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 석에 앉혀 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 안셀름 그륀
인간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남의 시선에 좋은 것은 무엇이든 쉽게 드러낼 수 있지만 반대로 나쁜 것은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억압되는 모순적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자본주의와 매스컴의 발달로 도래한 대중문화. 대중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타’란 존재는 이 모순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다수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만 갖춰야 하는, 못나고 부족한 것을 드러내면 대중의 비난과 질타의 화살을 언제 맞을지 모를 불안감에 떨게 되는 스타.
하지만 이 모든 불안과 고통을 뒤로 하고 숨겨왔던 자신의 아픔을 꺼내든 한 사람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배우 임은경 씨. 지난 3월 출간된 ‘붕어빵의 꿈’은 임 씨의 가족사를 바탕으로 한 동화다. 동화에는 농아인인 부모와 삼촌 사이에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슴 속에 간직한 나의 비밀을 내보이는 것은 정말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해요.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진실한 나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아서 기뻐요.”
그랬다. 그녀는 용기를 내야 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기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세상에 대한 작은 변화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책을 냈지만 상업적이다, 부모 이용해 돈 벌려는 수작이라는 등 견디기 어려운 비난들이 쏟아질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결심했다.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부모와 삼촌이 모두 농아인인 가정에서 태어난 임 씨는 장애인에 대한 시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버스에 장애인이 오르면 그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들은 메아리치듯 퍼져나간다.
하지만 그 눈길은 결코 따스한 눈빛이 아니다. 때로는 날카롭고, 때로는 차가운 시선들. 그 시선의 아픔을 임 씨는 몸소 겪었다.
임은경 씨는 “나도 배우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곤 하지만 그 시선과 장애인에 대한 시선은 다르다고 본다”며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꼭 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도 부정적인 시선이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의 느낌을 좀 더 따스하게, 아름답게 바꿀 수는 없을까? 고민하던 그녀에게 고정욱 작가가 손을 내밀었고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이나마 세상의 시선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작은 소망을 품게 됐다.
임 씨는 “이 책은 그동안 침묵했던 나에 대한 반성문이기도 하다”며 “솔직해지니 한결 편해졌다.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씩 하나씩 변화를 일궈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장애인을 위한 영화, 장애인을 위한 방송… 조금씩 달라진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너무나 부족해요.”
지난 2002년에 이어 지난해까지 두 번에 걸쳐 장애인영화제 홍보대사를 역임한 임은경 씨. 장애인영화제를 통해 장애인을 주제로, 혹은 장애인이 볼 수 있는 영화들이 조금씩 생겨난다는 점에 잠시나마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장애인에게 그 흔한 영화 조차 먼 나라 이야기라는 현실을 접해야만 했기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임 씨의 어머니는 방송을 볼 때마다 “자막이 나와도 방송을 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며 화면과 자막을 함께 보는 것이 힘들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자막을 좇아가기도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하곤 한다고.
임 씨는 “장애인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와 진정한 마음이 필요한 것 같다”며 “방송과 영화가 장애인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함께 관심을 모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20년 넘게 목수 일을 하고 계세요. 딸로서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에요.”
농아인인 부모와 삼촌을 보면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장애인의 취업’이라고 생각했다는 임 씨.
공사판에서 위험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해 목숨을 잃은 삼촌.
삼촌의 죽음을 경험하고서도 스무살 때부터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는 아버지. 장애인이기 때문에 직업 선택의 범위가 너무나 좁고, 그 안에서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목도한 임은경 씨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임 씨는 “비장애인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더라면 부모의 삶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며 “교육을 통해 취업문을 넓히고 직업 선택의 폭을 확대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실이 담기지 않은 역할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장애인 관련 역할에 대한 제의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잘 할 수 없을 것 같다. 진정성이 없는, 재미나 흥행을 위한 역할이라면 마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장애인의 자녀로서 누구보다 한국사회에서 장애인의 삶을 이해하고 있는 임은경 씨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임은경 씨는 “진실을 담아 연기하고 싶다. 내 삶을 통해 조금이나마 세상이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며 “아직 장애인으로 살아가기에 너무 힘든 현실이지만 모두다 조금씩 힘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를 만나면서 ‘아름답다’는 말이 떠올랐다. 인형 같은 외모를 넘어 그녀 안에 숨겨진 진실된 내면에서 느껴지는 향기가 내 가슴을 울렸다. 슬프도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