림픽이 펼쳐진다. 개막은 8월 29일, 전세계 장애인선수들이 모여든다.

이때가 되면 국민의 총역량을 집중 시켜던 88 서울장애인올림픽이 떠오른다.

“아---- 대한민국 짝 짝 짝”

그 함성과 온 땅을 뒤 덮었던 그 모습을 회상하며, 런던장애인올림픽에 대한 관심에 도움이 될까하는 마음에 88 서울장애인올림픽 당시의 이야기를 회고해본다.

▲서울장애인올림픽 유치 결정…그러나 장애인 복지는 형편 없었다.

본래 장애인 스포츠는 장애유형별 지체(절단, 소아마비, 척추장애 포함)·뇌병변·청각·시각·지적장애 등 6개 단체가 각각 실시해왔다. 그 규모와 내용은 빈약했고 올림픽에 비해 재미나 흥미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58년, 장애인도 올림픽 처럼 함께 모여 장애인올림픽을 열자는 합의가 진행됨에 따라 ICC(장애인스포츠 국제조정위원회, 현재 IPC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의 전신)를 조직해 1960년 로마올림픽부터 장애인올림픽이 함께 개최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1980년도 대한민국은 온 국민의 열망과 기대 속에서 올림픽 유치 활동을 적극 전개하기 시작했고, 1981년 9월 대한민국 서울로 개최지가 확정됐다. 이에 이어 1984년 1월, 올림픽이 개최되는 나라에서 장애인올림픽이 개최된다는 관례에 따라 서울장애인올림픽이 확정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측에서는 장애인올림픽 유치라는 기회를 통해 장애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높여 장애인 복지 발전의 계기를 만들겠다는 의도를 함께 세웠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가 같은해 7월 재단법인으로 조직위원회 설립을 인가했다.

88 서울장애인올림픽은 서울올림픽과 조직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조직위원장은 비상근이었고 사무총장만이 상근이었다. 특히 당시 유치 계획서를 보면 주경기장과 선수 숙소 등 가장 중요한 시설이 서울대학교 캠퍼스로 정해졌고, 전체 예산도 82억 원이라는 축소형 국제대회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장애인복지는 열악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등이 장벽처럼 높았다.

국제적으로는 UN이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선포하면서 각국 별로 장애인복지 발전을 위한 법령제정 및 정책 개발을 권장하기 시작했고, UN ESCAP에서 아시아태평양 장애인 10년을 선포하면서 그 실천 계획이 수립되는 등 변화는 있었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은 여전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정부대로 또 장애인들은 장애인대로 세계적 장애인 복지 향상과 더불어 장애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기회를 통해 장애인복지를 향상시켜보자는 생각에 고무돼 있었다. 이에 장애인들은 적극적인 대 정부 건의를 시도했고, 무엇보다 당시 장애인들의 입장에서는 의료재활이나 교육재활, 직업재활 등에 대한 욕구가 절실했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은 뒷받침되지 못했고 불만이 커져가던 시기였다.

그러나 장애인스포츠는 조금 달랐다. 장애인들의 욕구 보다 여건 조성이 중요했다. 스포츠를 하는 장애인들도 많지 않았고 여건 또한 형편없었다.

국가유공자와 상이군경이 용사촌 같이 집단거주를 통해 몇 가지 운동기구와 장소 등을 만들어 주면서 보훈처가 먼저 분위기 조성에 나서 국제척추장애인경기대회에만 소수 참가했을 뿐, 이 외의 장애인들의 국제대회 참가가 전무한 것은 물론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들이 더 많은 상태였다.

88 서울장애인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당시의 대한민국 장애인 복지, 장애인 스포츠는 이러했다.

▲우려 속 장애인올림픽 개최 조인…‘서울에서 장애인올림픽이 가능하겠습니까’

장애인올림픽 유치가 결정됐으니 조직위원회가 필요했다.

정부가 나에게 사무총장을 맡아 달라 요청해왔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장애인 스포츠 전문가가 없었고, 나 역시 장애인스포츠 전문가가 아니었다. 더구나 나는 ‘장애인 올림픽을 할 수 있느냐’라는 우려도 갖고 있었다.

나는 중소기업 진흥공단 연수담당이사이자 장애인재활협회 고용촉진위원장으로 1981년도 세계장애인의 해를 맡아 한국장애인기능올림픽을 창설, UN이 주최했던 제1회 세계장애인기능올림픽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내개 사무총장 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고, 재차 사양했음에도 ‘이제 장애인올림픽을 맡아 하는 사람들이 장애인스포츠 전문가가 되어갈 것.’이라는 요청에 더 이상 시간을 지연시켜서는 안됐기에 결국 수락했다.

사무실은 임시로 여의도에 위치한 보훈회관에 마련하고 9명의 직원을 채용해 사무국을 설치하고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ICC에 제출한 개최 개획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주경기장과 선수숙소, 경기종목 선정을 검토해본 결과 문제점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선수숙소로 정한 서울대학교 학생 기숙사가 계단이 있어 장애인들의 접근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주 경기장 역시 협소하고 편의시설 관계로 장소가 부적합했다. 유치계획을 재검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4년 뉴욕장애인올림픽에서 88서울장애인올림픽 개최에 대해 간이 조인이 진행됐고, 1985년 2월 ICC 총회가 열리는 네덜란드 아나헴에서 ICC 회장과 각 장애유형 스포츠 연맹 대표, 각국 대표, 기술위원과 전문가 등이 같이 자리한 가운데 본 조인식이 진행됐다.

많은 질문이 오갔다. 기술위원장은 국제대회 참가 경험과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이를 알고 참가하는 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사실 우리나라는 당시 소수의 장애인만 장애인 스포츠에 참여했고, 국제대회 출전도 많지 않았다. 이에 기술위원장은 ‘장애인 올림픽을 할 수 있겠느냐. 미국도 실패했는데, 하물며 경험도 없는 한국에서 장애인올림픽을 개최하겠다니 믿을 수 없다. 불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한국에도 맥주가 나오느냐’는 어이없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 그들이 지구 반대 쪽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알리는 없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개발도상국이었고, 무엇하나 눈에 띄고 관심 갖을 일이 없는 그런 나라였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이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마치 몰매를 맞은 듯 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88 서울장애인올림픽 본 조인식을 마쳤다.

▲서울올림픽과 서울장애인올림픽 ‘동반개최’

1988 서울올림픽으로 온 국민의 관심과 기대가 쏠려있는 상황에서, 장애인올림픽이 함께 열린다는 것은 몇몇 관계자만 알고 있는 일이었다. 장애인올림픽을 알리고 치러내기 위해 홍보를 시작했다.

그런데 장애계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장애인올림픽을 개최할 만큼 복지가 됐느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무슨 장애인올림픽을 하느냐, 장애인들을 농락하는 처사다.’라는 노골적 반발에 부딪치면서 난감하게 됐다.

장애인올림픽 유치는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가 잘 돼있기 때문에 추진된 것이 아니었다. 위국의 선진 복지 속에서 밝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보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이 안타까웠다. 외국 장애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이 편견과 차별을 없애주길 바랬고, 장애인올림픽을 통해 장애인 복지를 향상시키는 계기로 삼아보려는 이었다. 아무리 해명하고 설득하려 했지만 낙후된 장애인 복지 상황에서 명쾌한 답이 될 수 없었다.

특히 보건복지부가 서울시 마포구 지역에 의료보험관리공단 새 청사를 매입하면서 1984년 11월 새 청사 건물 12층에 조직위원회 사무국을 이전하자, ‘장애인 단체는 수십년 이끌어도 사무실 한칸 변변하게 못 얻는데 장애인올림픽 사람들은 사무실과 집기 등 모두가 화려한 사치와 낭비를 하고 있다’, ‘장애인 분야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슨 장애인올림픽이냐, 차라리 그 돈을 장애인 복지를 위해 사용하라’라는 등 질타가 이어졌다.

또한 당초 선수숙소로는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결정이 났던 서울대학교 학생기숙사와 주경기장을 교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인근 도시로 독자적 대회를 치루려 했지만 엄청난 예산과 인력이 별도로 투입돼야 했고, 84 뉴욕장애인올림픽의 실패 이유가 독자적 대회 진행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했다.

그렇다면 답은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의 협의였다. 그러나 실무적 접촉조차 쉽지 않았다.

서울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물론 ICC 임원의 만남도 성사되지 않았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성공과 실패 여부조차 판가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장애인올림픽까지 신경쓸 수는 없었을 것.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지만 ‘우리가 방해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애인올림픽까지 돌봐 줄 여력이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본 조인식에서 회원국들에게 주었던 불안감, 국내 장애계의 불만과 반대, 경기장과 선수숙조 확보의 어려움, 게다가 대회를 함께 치러내야 할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와의 대화의 길까지 막혀 버렸다. 그보다 장애인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도 변화되지 않은 상태라 서울장애인올림픽조직위원회는 사면초가에 처했다. 나를 비롯해 고귀남 조직위원장 이하 모든 직원들의 사기와 의욕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중단할 수는 없었다.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했다. 우선 자원봉사단 조직이 필요했다. 외무부 고 이범석 장관의 사모님이신 이정숙 여사를 자원봉사단장으로 추천하고, 새로운 조직이 아닌 적십자나 YWCA 등을 통해 봉사단을 구성했다. 언어교육과 봉사교육을 시작했고, 각국 대사 부인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세계 여러나라에서 찾아올 선수들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마음을 가다듬어봤지만 아무래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지원 없이 대회를 치룰 방법은 없었다.

이번에는 당시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행자부 박세직 장관을 찾아갔다. 부족한 예산과 편의시설 문제, 경기장과 선수숙소 확보 어려움 등을 이야기 했고, 조직위 측이 정식 건의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3개월이 지난 뒤 온 연락은 ‘장애인올림픽 조직위원회의 관계 개선과 도움 등을 건의했지만 응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시기가 아니니 차분히 기다려보자.’는 답을 줬다. 기다림이 계속됐고 1987년 2월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이 박 장관으로 교체됐고, 장애인올림픽과의 연결 고리가 생겼다.

처음 서울올림픽과 서울장애인올림픽 ‘연계개최’ 약속은 ‘동반개최’로 발전했고, 실무진 파견을 통해 대회 개최 계획과 예산 분배 경기요원과 심사요원 기용 등 체계적인 준비가 진행됐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선수숙소가 시급했다. 정부측과 여러차례 논의를 해본결과 김포지구에 있는 신축 시민아파트 중 필요한 만큼 사용해도 좋다는 결론이 났지만 주경기장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침 저녁 장애인선수들의 운송 문제가 될 것이었고, 아파트 내 통로가 넉넉하지 못해 휠체어 한태만이 지날 수 있었다.

고민이 계속되던 중 돌파구가 생겼다. 당시 서울시장이 해결책을 제시한 것. 주경기장 인근에 계획중이던 아파트 시공을 장애인 선수촌으로 짓고 차후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분양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최고의 방법이었다. 곧바로 서울시 건설 본부 전문가들을 영국 에이스 벌이 척수장애인 스포츠 센터로 파견해 선수촌 문제가 해결됐다.

개·폐회식도 문제 였지만 서울올림픽에서 공연한 식전 식후 행사를 재연하는 방안으로 프로그램이 구성됐고, 부족한 예산은 개폐회식 입장권을 판매하기로 했다.

▲‘서울장애인올림픽’ 한국을 알리고 장애인스포츠를 시작

1988년 10월 15일 드디어 서울장애인올림픽의 개막식 날이 밝았다.

그동안 ICC 임원들과 기술위원 등을 초청해 대회 진행사항을 점검했고, 초기 어려움을 이기고 차근차근 준비되어나가는 것을 보며 신뢰를 가졌다. 대회 개회식에는 10만 명 관중들이 모여 감동을 주었고 모든 프로그램들이 성대하고 웅장하게 치러졌다. 대회도 성공적이었다.

전 세계가 서울올림픽의 성공여부에 기대하지 않았지만 서울올림픽은 성공을 거뒀고, 그보다 큰 우려를 나타냈던 서울장애인올림픽까지 성공을 이뤘다. 조직위원회 만의 노력이 아니었다. 대회 기간 동안, 준비하는 동안 보여준 국민들의 관심과 응원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후 우리는 바로셀로나 장애인올림픽 조직위원회에 초청돼 준비 과정을 자문하기도 했고, 대회 준비와 실시기간 동안 ICC가 IPC로 확대 개편 됨에 따라 서울장애인올림픽 개최와 이에 따른 발전 공로로 우리나라가 집행위원을 배출하기도 했다.

장애인올림픽이 열리는 해가 되면 언제나 당시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당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들과 그 속에 함께 준비하고, 같이 응원해 주었던 국민들의 마음을 추억하며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한다. 더불어 런던에서 펼쳐질 우리 선수들의 열전을 응원하며 좋은 성과를 기대한다.

1988 서울장애인올림픽 사무총장
조 일 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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