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동 266번지, ‘화재보다 무서운 것은 철거’
강제 이주돼 30년간 무단점유자 취급, 이제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해야

지난 12일 오후 4시경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1266번지에 화재가 발생, 이른바 ‘포이동 266번지 판자촌’의 수십 가구가 불탔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96가구 중 75가구가 잿더미로 변했으며, 집을 잃은 주민 100여명은 마을사무소와 천막에서 구호물품으로 견디고 있는 상태다.

강남구청 측은 주민들에게 구룡초등학교로 숙소를 옮길 것을 제안했지만, 주민들은 80%가 잿더미인 판자촌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있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판자촌을 대신할 장소 제공이 아닌 불탄 집들을 하루 빨리 복원하는 것.

‘강남 판자촌’, ‘타워팰리스 앞 판자촌’으로 알려진 포이동 266번지. 그 안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주민들은 한때 ‘무단점유자’로 불리던 사람들이다.

▲ 지난 12일 화재 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포이동 266번지.
▲ 지난 12일 화재 사건으로 잿더미가 된 포이동 266번지.
“지난 이야기는 눈물 나올 것 같아서 하기 싫어. 지금 현재도 그렇지만. 모든 게 그냥…….”

포이동 266번지에서 30년간 생활했다는 김용금(63) 씨는 1981년 자활근로대 대원인 남편을 따라 포이동 266번지에 오게 됐다.

자활근로대는 1979년 국가정책으로 넝마주이 등의 자활의지 및 근로 의욕 고취를 위해 조직됐다. 이들은 모두 450여명 10개 지대로 구성돼 서초구 정보사 뒷산에 지어진 막사에서 공무원들의 관리·감독을 받으며 지내왔으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인근 주택가의 민원이 빗발치자 분산정책에 의해 나눠져 강제 이주됐다.

그중 한 곳이 바로 포이동 200-1번지(현재의 포이동 266번지), 자활근로대 1-2지대 45명이 강제 이주된 곳이다.

김 씨는 포이동 200-1번지의 별명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였다며,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논과 밭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수렁에 빠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생겼다고 했다.

“그때 강남구청·경찰서에서 주민들을 관리·감독했어요. 주민들이 고물을 주워오면 공무원들이 저울에 달아서 무게를 재는데 고물 값을 다 주는 게 아니라, ‘네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서 넣어주겠다’고 그런 식으로 넘어갔어요.”

하지만 수입에 대한 착취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인권유린이었다. 정부는 1986년 제10회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보기 좋지 않다’며 포이동 200-1번지 주민들의 낮 외출을 금지시켰다. 뿐만 아니라 누명을 씌우고 고문하는 일도 일어났는데, 그 상처는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김 씨는 “다른 동네에서 폭력이든 절도든 사건이 일어났을 때 범인이 빨간 모자를 썼다고 하면, 여기 자활근로대원 중에 빨간 모자 쓴 사람을 찾아와요. 자고 있는데 그냥 신발 신고 들어오는 거죠. 발로 툭툭 차면서 ‘너 오늘 어디 갔었느냐 뭐했느냐’고 묻고, 대답하면 거짓말이라고 무조건 잡아가서 고문시키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요.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그 사람은 환청이 들리고 그래요. 집에 들어가면 가슴에서 불이 나고 그러니까 옷을 다 벗고, 헛것이 보이니까 잠자다가도 막 뛰쳐나오고……. 너무 안타까운 일이 많아서 말로 다 못해요.”라며 혀를 찼다.

▲ 텔레비전, 개수구 등 생활용품들이 불에 타 여기저기 널려있다.
▲ 텔레비전, 개수구 등 생활용품들이 불에 타 여기저기 널려있다.
▲ 불에 탄 75가구의 주민들이 천막과 마을사무소에서 잠잘 곳을 해결하고 있다.
▲ 불에 탄 75가구의 주민들이 천막과 마을사무소에서 잠잘 곳을 해결하고 있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정부는 공식적으로 자활근로대를 해체시켰다. 김 씨는 “1988년도에 ‘여기가 너네 터전이니까 벌어먹고 살라’며 사표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사표를 쓰고 나니 관리·감독하던 공무원들이 다 나갔는데, 준다던 통장이나 고물 값은 주지 않고 그냥 갔죠.”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어 “물도 없고 불도 없는 곳에서 연탄재 같은 것을 주워 땅을 메우고 그러면서 정착했어요. 당시 생활이 너무 어려우니까……. 옛날 기와집 같은 데 보면 벽에 붙은 시멘트 쓰레기통이 있어요. 집안에서 버리면 밖에서 철로 된 문을 열고 꺼낼 수 있는. 수박 껍질을 버리면 그런 것 주워서 깍두기로 만들어서 먹고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같은 해 강남구는 당시 하천 부지로 등록돼 있던 포이동 200-1번지 주민들의 주거지를 도서관 부지로 토지용도 변경처리를 했다. 이때 포이동 200-1번지는 포이동 266번지로 바뀌게 됐고, 200-1번지로 등재된 기록도 말소됐다. 해당 주민들에게는 단 한 장의 서신도 없었다.

1989년에는 개포4동사무소 신축을 위해 그 지역 무허가 가옥주 14가구를 포이동 266번지로 강제 이주시키는가 하면, 이후 강남구는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을 무단점유자라며 토지변상금을 청구하기 시작했다.

압류와 철거 공고가 나기 시작하면서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빈민해방철거민연합(현재 민중주거생활권철거민연합)과 함께 포이동266번지사수대책위원회(이하 포이동대책위)를 꾸렸다.

2009년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의 거주사실이 인정돼 주민등록이 등재됐지만, 눈덩이처럼 불어난 토지변상금은 아직 철회되지 않은 상태며 생활이 어렵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김 씨의 남편은 64세의 나이에 허리가 좋지 않지만, 고물 줍는 일과 막노동을 번갈아가며 하고 있다. 김 씨는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하다가 건강이 나빠져 쉬고 있다.

“젊은 엄마가 아이 낳아놓고 나가버린 경우도 있어요. 처음에는 서로가 좋아서 살았겠지만, 살다보면 그게 다가 아니니까 아이를 낳아놓고 도망간 거죠. 여기 몸이 아픈 독거노인들이 많은데, 그 아이를 키우는 할머니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어……. 이 동네 아이들이 다 그래요. 우리 딸만 해도 이제껏 단 한 번도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지 않았어요. 중학교 때는 집까지 5분이면 오는 거리를 친구들이 못 산다고 놀릴까봐 멀리 돌아서 오곤 했어요. 지금도 근처에 사는 직장동료를 먼저 보내고 집에 와요.”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김 씨 역시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김 씨는 “젊었을 때 우리 부부가 못 사니까 애를 안 낳았어요. 주변에서 ‘그래도 늙으면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하도 그래서 마흔 넘어서 딸 하나를 낳았죠. 딸이 지금 스물 두 살인데, 대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는데도 (못 가고) 직장에 나가고 있어요. 부모로서 가슴이 아파요.”라고 토로했다.

어려움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했던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소외받은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은 그 누구보다 ‘끈끈한’ 공동체를 일궈냈다.

“까짓 거 육체적인 고생은 괜찮아요, 쉬면되니까. 여기는 완전히 시골 분위기에요. 서로 뭐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눠먹고 챙겨주고 살아요. 진짜 여기서 재밌게 살았는데, 불이 나갖고는 이런 상황까지 오니까 정신적 고통이 크죠. 그나마 불났을 때 바람이 마을사무소 쪽으로 안 불어서 안탔어요. 마을사무소가 포이동대책위 회의실인데, 그나마 우리 살라고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 ‘타워팰리스 앞 판자촌’으로 불리는 포이동 266번지의 모습. (왼쪽) 다행히 불에 타지 않은 가구들 옆으로 잿더미가 된 가구의 모습이 보인다.
▲ ‘타워팰리스 앞 판자촌’으로 불리는 포이동 266번지의 모습. (왼쪽) 다행히 불에 타지 않은 가구들 옆으로 잿더미가 된 가구의 모습이 보인다.
포이동 266번지를 찾은 지난 17일, 주민들은 불탄 집을 최대한 빨리 복원할 방법을 찾는 데 몰두돼 있었다.

75가구의 주민들의 잠잘 곳과 먹을거리는 곳곳에서 들어오는 도움의 손길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30년간 압류와 철거의 위협 속에서 지켜온 보금자리를 잃으면 모든 게 끝이었다.

포이동 266번지가 갖고 있는 역사를 미뤄볼 때, 주민들은 서울시도 강남구청도 신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포이동 266번지 주민들’을 잿더미와 함께 쓸어버릴까봐 강남구청이 임시 숙소로 제안한 구룡초등학교도 갈 수 없었다.

미흡하게나마 이뤄낸 ‘정착’, 그것을 다시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강남구청과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포이동대책위 조철순 위원장은 매우 지쳐보였다.

조 위원장은 “서울시나 강남구청에 9년 동안 ‘우리는 무단점유자가 아니니 토지변상금 철회하고 주거환경 개선해달라’고 민원을 제기했어요. 이거 불나면 우리 다 타죽는다, 우리가 밤마다 방범 서고 이러는 거 너무 힘들다고요. 지금까지 방관하고 무시하고 자기 일 아니니까 구경했잖아요. 이럴 줄 알면서 구경했잖아요.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아무 대책도 없었어요. 묵비권 행사했고, 시와 구청이 서로 떠넘기기만 했어요.”라고 분개했다.

강남구청 측은 현재 임대주택을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강남구청 도시계획과의 한 관계자는 “(강제 이주)는 포이동대책위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며, 근거가 그렇게 명확하지는 않은 것 같다. 국가권익위원회에서 지금 조사 중에 있다. 강제 이주를 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곳에 재정착 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무허가 건물을 다시 지어줄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여기가 우리 생존권이에요. 주민 모두가 재활용 줍고 팔아서 생활해요. 우리가 여기서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생활 터전이기 때문이에요. 굶어죽기 때문에 못 나갑니다. 자활근로대가 여기 정착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국무회의까지 한 기록이 있어요. 차라리 자활근로대 사표 냈을 때 정리했어야죠. 벌금도 안 물리고 무단점유자로 안 몰고 토지변상금 안 물리고 정리를 했어야죠.”라고 울분을 토했다.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우리를 왜 몰아내려고 하는데요. 국가는 법을 다 어겨놓고 이제 와서 무슨 명분으로 법을 준수 하라고 합니까. 전 여기서 죽고 묻힐 겁니다. 주민들 또한 다 같은 마음이에요. 다른 무허가하고 포이동 266번지는 전혀 달라요. 왜 그들하고 똑같이 비교를 하는데요. 진실을 보여줘야 할 것 아닙니까. 정말 너무 억울합니다.”

인터뷰 내내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던 조 위원장은 끝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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