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경제신문J]

수십 미터의 해안절벽이 서있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무늬결을 지닌 바위가 서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검은색 현무암 위로 파란 파도가 하얀 포말을 품어내는 곳. 제주 그 어디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제주 바다다.

만약 돌탑 몇 기와 벤치 몇 개, 그리고 표지석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여전히 이름없는 바다로 남아 있을런지 모를 일. 종달리 해안도로 초입에 위치한 고망난돌 쉼터는 그런 곳이다.

<고망난돌>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 <고망난돌>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평범함 속에 비범 간직한 곳

해가 뜨면 해를 맞고, 달이 뜨면 달을 맞는다. 철 따라 필 때가 되면 알아서 들꽃이 피어난다. 항상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람 때문에 나무들은 올곧게 자라지 못하고 바람에 순응하다 결국엔 바람결이 되었다.

구좌읍 하도 철새도래지와 하도해수욕장 사이를 길게 가로지르는 방죽을 지나면 시작되는, 종달리 해안도로 초입의 고망난돌 쉼터는 그런 곳이다. 전형적인 제주 바다다.

전형적이라는 말은 평범하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그 평범함 덕분에 고망난돌 쉼터는 예나 지금이나 고요한 장소로 남겨질 수 있었다.

웬만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보도블록을 깔고, 난간을 설치하고, 억지스러운 조형물을 세운 탓에 대부분의 제주바다가 본래의 풍취를 잃어가는 동안에도 이곳만은 오래 전 제주 바다의 풍취를 여전히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다.

<'고망난돌'은 '구멍난돌'을 말한다>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 <'고망난돌'은 '구멍난돌'을 말한다>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사람들은 많이 몰리는 곳으로 더욱 몰리기 마련이다. '빈익빈 부익부'라는 악의에 가득 찬 이 말이 고망난돌 쉼터의 경우에만은 호의적으로 작용한 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아예 발길 없는 곳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발길 닿는 곳이 자연스레 길이 되었다. 아마 이곳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 머물다 간 흔적일 게다.

이렇듯 고망난돌 쉼터는 그 어딜 가나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붐비는 제주에서도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알만한 사람들이나 찾아와 고요히 쉬다 가는 제주의 몇 남지 않은 숨은 비경이다.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정작 고와서 서러운 풍경

고망난돌쉼터는 특히 가을이면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 뜨거운 여름 동안 태양빛을 모으고 모아온 야생초들이 가을빛 아래 일시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이다. 그냥 야생초 꽃밭이 아니다. 감국 등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을 꽃들은 물론이요, 남도의 바다에서만 볼 수 있다는 번행초, 순비기나무, 섬기린초, 털머위, 해국 등의 야생화가 무더기로 융단처럼 깔린다.

야생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속된 말로 ‘환장할 정도’로 귀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생명의 보고이다.

바닷가로 자연스럽게 난 길을 따라 걷노라면 여행자의 온 몸은 바다와 들꽃과 가을볕으로 버무려진다.

바다 건너로는 섬 속의 섬, 우도가 손에 잡힐 듯 그림처럼 다가온다. 이 길을 계속 걷노라면 마치 파라다이스를 걷는 듯한 환상에 빠질 듯하다.

그리고 고망난돌 쉼터 끝에 위치한 해안초소를 우회하여 그 길을 계속 가면 실재로 '고망(구멍)난 돌'과 마주치게 된다. 말이 돌이지 육중한 바위기둥이다. 고망난 돌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니 파란 바다 저 멀리 수평선이 아련히 보인다.

문득, 천상 바다를 등에 지고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이곳 사람들은 이 바위기둥 사이로 난 고망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어쩌면 현재의 힘든 삶에서 벗어나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 있을 법한 이상향에 대한 꿈을 꾸진 않았을까?

그리고 그 꿈이 소망으로 피어 난 듯 흙 한 줌 없는 척박한 고망난돌 바위 끝에는 보랏빛 해국 한 무더기가 꿈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있다.

서럽다. 슬퍼서 서러운 게 아니다.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운 풍경이다.

<감국>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 <감국>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해국>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 <해국> ⓒ관광경제신문J ⓒ2009 welfarenews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에 취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성적인 풍경을 펼쳐내고 있는 이곳은 그러나 아무에게나 허락된 바다는 아닐 듯하다. 자연스러움이 바로 고망난돌 쉼터의 본성이자 미덕이며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우선 억지스럽게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야 말로 미덕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고망난돌 쉼터는 어찌 보면 나무에서 살아가며 나뭇가지의 빛깔과 형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자벌레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평범한 겉모습 덕분에 사람들의 이목에서 한 발짝 비껴서 있을 수 있었기에, 여태껏 본 모습 그대로를 지켜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년 사시사철 어디 한곳 사람들로 붐비지 않는 곳이 없는 제주에서 숨은 비경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고도의 생존전략 때문이었다.

이곳은 해안도로를 달리며 차 안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렇잖아도 볼 것 많은 제주의 이곳저곳을 스쳐 지나가기에도 바쁜 사람들에게 이 바다가 보일 리 없다. 달리는 차 안에서 작은 꽃 한 송이가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혹시라도 운이 좋아 이 바다를 발견했다 해도, 넉넉한 마음으로 천천히 걸어보지 않는다면, 이곳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느리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바다, 고망난돌 쉼터는 그런 곳이다.

진정한 고망난돌쉼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무엇보다 여유를 가지고 찾아가 볼 일이다. 그곳에 가서 바다 끝에 쓸쓸히 서 있는 벤치에도 앉아보고, 낮게 허리를 숙여 들꽃에게 인사도 해보고, 두 팔을 벌려 온몸으로 바람을 안아 보라. 그때서야 고망난돌 쉼터는 서서이 자신의 본 면목을 당신에게 보여주기 시작할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당신은 고망난돌 쉼터의 눈망울을, 얼굴의 윤곽을, 그리고 그 깊은 가슴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서 당신은 그토록 바래왔던 나만의 바다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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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 신영철 (‘느림보’라는 인터넷 닉네임에 걸맞게 그는 육지에서 제주도로 내려와 제주의 삶을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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