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welfarenews
▲ ⓒ2010 welfarenews
 ⓒ2010 welfarenews
▲ ⓒ2010 welfarenews
고불총림 백양사 주지 스님
제주에 장보고비 세운 사연

전남 장성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8교구 본사인 고불총림이다. 일반인들은 백양사하면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사찰로 생각한다. 백양사 주지 시몽스님이 최근 제주도 법화사에 청해진대사 장보고비를 세웠다. 장성 백양사와 완도 청해진, 제주 법화사를 잇는 그 천년의 인연(因緣).

'장성관광 전국 사진공모전' 대상 수상작 변정희의 작품 '백양사의 가을' < 사진제공 : 장성군청 > ⓒ2010 welfarenews
▲ '장성관광 전국 사진공모전' 대상 수상작 변정희의 작품 '백양사의 가을' < 사진제공 : 장성군청 > ⓒ2010 welfarenews
백양사, 천년의 고찰

백양사는 1400여년전 백제시대의 고찰로 유구한 역사와 주변의 빼어난 경관으로 이름이 높은 사찰이다. 산내 10여개 암자 중 유서 깊은 운문암은 고려시대 때부터 납자들의 정진도량으로 유명한 곳이다. 다만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들이 그러하듯 백양사 역시 창건과 연혁을 전하는 자료가 충분하게 전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본래 이름은 백암사였고, 1034년 중연선사가 크게 보수한 뒤 정토사로 불려졌다. 백양사란 사찰 명칭에도 유래가 있다.

조선 선조때 환양팔원 선사가 영천굴에서 법화경을 독경하며 예불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백학봉 밑에 살고 있던 흰 양 한마리가 굴에 찾아와 무릎을 꿇고 스님의 '법화경' 독경을 경청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스님의 독경소리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제 축생의 몸을 벗고 인간으로 환생하게 되었습니다"며 절하고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뒷산을 산책하던 스님이 흰 양 한마리가 영천 암 아래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전날 꾸었던 꿈이 범상한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스님의 법호도 지완에서 '환양(喚羊)'으로 고쳐 부르고 양을 제도했다 해서 절 이름을 백양사(白羊寺)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불총림 백양사의 주지 스님은 시몽이다. 지난 2008년 11월 2일 진산식을 갖고 취임했다.

백양사 주지 시몽스님은 1965년 백양사에서 서옹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은 인연이 있다. 1969년에는 통도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다. 이후 1975년부터 제주도 법화사 주지를 역임한 시몽스님은 제주 관음사 주지 대행을 역임하기도 했다.

백양사 취임과 함께 시몽스님은 “백양사 강원 졸업 이후 30여년만에 대중에게 돌아와 함께 살게 된 게 기쁘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1년여, 시몽스님에게 그 뜻을 물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를 삼가야 합니다. 혼자 있으면 죄를 짓게 되죠. 아난다가 부처에게 물었습니다. 깨달음은 자기 노력이 절반이고 대중이 절반이지 않냐고요? 그러자 부처가 답했습니다. 아니다, 대중의 힘이 전부이다 라구요. 백양사는 백명의 대중(스님)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법화사에 세워진 장보고비. 우측 두번째가 시몽스님 ⓒ관광경제신문J ⓒ2010 welfarenews
▲ 법화사에 세워진 장보고비. 우측 두번째가 시몽스님 ⓒ관광경제신문J ⓒ2010 welfarenews
해상왕 장보고를 되살리다

백양사 주지 시몽스님이 장보고기념사업회(회장 김재철)와 함께 최근 제주 법화사에 해상왕 장보고비를 세웠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는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다. 국토 최남단 제주도 서귀포시에도 이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크기를 자랑하는 비가 세워졌다. 동아시아 바다를 경영한 해상왕 장보고비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 둘은 분명 다르면서도 얼핏 닮아 보인다. 광개토대왕이 거침 없이 광활한 대륙을 내달으며 북방영토를 호령했다면, 장보고는 동아시아 일대의 해양을 제패하며 국제적 해양교역기지를 개척했다.

한편 장보고는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법화경과 관음신앙을 신봉하였는데, 중국 산둥성 적산의 법화원과 전라남도 완도 청해진 법화사가 장보고가 창건한 사찰이다. 해상왕 장보고와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법화사는 한곳이 더 있다. 바로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 법화사이다.

제주 법화사의 장보고비는 지난해 11월 세워졌다.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철)가 제작비를 지원, 서예가 박동규 필체에 무형문화재 김옥수 명장이 제작을 맡은 장보고비는 높이가 무려 6.5m이며 너비는 2.4m로 글자 직사각형 형태의 비에는 모두 3,000자가 새겨졌다.

“일찍이 하버드대 라이샤워 교수가 ‘특출하고도 위대한 모험가 해상왕’이라 칭한 장보고 대사는 서기 828년인 흥덕왕 3년 임금을 배알하고 병사 일만명을 허락받아 해로의 요충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우리나라 서남해안과 동아시아 해상에 횡행하던 해적을 소탕, 세계사에 빛나는 국제해상무역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범선 항해시대의 옛 당포 인근 제주 법화사는 우리나라와 당나라, 일본은 물론 멀리 동남아시아 및 인도, 이슬람세계와도 이어지는 항로의 요충이기도 했습니다. 법화사는 이 바닷길을 오가는 무역선단의 중간기착지이며,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원찰로서, 그곳에 청해진대사의 큰뜻을 살려 장보고비를 제막하는 것은 북방의 광개토대왕비에 비견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몽스님은 제주도에 대해 “장보고의 글로벌 리더쉽으로 국운을 한번 걸어볼 만한 섬”이라고 말한다.

백양사 주지 진산식 < 사진제공 : 장성군청 > ⓒ2010 welfarenews
▲ 백양사 주지 진산식 < 사진제공 : 장성군청 > ⓒ2010 welfarenews
부처의 꿈, 장보고의 꿈

법화사는 고려시대 국가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상당한 사세를 갖고 있던 제주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하지만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 폐사가 되었는데, 1980년 무렵 시몽스님의 주도로 17년간 8차에 걸친 발굴조사와 함께 복원불사가 시작된다.

발굴 결과 알려진 사실은 관계자를 놀라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거대한 사찰터와 함께 3천여평에 달하는 구품연지터가 발굴된 것. 구품연지란 서방 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든 불교 사찰 내의 못을 말한다. 게다가 왕실에서나 사용된 각종 유물이 출토, 법화사가 아주 특별한 사찰이었음을 전해주었다. 당시 출토된 명문기와에는 1269년(원종 10년) 중창이 시작되어 1279년(충렬왕 5년) 중창이 마무리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법화사의 영화를 전해주는 기록은 더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태종실록’에 의하면 당시 법화사에는 원나라 양공이 만든 미타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의 존재는 한중간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었는데, 불상을 근거로 훗날 명나라가 제주도에 대한 지배력을 지속시키려 하자 조선의 태종은 불상을 한양으로 이송, 명나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제주도에서 한양까지 불상을 운반하는 인력만 수천명, 이 사실은 법화사가 당시 얼마나 큰 절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법화사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고찰이며, 장보고의 위대한 생애가 깃든 사찰입니다. 그로 인해 제주도가 국토의 끝이 아니라 해양시대의 신기원을 열 시발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장보고 이전까지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자 사고 가두어둔 울타리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장보고는 바다를 통해 사유와 행동의 자유를 구가했다. 바다를 고속도로와 같이 운영했던 것.
“장보고는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이 된다’라는 관음신앙을 믿었습니다. ‘관음’이란 말은 법화경에 나오죠. 일체의 중생 제도를 위해서는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게 필요합니다. 해상왕 장보고에게서 저는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백양사, 시몽, 법화사, 장보고…천년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백양사 대웅전  < 사진제공 : 장성군청 > ⓒ2010 welfarenews
▲ 백양사 대웅전 < 사진제공 : 장성군청 > ⓒ2010 welfarenews
백양사의 오늘을 있게 한 스님
만암 대종사 53기 추모제 거행

지난 1월29일, 고불총림 백양사 대웅전에서 오늘날 백양사를 있게 한 핵심 스님인 만암을 기리는 '만암 대종사 53주년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만암은 1876년(고종 13년) 1월17일 전북 고창 중거리에서 탄생하여, 한일수호조약이 강제로 맺어지는 난국 속에 부는 4세, 모는 11세 때 잃고 백양사로 입산하여 취운 도진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다.

16세에 구암사 강원의 강백 박한영 스님에게 경문을 배우고, 25세에 운문암에서 강사를 하다가, 35세 때 한일합방이 되자 만암 스님은 망국을 통탄하고 백양사로 돌아와 청류암에 광성의숙을 설립하고, 급변하는 시류에 알맞은 현대식 교육을 하였다.

지금부터 58년 전애 백양사는 와가 1동, 초가집 1동 뿐이었다. 하지만 만암은 사찰에 대웅전, 천왕문, 범종각, 조사전, 칠성각, 극락전, 명부전, 우화루, 사리탑, 향적전, 벽안당을 건축하고, 자급자족시설과 평등공양, 검소한 생활, 半禪半農으로 재산을 증식하여 오늘날 백양사의 면모를 갖추게 하고, 백양사 충창과 후학을 지도하다가 1957년 1월 10일(음) 세수 81세, 법랍 71세로 백양사에서 열반하였다.

백양사와 평생을 함께 한 만암 스님. 백양사와 함께 만암 스님의 半農半禪 사상이 다시 살아나 가슴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 다음호부터는 천년의 사찰 백양사의 문화유산과 관광자원을 연속시리즈로 게재할 예정입니다!

관광경제신문J
취재 / 유성욱 기자
사진 / 이담 기자, 장성군청

 ⓒ2010 welfarenews
▲ ⓒ2010 welfarenews
저작권자 © 웰페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