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렇게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복지원에 들어가시게 된 과정과 그 상황이 궁금합니다.

그 당시에 제가 어렸을 때 9살이었으니까, 아이들 소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 어린 나이에 집밖에서 나가서 놀다가 길 잃어버린 아이들도 있고. 그리고 엄마아빠가 싸워서 잠깐 보기 싫어서 집 나갔던 애들도 있고. 어떤 애들은 학교 갔다가 오는 도중에 잡혀온 애들도 있고. 그런 애들이 많았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아버지가 가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시에서 위탁종용을 했었고. 그 위탁이라는 단어도 그 당시에는 몰랐죠. 아버지가 직접 파출소에 나랑 누나를 맡겼을 때 그 당시에는 왜 우리가 여기 와있는지 몰랐으니까 ‘위탁’이라는 말을 몰랐죠. 어른이 돼서야 그 단어를 알게 된 것이고, 어른들 역시도 마찬가지로 술 먹고 길에서 주무시던 사람들이 잡혀온 분들도 있고. 막걸리 한 잔 먹고 주먹질 하다가 잡혀온 사람도 있고. 주민등록증이 없다고 잡혀온 사람들이 태반이었을 거예요.

Q. 복지원의 실상이 궁금하거든요. 가장 두려웠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기억에 남는 것...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일단 구타당한 것이랑 고문당한 것이랑 사람이 내 앞에서 맞아죽는 것. 그것을 눈으로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요, 봤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을 가는 기회가 있어요, 겨울 같은 경우에는. 겨울에 목욕하러 갈 때 정신병동을 거쳐서 지나가니까. 그러면 창살에 매달려서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묶여있는 여자를 그 상태로 성폭행하는 부분(경우)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이 성폭행인 줄도 몰랐어요, 남녀 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런 것을 보고 어른이 됐을 때 그 사실이 성폭행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누나도 손발 묶여있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봤을 때 그런 것이 많이 충격이죠.

Q. 함께 책을 쓰신 전규찬 교수를 1인 시위에서 만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1인 시위를 하시게 된 과정도 궁금합니다.

이 사건이 폐쇄가 되면서 종결이 됐잖아요. 그런데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거에요. 생각해 보니 나는 그래도 사지육신이 멀쩡하고 말이라도 할 수 있는데 누나와 아버지는 말도 못하고 지능이 5살 정도에서 멈춰 버렸으니까, 이 피해자들은 누가 이야기 해줄 것이냐는 거죠. 언론도 아무런 취재가 없었잖아요, 25년 동안. 누군가가 제발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취재를 안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궁금하다 싶어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알아서 터뜨려보자. 내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하다가 죽어버리면 그때서야 한 번 달려들지 않겠느냐.’ 이 생각으로 1인 시위를 한 거였죠. 그러다가 운 좋게 전규찬 교수님을 만나게 된 거죠. 그런데 그 교수님이 30분 정도 같이 대화를 하면서 “1인 시위를 아무리해도 이 사람들은 안 봐준다. 매일같이 1인 시위를 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당신을 봐 주겠느냐. 안 봐준다. (차라리) 글을 써라. 그리고 언어를 만들어내야지만 이제야 그 사람들이 도와줄 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기에, ‘아 그게 맞는 말이구나.’ (생각하고) 그 날 바로 짐 싸고 내려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죠. 이게 만남인거죠.

Q.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 가셨는지 궁금합니다.

속에서 열불 막 올라오는 것 있잖아요. 그 당시에 당했던 기억들 때문에, 지금 이 나이에 내가 그렇게 당했다면 아마 가만히 안 있었을 텐데. 그 어린 나이에 당해서··· 그러면서도 과연 이 나이에 내가 또 다시 잡혀갔다 치더라도 내가 그 사람들한테 반항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생각이 드는 거예요. 겁이 나는 거죠. 그 안에서 직접 맞아 죽는 걸 여러 번 봤으니까. 안 죽고 살아남은 것도 진짜 대단한데, 여기서 포기하긴 좀 그렇다(고 생각했죠.) 글 쓰고 나서 며칠 간 잠을 못 잤죠.

Q. 점점 '탈시설 자립생활' 패러다임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추세인데요. 사실상 아직도 거주시설에서 차별받고 있는 장애인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어요. 이에 대해서 시설을 직접 겪으신 당사자로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있다고 생각해요. 형제복지원 같은 것이. 이것은 하루 이틀 걸릴 문제가 아니고, 시급하게 빨리 해야 돼요. 지금 위에서는 계속 ‘시일이 걸린다.’고 하지만 그 ‘시일’이 그 사람들에게는 지금 하루의 1분 1초가 ‘생계’란 말이에요. 이제 2013년인데, 지금도 어딘가 끌려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단 말이에요, 우리들이. 그런 시설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Q.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계획과 꿈이라는 것은 일단, 이 사건이 공론화돼서 이런 시설들이 발을 못 붙이게 하고, 그리고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을 때 계획이 완성되는 거잖아요. 병원에서 아버지랑 누나가 치료가 완치가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벌써. ‘더 이상 지능이 떨어지지 않게 약으로 늦출 뿐이다.’라고 이야기했으니까 그런 사람을 계속 가둬놓을 필요 없잖아요. 9살 때 이후로 우리 가족은 완전히 국가 권력으로 인해 박살이 난 거니까, 지금이라도 돌려달라는 거죠. 그러니까, 시골 같은 곳에서 조용히 우리끼리 살 테니까 간섭하지 말아 달라, 그나마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거죠. 그게 마지막 꿈이죠 저는.
 

<영상취재 : 김용균, 김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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