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장애극복상’이 수여되었다.
같은 날 오전. 우리는 ‘장애극복상 수여’가 장애인을 더 비참하게 한다고 기자회견을 하였다.

그런데 경남도의회에서 매년 장애인의 날, ‘장애극복상’을 시상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경상남도 장애극복상 조례안>을 제정하겠다고 나섰다.
확인해보니 이미 3월 23일부터 4월 12일까지 의회 홈페이지에 입법예고 되어 5월 도의회에서 논의된다고 한다.

제안이유를 보면 “신체적·정신적 장애로 어려운 여건에도 재활의지와 부단한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범장애인(?)을 찾아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고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인식을 개선시키는 등 장애인복지증진의 일환”이라고 한다.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 장애가 극복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장애는 장애일 뿐이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극복’.

<첫 번째 뜻> =이기어 도로 회복함. 또는 본디의 형편으로 돌아감.
; 장애인으로 태어나 혹은 살다가 장애인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는 장애인등록을 하게 된다. 이는 신체적·정신적으로 손상된 부분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판정이다.
다시 말해 일시적으로 어떤 한 문제를 극복할 순 있어도, 평생을 두고 장애를 극복할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이것은 장애인을 또 한번 우롱하는 일이다.

<두 번째 뜻> =악조건이나 고생 따위를 이겨 냄.
; 우리는 장애가 ‘악조건’이 되지 않는 세상을 바라고, 장애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정부 및 행정기관·의회도 정치적 힘으로 앞장서야 마땅하다.
그런데 장애가 악조건임을 전제하는 “장애극복상”을 의회가 나서서 조례로 입법한다는 것은 너무나 시혜적인 판단이다.

수렁에 사람이 빠지면 건져낼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건질 방법을 찾아낼 책임이 있는 행정기관·도의회가 건질 방법은 찾지 않고, 수렁 속에서도 말쑥하게 살아남아 있는 것을, 혹은 온 몸에 상처투성이로 혼자서 수렁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면서 박수 쳐서는 안된다.
이것을 행정기관·도의회가 앞장서 기뻐할 일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라고 하는 여성에게 ‘여성극복상’을 수여하는 예는 없다. 여성은 그냥 여성이기 때문이다. 즉 부단히 노력해도 장애는 극복할 수 없다. 불가극복(不可克服)이다.

하나. 그저 불평없이 착하게 살면 모범이 되는 것인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등 사회가 이미 차별하고 제한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웃음으로 참고, 견디며 그저 착한 장애인으로 성실하게 살면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다.

국민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간디,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던 마틴루터 킹, 여성에 대한 국가폭력문제를 파헤치며 여성인권운동가로 활동해 왔던 시린 에바디. 이들의 활동으로 인도의 국민은, 미국의 흑인은, 이란의 여성들은 좀 더 나은 사회에 살고 있다.
바로, 인류에 대한 공헌. 그것이 수상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즉, 장애인으로 살면서 여타의 많은 경상남도 장애도민을 위해 일한 사람, 또는 많은 장애도민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 혹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해소하기 위해 도민을 대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이 선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자신이 다니는 직장을 위해 열심히 일한 장애인을 장애가 악조건이라는 이유로 행정기관·도의회가 모범장애인이라며 수여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기보다는 장애인의 사회적 인식 개선에 얼마나 많은 공적을 남겼는지와 장애인차별정책 또는 장애인 권리구제를 위해 어떤 공적이 있는지를 기준하는 표창이 필요한 시기이다.

‘장애극복상’이 아니라, ‘장애인권상’을 수여할 수 있는 성숙한 경상남도가 되기를 희망한다.

2009년 4월 15일

경남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일동

저작권자 © 웰페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