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활동가, 26일 새벽 활동보조인 퇴근 뒤 화재로 사망
장애계, “턱없이 부족한 활동지원이 가져온 억울한 죽음”

▲ 김주영 활동가가 26일 새벽 발생한 화재로 숨을 거뒀다. 화재가 발생하자 김 활동가는 119에 신고하고 구조를 요청했지만, 정작 중증장애로 혼자 거동이 어려웠던 그는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연기에 질식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두리 기자
▲ 故 김주영 활동가는 화재가 발생하자119에 신고하고 구조를 요청했지만, 정작 중증장애로 혼자 거동이 어려웠던 그는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연기에 질식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정두리 기자
26일 오전 2시 10분경,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의 원룸형 2층 주택 1층에서 원인 모를 불이나 김주영(여·34, 뇌병변장애 1급) 활동가가 사망했다.

화재가 발생하자 故 김 활동가는 119에 신고하고 구조를 요청했지만, 정작 중증장애로 혼자 거동이 어려웠던 그는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연기에 질식해 숨을 거두고 말았다.

故 김 활동가는 10년여 넘는 자립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지원코디네이터와 자조모임 등 업무를 맡아왔다. 또 활동지원서비스 확대와 이동권 보장 등 인권과 권리보장을 위한 활동에도 참여해 왔다.

故 김 활동가가 최근까지 활동했던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故 김 활동가는 장애인을 위해 개조된 원격 조종기로 문을 여는 등 탈출을 시도했지만 화재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특히 어머니가 시신을 확인했을 당시 얼굴에 심한 화상이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외롭게 화마와 싸워야 했던 그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활동보조인 퇴근 후에 발생한 화재 “도와줄 사람만 있었다면 없었을 죽음

▲ 故 김주영 활동가의 살아있는 동안의 모습.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 장애계단체
▲ 故 김주영 활동가의 살아있는 동안의 모습.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 장애계단체

故 김 활동가는 화재가 발생하기 전날 오후 11시 활동보조인이 퇴근한 뒤 홀로 잠들었다. 화재는 그가 잠든 뒤 3시간여 만에 발생했고, 그는 그 누구에도 도움 받지 못했다.

인근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강아지가 갑자기 짖어 깨보니 타는 냄새가 심하게 났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검은 연기가 나고 있었고, 놀라 나가 보니 2층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집 밖으로 대피해 있었지만 1층에 살고 있었던 사람은 집에서 나오지 못한 채 119의 진압이 진행 중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또 다른 주민은 “아침 일찍 일을 나가며 밝게 인사를 하곤 했다.”고 故 김 활동가를 기억하며 “전동휠체어를 타고 보조인이 함께 다니는 것을 봤는데, 어떻게 혼자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겠느냐. 주변에 사람이 누구라도 있었으면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순식간에 화재현장이 된 故 김 활동가의 집은 까맣게 변해있었다. 유리창은 깨지고 창틀은 모두 녹아 뒤틀려 있었다. 화재와 진압으로 어지러워진 23㎡(7평) 남짓 그의 집은, 타다 남은 옷가지와 가재도구들이 방과 부엌이 있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생전에 그가 타고 다녔던 전동휠체어도 모두 타버려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불길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녹아버린 컴퓨터 아래로,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사이버대학에 다니던 故 김 활동가가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자료들이 남아 그의 꿈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 ⓒ정두리 기자
▲ ⓒ정두리 기자
▲ 화마가 휩쓸고 간 김주영 활동가의 집. ⓒ정두리 기자
▲ 화마가 휩쓸고 간 김주영 활동가의 집. ⓒ정두리 기자
▲ 불길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녹아버린 컴퓨터 아래로,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사이버대학에 다니던 김 활동가가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자료들이 남아 그의 꿈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정두리 기자
▲ 녹아버린 컴퓨터 아래로, 故 김 활동가가 시험을 앞두고 공부하던 자료들이 남아 그의 꿈을 대신 전했다. ⓒ정두리 기자

 

 

 

 

 

 

 

 

 

 

 

 

 

故 김 활동가가 숨지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활동보조인 A씨는 전날 11시에 퇴근을 하면서 다음날 이사할 집을 함께 보러가자던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A씨는 “몸이 좋지 않아 지난 8월경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그만 두고 그림을 그리거나 공연 등을 보며 취미생활로 휴식을 취해왔다.”며 “최근 들어서는 학교 시험 준비에 열심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1월부터는 다른 센터에 취직해 다시 일을 시작할 예정이었고, 난방이 원활하지 않아 추웠던 집을 떠나 센터 인근으로 집을 옮길 예정이었다.”며 “언니(故 김 활동가)가 다음날 함께 이사할 집을 보러가자고 했었다.”고 말해 슬픔을 더했다.

“꿈 많았던 활동가 ‘김주영’, 화마 속에서 외롭게 싸워야”

故 김 활동가의 빈소는 한양대학병원에 26일 오후 1시 경 마련됐다.

그의 어머니는 “그 뜨겁고 무서운 곳에서 엄마를 불렀을 텐데, 나는 가지 못했다.”며 울분을 토해냈다. 이어 “네가 왜 그곳에 있느냐. 꽃구경도 시켜주지 못했는데, 먼저 가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며 끊임없는 한을 쏟아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급하게 영정사진을 구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장례식장 앞 그의 이름 ‘김주영’이 뜨자, 가족들과 지인들은 곳곳에서 억울한 죽음에 울음을 터뜨렸다.

▲ 김주영 활동가의 죽음에 마지막 국화를 올리는 손길. ⓒ정두리 기자
▲ 故 김주영 활동가의 죽음에 마지막 국화를 올리는 손길. ⓒ정두리 기자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김희정 팀장은 “오늘 아침 7시쯤 센터 활동가를 통해 그의 죽음을 들었다.”며 “기가 막혔다. 뉴스에도 벌써 나왔다는 말에 믿지 못하겠다며 소리만 질렀다.”고 말하며 입을 뗐다.

이어 “24시간을 활동보조인과 함께해야 할 정도인 그에게도 활동지원은 제한적이었고, 홀로 잠든 지 단 3시간 만에 사고가 발생했다.”며 “119에 신고하고 원격 조종기로 문을 열며 얼마나 살기위해 절규했을 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마음이 아프다.”며 슬픔을 전했다.

김 팀장은 故 김 활동가를 당당하게 자립생활을 하며 항상 꿈을 위해 노력하던 모습으로 기억했다. 그는 “故 김 활동가는 지난 총선 당시 계단이 있어 선거장에 가지 못하자 5시간을 1인 시위를 했고, 선거가 거의 끝나가는 저녁시간이 돼서야 선거를 할 수 있었지만 뿌듯했다고 말했다. 화가 났지만 기뻤다고 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떠올렸다.

김 팀장은 “故 김 활동가는 3개월여 전 몸이 좋지 않아 잠시 쉬고 싶다며 센터를 그만 둔 후 연락이 뜸했다. 요즘 들어 고민이 많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아직 만나지 못했다.”며 故 김 활동가를 영정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는 “장애인들도 다 같은 인간으로 함께 살기위해 나와 생활하고 있는데, 국가는 예산을 이야기하며 활동지원을 시간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너무 꽃다운 나이에, 아직 죽기에는 하고 싶은 것도 꿈도 많았던 그가 시간 단위의 활동지원 때문에 우리 곁을 떠났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 김주영 활동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앞에 곳곳에서 억울한 울움이 터져나왔다. ⓒ정두리 기자
▲ 김주영 활동가의 갑작스러운 죽음앞에 곳곳에서 억울한 울움이 터져나왔다. ⓒ정두리 기자
“부족한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그 마저도 부담돼 포기하는 현실”

이번 사고를 두고 장애계에서는 중증장애인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가 가져온 억울한 죽음이라고 비판했다.

故 김 활동가는 현재 활동지원서비스를 보건복지부로부터 183시간, 서울시로부터 180시간 등 363시간을 지원받고 있었다. 보건복지부로부터 받는 183시간은 중증장애로 높은 인정점수를 받아 최대한 받을 수 있는 103시간에 독거로 80시간이 더 해졌고, 서울시로부터 받은 180시간은 최중증장애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인 100시간에 독거로 80시간을 더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 모든 시간을 나눠봤자 하루에 12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혼자서 물을 마시는 것조차 힘들었던 그에게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이 또한 12만 원 가량의 본인부담금을 내야해 평소 故 김 활동가는 큰 부담을 느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동장애인자립생활센터 정동은 사무국장은 “故 김 활동가는 혼자 거동이 거의 불가능 했고, 식탁에 물을 올려놓으면 빨대로 물을 먹는 정도였다. 음식도 식탁에 올려 놓으면 포크로 찍어 먹어야 했다. 업무를 볼 때는 높낮이가 조정되는 책상에 마우스스틱을 이용해야 하는 최중증장애인이었다.”며 “조금의 움직임에도 활동보조인이 필요했고, 항상 활동지원서비스 시간이 부족해 시간을 쪼개고 쪼개 사용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故 김 활동가의 경우 학교와 직장을 다니고 있어 각각 10시간을 추가로 지원받을 수는 있었지만, 현재 받고 있는 활동지원서비스로 발생한 12만 원의 본인부담금 만으로도 부담을 느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추가시간을 포기해야 했다.”며 “직장을 다닌다는 이유로 차상위계층에도 속하지 못했던 김 활동가는 결국 돈이 없어 활동지원서비스 받기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왔던 것.”이라고 분개했다.

정 사무국장은 “많은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을 하고 있고 꿈꾸고 있지만, 故 김 활동가와 같은 위험이 언제 어디서 닥쳐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며 “중증장애인에게 활동지원서비스란 생명과도 같다.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는 예산 타령을 하며 1급 장애인에게만 활동지원서비스를 제공, 게다가 재심사를 통해 활동지원서비스를 줄이려 하고 있다.”고 날선 목소리를 냈다.

한편 장애계에서는 故 김 활동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애인활동지원제도 확대를 촉구하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으며, 5일장으로 치러지는 장례의 마지막 날인 오는 30일 오전 11시 광화문에서 노제를 진행할 예정이다.

▲ 타다남은 옷가지 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정두리 기자
▲ 타다남은 옷가지 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정두리 기자
▲ 녹아내린 창틀 ⓒ정두리 기자
▲ 녹아내린 창틀 ⓒ정두리 기자
▲ 김주영 활동가의 소식에 빈소를 찾은 활동가들. ⓒ정두리 기자
▲ 김주영 활동가의 소식에 빈소를 찾은 활동가들. ⓒ정두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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