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내 마련된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조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9 welfarenews
▲ 서울역사박물관 내 마련된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조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9 welfarenews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63)이 5월 23일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열풍은 실로 대단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바보(원칙과 명분을 위해 무모함을 무릅쓰는) 노무현’, ‘촛불’, ‘노간지(퇴임 후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칭하는 말)’ 등, 노 전 대통령은 대중의 민심을 흔들었고, 지역주의에 지친 표심을 샀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기회주의 타파라는 원칙과 소신을 내걸고 활동했다. 그때마다 보수·기득권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주변사람들에 의하면, 노 전 대통령은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장학금을 이유로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 후 노 전 대통령은 큰 뜻을 펼치고자 고교 졸업 후 법조인의 길을 택했다.

노력과 도전을 거듭해 그의 나이 서른에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2년 뒤 대전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판사로 활동한지 7개월만에 노 전 대통령은 변호사로 전직했다.

노 전 대통령은 1981년 부산지역 민주 인사 탄압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을 맡았다. 이후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했고, 1987년에는 故 박종철군 추도비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연행되기도 했다.
그는 6·10항쟁 이후에도 대우조선의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는 등 노동운동에도 참여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5공 실세인 허삼수 후보를 꺾고, 1988년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광역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노 전 대통령은 국회 5공 비리 조사 특위 청문회에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을 상대로 날카로운 지적과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

1990년 1월 3당 합당을 비난하며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했다. 영남 출신이면서도 호남을 기반으로 한 당에 입당했고, 지역주의 타파라는 그의 소신은 2002년 대통령 당선의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2004년 3월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나라당 등이 열린우리당 지지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제기한 것.
그러나 국민들은 이러한 태도에 분노했고, 17대 총선에서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차지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정치는 한나라당 등의 거센 반발과 충돌 등으로 ‘실험’에 그쳤다.
결국 열린우리당은 민심을 잃고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한미 FTA협정 체결 등 또한 노 전 대통령 지지층이 등을 돌린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인터넷을 통해 활동하는 등 꾸준히 자신의 소신을 펴는 자세를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 남북정상회담 등 대북정책의 업적 등을 인정받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을 소박함과, 국민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의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은 오는 29일 오전 11시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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