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welfare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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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우리의 문자로 사용하던 때, 세종대왕은 한자가 어려워 사용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그렇다면 훈맹정음은 들어본 적이 있는가.
훈맹정음은 ‘시각장애인의 훈민정음’이다. 시력상실로 문자를 활용할 수 없는 시각장애인들이 문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흔히 점자라고 한다. 점자는 3행 2열, 총 6개의 점으로 구성된다.
왼쪽 위에서 아래로 1-2-3점,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4-5-6점의 번호를 붙였다. 각각의 문자 기호에 따라 점이 찍히는 번호가 정해져 있어, 이를 모두 외워야 점자를 읽을 수 있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있듯이 시각장애인에게는 한국점자통일안이 있다.
6개의 점으로 한글, 알파벳, 숫자는 물론 수학기호에서 음악 악보까지 표현해낼 수 있는 규정이 적혀있다.
훈맹정음을 만든 사람은 ‘시각장애인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사진)이다.

'안 배우면 마음조차 암흑'

그는 1888년 강화군 상용면 교동리에서 출생,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어의동 보통학교 교사가 됐다.
독립운동가 성제 이동휘 선생에게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뜻’으로 송암(松庵)이란 호를 받고 남이 하지 않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가 시각장애인과 처음으로 연을 맺은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인 유화정책으로 설립한 제생원(장애인 수용시설) 맹아부로 발령을 받으면서다. 맹아교육과 모집에 열중하던 중 당시 사용하던 뉴욕식 4점형 점자의 불편함을 깨닫고, 한글 고유의 점자를 만들게 된다.

1920년부터 한글점자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923년 3.2점식 한글점자를 만든 후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결성했다.
1926년 11월 4일 최초의 한글점자 완성본 ‘훈맹정음’을 발표했다. 당시 조선어 말살정책을 펴오던 총독부도 “그 모든 장애에서 이들을 회복시키는 길은 오직 글을 가르쳐 정서를 순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는 박두성 선생의 편지를 보고 훈맹정음의 교육을 승인했다.

이후 박두성 선생은 ‘육화사’를 조직, 점자통신교육을 열고 맹인을 위해 점역도서를 만드는 일과 점자잡지 ‘촛불’의 발간, 맹인 무료우편사업 건의 등 사업을 펼쳤다.

'애맹정신, 현재까지 인정받아'

1963년 8월 25일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점자책 쌓지 말고 꽂아”라는 말을 해왔는데, 이는 점자책의 점이 눌릴 것을 우려한 것으로 애맹정신을 보여준다.
사후에도 업적을 인정받아 1992년 은관 문화훈장을 추서 받고, 2002년에는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현재 박두성 선생은 인천시 남동구 수산동에 안장돼 있다.

'점자의 유래'

1898년-우리나라 최초의 맹교육의 효시는 미국의 선교사 홀(R.S.HALL) 여사가 뉴욕 점자형 한글점자인 ‘조선훈맹점자’를 만들어 성경의 일부와 십계명을 점역.

1913년-일제에 의해 설립된 제생원 맹아부의 교사로 있던 박두성 선생은 세계적으로 6점식 점자가 맹교육에 사용되는 것을 알고, 전태환을 비롯한 맹아부 학생들을 규합해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

1921년-자음 3개의 점, 모음 2개의 점으로 구성된 3,2점식 점자를 발표.

1926년-3.2점식 점자는 표기상의 문제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점자 훈맹정음을 발표, 또한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조선어독본’. ‘성경’ 등을 점역해 보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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